유년의 뜨락

사과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2]

왕언니 2001. 10. 6. 19:06

우리 친구 넷을 분석해보면... 나는 늘 콤플렉스를 느낀다.
나는 반장이었고 늘 그들을 리드하며 ...지금까지..살았는데도,
가슴 한구석엔 이미테이션 보석을 끼고 파티에 앉아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재산으로 따지면 넷 중 상위그룹이었지만 , 아버지의 학력이나, 처신들이 어쩔 수 없이 나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이었다.
강남 개발 때, 벼락부자 된 농사꾼처럼, 어쩐지 <걸쩍지근>한 것은 어쭙잖은 결벽성 탓인지, 현학적이고 싶어 하는 교만 때문일지...

당시에 제일 형편이 만만 한 건 경라였는데 , 그래도 그애네 집은 할아버지가 정읍서 유명한 한약방을 하셨고
아버지가 사고로 다리를 좀 절었지만 품위 있게 아름다운 어머니와 금슬 좋게 사셨다.

언젠가 경라가 엄마 혼자 소성 시골집에서 사시며, 여덟 딸의 고추장 된장을 똑같이 담가주시며,
봄에 밭에 나가 팥, 돔부, 콩을 거둘 때도제일 잘생기고 예쁜 열매만 따로 먼저 거두어 이름을 써놓은 후

이듬엔 그 씨앗만 뿌리신다는 얘길 듣고,밀레의 만종을 보는 듯 우아하고 향기로운 상상을 했었다.
하얗고 긴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엔 수건을 쓰고, 허리 굽혀 밭고랑에서, 보화를 캐듯, 종자를 거두는...

그 엄마 탓인지, 수많은 딸들은 하나같이 다 효녀고 머리가 좋다.
큰언니는 고등학교만 마쳤는데도 교보 사장을 지내고, 지금은 대우에 계시는 남편을 만났고,
경라는 갑자기 기울어진 집안 형편을 혼자 짊어지듯  많은것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거들었는데 ,
얼굴이 그때 모두가 흠모하던 영화배우 샤리죤스처럼 아름다워  우리 오빠도 은근히 좋아했었는데

결국 나중에 고대 영문과와 대학원을 나온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


성옥이네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몰락한 옛 지주의 집안인 셈이지만,
그때 우리가 보기엔 제일 폼나는 집안이었다.
2,3백 평은 실히 되는 정갈하고 고풍스러운 ㅁ자 기와집은 우리가 숨바꼭질 하긴 너무 벅찬, 많은 방과, 창고, 목욕탕
[그때 집안에 물을 데워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을 가진 집은 그 집뿐이었다]이 있었고,
어머니는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쪽을 진 정말 기품 있는 양반댁 안방마님 그대로였다.

솜씨는 또 얼마나 좋으신지 소풍 갈 때 찬합에 켜켜로 싸주시던 밑반찬이며 꽃 달걀이  항상 우리들을 감동케 했다.
아버지는 양반댁답게 늘 비단 마고자를 입으신채 정원을 산책하시거나,

우아하게 자갈길에 난 잡초를 뽑으시곤 하셨었는데 결국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집안이 기울어도 성옥인 피아노를 배웠고, 테니스와 나중엔 배드민턴 선수까지 지냈다.
집안의 기품이 그걸 가능하게 했었다는 것이, 뿌리 얕은 우리 집과 대조가 된다고 나는 속으로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혜선이네 과수원을 아지트 삼아
학교만 끝나면, 개천에 들러 무명 빤스^^를 입은 채로 멱을 감다  깊은 곳으로 가서 슬그머니 쉬야도 하고,
빤스를 대충 빨아 한여름 햇빛에 후끈 달은 자갈밭에 널어놓으면  한 시간이면 넉근히 바싹 마른 빤스를 다시 입을 수 있었고
검은 고무신에 다슬기를 잡아 담고, 맨발로 걷다가  그곳에 가도
그렇게도 천방지축인 우리들을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삶은 고구마와, 막 익기 시작한, 바람에 떨어진, 아오리 이를 한 소쿠리씩 갖다 주셨다.

양쪽이 다 유리 분합이 달리고 오 시 레가 있던 일본식 그 안채에도 우리들의 놀이공간은 무궁무진했다.
후다닥 숙제를 끝내고, 노트 뒷장에 순정만화의 주인공을 그리거나 공주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넷 중 그림실력이 좀 빠지는 혜선이가, 예쁜 그림을 얻어갖기 위해 젤 애를 썼던 것 같다.

혜선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과꽃 냄새와, 느릿느릿하고 진한 고창 사투리의 억양이
회갑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내 유년을 초록으로 띠 둘러 묶는 칡넝쿨 같다.
나에겐 없는 우리 집엔 없었던 고상하고 향기로운 추억이었다.


2001년 6월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