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선이는 未堂 서정주님의 조카딸이다.
26년쯤 전에 미당의 바로 아랫동생인,혼자 되신 엄마를 위해
아들도 큰딸도 아닌 혜선네가 그집을 지었고 엄마가 그집에서 10년쯤 혼자 사셨다.
미당의 가계에 면면히 흐르는 예인의 피를 받아선지 ,
혜선엄마 서정옥여사도 1980년대 정읍의 평범한 여늬 할머니처럼 사시기보다는
책을 읽고 시를 쓰고 난초를 캐러 다니시며 사시다가 ,10년전 1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미당과 너무도 닮은 얼굴로 말씨로 우리가 가면 언제나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시고
<아이고 내강아지들 왔능가?>하시던 그 때가 어제인듯 선연한데....
내게 남아있는 유년시절 추억의 팔할은 다 혜선네 과수원으로 채워져있을만큼
그때 나는 혜선이를 감싸고 있는 모든것들을 부러워하고 사랑했었는데....
정읍도 외곽으로는 많이 커져서, 혜선이 차가 앞장서고 우리를 태운 렌트카가 간길은
우리가 20년전에 가보았던 전주로 뻗어있는 길이 아닌 공단앞을 지나는 새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미국에서 돌아온 아랫동생 석철이네가 살다가
그들마저 작년에 서울로 이사하여 빈집이 된것을
혜선부부가 낙향하기로 마음먹고 지난가을부터 수리하여 ,
이제 우리가 첫단체 손님으로 방문하는것이었다.
[20년전 혜선네집 마당에서]
[20년전 혜선네 집앞의 장다리밭에서]
우리 친구들이 20년전 봄에 왔을때는 집앞에 장다리꽃이 흐드러지고 집 뒤의 다랭이밭에 딸기가 익을무렵이었는데
그때 여리던 향나무들은 빽빽하게 머리숱이 늘었고, 숯불에 고기를 구워먹던 등나무밑은 아직도 정갈하게 남아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거실 구석 한쪽에 그때는 없던 통나무장작을 때는 페치카가 타고 있었고
구석 구석 26년된집 같지 않게 반도건축 사장님인 남편과 혜선이가 단아하게 잘 수리해 놓아
우리 모두 내려와 살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북악터널 입구 평창동에 있는 본가가 나무와 바위들을 살려 지은 현대식의 건물이라면
북면의 별장은 콘도미니엄처럼 모든것을 갖추었으되
옛것들을 올망졸망 모아놓아 엄마품을 연상케하는 푸근함과 소박함이 있는 집이다.
아직 서울집을 정리하지 못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지만 ,
봄이 되면 서울집을 세를 놓고 아예 정읍에서 살거라 한다.
그녀의 가계가 전부터 그랬듯이 사람 좋아하고 교제범위가 넓어 늘 손님으로 북적대고,
성당에서도 중책을 맡아 30여년 어느 주일도 쉴수 없었던 부부인데
이제 그 모든것을 내려놓고 정읍에서 낙향의 여생을 즐기려한단다.
누구나 주먹을 움켜쥐고 있으면 새로운것을 잡지 못한다.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다른것을 얻을수 없는것이 진리인데
이 비움의 원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떠나지 못한다.
결정적인 경제적 파탄의 계기가 있거나 ,아이들이 곁에서 다 떠나있거나,
최악의 경우 힘든 병에 걸렸다면 오히려 결정이 쉬울수도 있지만,
나혼자만의 바램으로 되는것도 아니고 부부가 합의해야 가능한것이니...
어쩌면 그런면에서 혼자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것이 더 쉬운일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엔 혜선이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 밖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지만
그런 다음엔 다시 집구경하러 들려야하니 ,[애들 모두 혜선이네 집에 들리고 싶어했으므로 ]
혜선이 말로< 청국장이나 끓이고 김장김치 꺼내서 간단히 먹자>하기에 그러자 한것인데
안방에 차린 음식들은 부부가 같이 하지않고서는 절대로 혼자하지 못할 진수성찬이었다.
아까 마침 서울 갈 일이 있다고 터미널에서 마주친 승아아빠가 핼쓱한 이유를 알것 같았다.
어린시절을 고향에서 자란 전라도 여자들이 대부분 음식솜씨가 좋은 게 사실이긴하지만
혜선이도 엄마에게 물려받은< 3씨>가 탁월하다.
나처럼 살찌지않고 항상 그대로인 몸매와 하얀 피부의 맵씨,
감칠맛있는 말솜씨와 너그러운 마음씨
무엇보다 새로운음식의 맛과 옛맛을 기억하며 그대로 재현해 내는 음식솜씨이다.
두부와 북어를 굽고 삼계탕을 제대로 하고 메밀묵과 상큼한 샐러드와 굴과 멍게를 초장에 내놓은것 말고도
밑반찬으로 무말랭이와 깻잎과 고춧잎장아찌를 맛갈스럽게 무치고 ,
강경까지 가서 사왔다는 조개젓,무청까지 곁들인 싱싱한 김장김치에
배추로 담근 동치미까지 어느것 하나 맛없는 것이 없었다.
다 버리고 줄이는 중이라 그릇이 없다고 커피접시까지 동원했건만
내노라하는 한정식집 음식보다 더 맛이 있었다.
밥은 밥대로 다 먹고도 명순이가 사온 찰떡과,영남이가 그 귀한 모싯잎송편을 한박스나 가져오고
뒤늦게 도착한 소봉이가 미국에서부터 가져온 재료로 구웠다는 달지 않은 쿠키까지 곁들여
그야말로 풍성한 먹자판이 되었다. 이래서 여행중에는 살이 찐다.
[소봉이가 구워온 쿠키]
부지런한 친구들이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
내장산을 돌고난후 찜질방에서 잘 계획으로 집을 나서서 우선 제일 가까운 동국민학교를 가보기로 했다.
그러나 가슴 두근거리며 가본 동국민학교는
옛날에 그렇게 넓었던 운동장은 ,이젠 담장까지 헐었건만 너무나 좁았고
校舍는 한동만을 남겨둔채 겹겹이 새로 지어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주는건 아름드리 은행나무뿐이었다.
옛사랑은 그저 추억으로 즐길일이지 늙은 다음엔 절대로 만나지 말라더니...
다늙어 만난 소꿉친구들이 하기좋은 말로
<어머 얘 넌 하나도안변했다. 옛날 그대로야 얘>하지만, 대여섯살 손녀들이 듣고는
<할머니 그럼 할머니는 옛날부터 이렇게 늙었어?>한다고 웃었지만
거짓말쟁이 할머니들은 가슴속에 꽁꽁 감춰둔 어릴적 나이 그대로 살다 죽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동국민학교 졸업생들만 사진을 찍고 학교 근처의 자기집 있던곳을 돌아보고
내장산으로 가는길, 그 옛날 그렇게도 멀고 아름다웠던 혜선이네 과수원자리는 아파트가 들어서있었고
내장사 또한 절로 들어가는 단풍나무길만 옛모습이 남아있을뿐 변하지 않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수 한바가지씩을 마시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잎을 다 떨구어버린 가로수길을 걷자고 차는 뒤따라 오고 우리는 삼삼 오오 짝을 지어 걸어내려왔다.
내장사입구로 나오니 시간이 어중간하여 근처의 강천사 [순창]를 갈까하고 칠보저수지를 돌아 구불길을 올라가는데,
승은이가 자꾸만 멀미를 하고 갑자기 꾸무레해지는 날씨가 금방 어두워 질듯하여
차라리 정읍으로 도로 들어가 저녁먹고 찜질방으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 야 우리가 뭐 관광하러 왔냐,그저 이렇게 얼굴보고 웃으니까 너무 좋다 야>
맞다 똑같은 경치라도 누구와 보느냐에 따라 그 감흥은 전혀 다르니까...
혜선이가 지목하는 오대양 찜질방은 다시 학교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었다.
모두들 밤새 얘기하며 즐길 생각으로 찜질방앞에 내려, 기사에게 내일아침 8시 반까지 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게 왠일? 믿거라했던 그 찜질방은 하필 내일이 휴일이라 오늘밤은 12시까지밖에 안한단다.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와 출발하려는 렌트카를 붙잡고 다른 찜질방을 알아봐 달라했으나
일이 꼬이려는지 그기사는 정읍사람이 아니어 , 회사와 계속 전화를 해댔지만 신통한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이 하나뿐인 조용한 별장에서는, 밥멕이는것보다 잠재우는게 더 큰일임을 잘 알기에
혜선이를 귀찮게 하지않으려는 내 계획이 무참히 깨지고 보다못한 혜선이가 그냥 저희 집으로 가자한다.
<아이고 애초부터 찜질방에서 자는거 찜찜했는데 잘됐다야.
불 따숩게 때고 얘기하다 이리저리 적당히 끼어서 자면 되지 뭐>
한번 반장은 영원한 반장이라고 6학년 5반 반장 이었던 내게 지휘를 맡겼건만
혜선이가 정읍에 있다는 이유로 모든걸 일임했더니 저도 설마 찜질방이 열두시까지만 할줄은 짐작도 못한거였다.
[오른쪽 맨앞이 예쁜 할머니가 된 복남이]
저녁은 먹고 들어가야했기에 정읍 사는 친구들에게 맛있는 집으로 안내하라했더니
찜질방앞에서 합류한 복남이가 어디론가 안내한다.
복남이는 내가 전주여중으로 전학을 가기전까지 우리집과 제일 가까운 정읍극장 옆에 살았던친구다.
그때는 통통하고 코미디언기질이 다분하여 항상 우리들에게 웃을거리를 주었던 친구인데
오늘보니 제일 날씬하고 주름도 없이 예쁘게 늙어있었다.
고등학교도 마치지못할만큼 어려웠던 아이인데
저도 일찍 결혼하고 네 자식들도 다 일찍 결혼하여 큰손자가 중학교를 들어간다하여 다들 놀라워 했다.
그뿐아니라 자식들이 다 잘되고 효도하여 해외 여행도 많이 한 눈치였다.
이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임에 틀림없다.
점심을 거하게 먹었고 차속에서 계속 애들이 가져온 떡이며,
과자로 군것질을 해댔으니 다들 저녁생각이 없다 거짓말?을 했지만
막상 네사람앞에 한냄비씩 나온, 버섯과 미나리를 듬뿍 넣은 홍어찌게와
압력솥에서 갓 지어온 찰진 밥을 맛보더니 슬금 슬금 냄비를 거의 비우고 있었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려하니 정덕이가 이미 지불했다한다.
복남이는 복남이대로 제가 한턱 내려고 일부러 온집인데
정덕이가 낸 돈을 받았다고 주인을 다그치고 난리이다.너무나 푸근한 고향인심이다.
정덕이는 사정이 있어서 내일 여행에 합류못한다고 인사하고 가고,
복남이는 그길로 김제에 시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내일 아침 다시 합류하기로 하고 갔다. 서울살이 같으면 어림없을 계획들이다.
시골에 오면 이렇게 시간이 넉넉하고 안되는것들이 별로없이 모든것이 여유롭고 넉넉해보인다.
집근처에 사는 조카에게 전화로 부탁을 해서인지
다시 들어간 혜선네 거실 난로에선 장작불이 발갛게 타오르고
방들도 알맞게 데워져서 이불 없이도 잘만해보였다.
그래도 찜질방에서 잘거라고 나처럼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지 않은 친구들이 너댓 되어서
혜선이의 꿍쳐둔 옷들이 다 기어나오고,
자개장롱속에 숨어있던 얇은 이불까지 다 끌어내어 방방마다 배급이 되었다.
밤이 이슥하여 방셋과 거실에 나눠 들어간 친구들은
45~6년전 중학 1~2학년때 밤새워 시험공부한다고 친구집에 모여
<잠안와정>이나 <카페나>를 먹고 공부는 커녕 밤새 킥킥대고 놀던얘기 ,
이튿날 시험망친 얘기들을 하고
소봉이는 보스톤에 살면서 고생하던 얘기, 다음달 멕시코에서 결혼식 올리는 딸자랑이 늘어졌다.
이미 국제결혼 한 미국 며느리가 왕따 당할까봐
다음달 멕시코에서 결혼하는 딸에게도 mix[국제결혼]를 권장했다는 멋쟁이 엄마다.
나도 남못지 않게 잠이 없는 사람인데 워낙 어젯밤에 잠을 못자서 인지
아이들의 두런거리는 얘기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베개가 없어 방석을 구부려 벤 사람도 많았는데 살찐 사람들이 없어선지 코고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
새벽 여섯시까지 꿈도 없이 잘 잘수 있었다.
[보스톤에서 돌아와 이제 임자도 염전 사모님이 된 멋진 소봉이]
***3회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길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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