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뜨락

한겨울의 타임머신[1]..고향까마귀

왕언니 2005. 1. 19. 18:39

     2005년 1월17일 [월]  맑음

 

 


 

                   [18일 아침 혜선이네 거실에서 맞은 일출]

 

 

 왜 늙으면 옛날이 그리워지는걸까?

 

 無期囚 같은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시한폭탄같은거라서?
 아니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고목이 되어
 물 올라 싱그럽던 야들 야들하던  떡잎의 시절이 그리워서?
 <너없으면 못살아>의 시대는 가고 <너 없어도 문제없어>의 시대도 지나
 이제는 머지않아 <너 있어서 힘들어><너때문에 못살아>의시대가 오리라는 불안때문에? 
 메인의 자리에서 옵서버로 밀려난것도 서러운데
 머지않아 분리 배출도 어려운 폐기물이 되리라는 불안때문에...?.

 

 

 

 

 

 

 

 지난달 동지에 모였던 친구들과 애초에 모이던 우리고향 멤버들이

 각자 출발하여 정읍에서 도킹을 하기로 한날. 

 집에서 가까운, 믿거라했던 수원터미널에는 정읍행 버스가 없어  

 야탑에 있는 성남 버스 터미널을 이용할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도 하루에 세번 ,첫차는 8시45분이라니 고르고 자시고 할 수도 없었다.

[12시에 정읍 터미널에서 집결하기로 했으니 ]

 

 
 8시 45분차를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7시에 집을 나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6시에 아침을먹어야  하니  

 밥통에 밥도 없고 국도 없으니 5시엔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용인으로 이사온뒤 한번도 혼자서의 고속버스여행을 안해본 설렘까지 보태져서 
 잠을 설쳤다.
 새벽1시가 다되어  칼럼을 올린후 뒤척이다 잠들었으니
 다섯시의 기상은 사실 무리이지만
 새벽기도를 접고, 이틀동안 남편이 먹을 밥과 반찬을 준비해야하는지라
 그시간의 기상도 결코 빠른것이 아니었다.

 

 

 

 늙은 마누라가 곰국을 끓이면 남편들의 가슴이 철렁한다는데..ㅎㅎ . 

나는 곰국대신 김치국을 끓였다. 

늙은 남편 내팽개치고 놀러간다 할까봐 명란넣고 계란찜도 하고, 

홍어도 찌고 ,김치도 새로 꺼내 썰어놓고. 새벽기도,아침묵상을 접고 

간단히 기도하고  6시에,순전히 남편을 위해  같이  아침을 먹었다.

 

 

 

 

 찜질방에 가서 잘 계획이었으니 평소의 숄더백에 추가한건 팬티와 양말과 치솔뿐이었고
 옷도 굳이 새벽기도 가는 차림 그대로였던것은....

 

 이제 내나이는 오래전에 꺾이어 방한켠에서 시들어가는 국화꽃이거나  다 피어버린 갈대,

 혹은 볼품없이 감나무꼭대기에서 말라가는 돌감이거나, 

 아랫목에 굴러다니는  下品대추이거나  아님  빨랫줄에 매달린 먼지묻은 무말랭이임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어디 한군데는 요긴히 쓰일수있기를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붙여보는 이름표이지만..ㅎㅎㅎ]
 아니 또하나
 추운날 일터로 가야할 남편에게 미안해죽겠다는 몸짓을 확실히 해야 함으로 더욱...ㅎㅎ

 

 

 

 어둑컴컴한 7시에 마을버스정류장으로 종종 걸음을 쳤으나  건널목을 채 건너기전에 버스는 가  버린다.

 볼을 에이는 추위속에 15분이 훌적 지나도 다음 버스는 오지 않고,
 빈택시 두대가 유혹을 하듯 불을 키고,
 처분만 기다린다는듯 눈앞에서 하얀김을 내뿜는 바람에
 절대 택시안타고 버스타고 가리라했던 결심은 힘없이 무너졌다.
 

 맙소사 오리역까지 별로 막히지 않고 갔는데도 만 오백원이나 나온다.
 아. 택시비는 왜이리 아까운지...내가 보통사람들 사는곳에서 엄청 떨어져  사는구나....

 

 지하철로 바꿔타고 야탑역에 내려 성남터미널로 향했다.
 8시15분쯤 되어,내딴에는 일찍 도착했다 싶었더니  구성에 사는 성혜가 더 먼저와 있다.
 성혜도 부자이고 예쁜 얼굴인데 베이지색 반코트에 검정 바지...
 역시 수수한 할머니 차림이다.
 <내가 표 끊었어><벌써?>
 매점에서 종이컵에 스틱 커피믹스를 한잔씩 타먹고 버스를 기다렸다.
 이윽고 올라탄 버스는 이름만 경기고속이지,
 

 우리는 서울에서보다 [11700]더 비싼 13000원 시외버스요금을 낸거였다.

 

 성혜와는 국민학교 동창이지만  이렇게 나란히 앉아 세시간씩 이야기를 해보는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하얗고 쌍거풀이 예쁘고 학교가 제일 가까운 향교옆에 살았던 ...
 해마다 봉숭아 물을 여러번 진하게 예쁘게 들여
 제일 늦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있던 아이...

 내가 열다섯살 중학 3년때 전주로 전학을 갔으니 우리의 만남은 45년만인셈이지만
 성혜에 대한 기억은 그보다 더오랜 초등학교 6학년때에 멎어있으니
 내 뇌리에 찍힌 성혜의 얼굴은 그보다 더 오랜 ,더 어린 48년전 사진이다.

 

 

 

 

                                      [혜선이네 집에 도착하여]

 

 

 

  겨우 너댓사람만 태운채 출발하는   허름하고 쓸쓸한 시외버스를 타고 지난얘기들을 하다보니 어느새 정안휴게소였다.
 <야 ,옛날에 우리 엄마 추도식에 갈때 나는 서울에서 타고,언니는 성남에서 탔는데
  우연히  휴게소에서 만난적 있었는데... ,
  서울에서 오는애들 8시40분 차라고 했는데 , 혹시 여기서 만나지 않을까?>

 

  나는 허실삼아 말하고 화장실을 다녀와 따끈한 홍삼차 한잔씩을 사려는데

  정말 낯익은 친구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 영자야 희영아 ...!>
  우리들은  우연한 만남에 반가워 왁자지껄 떠들며,
 

  그때처럼 버스기사에게 양해를 구하면 한차로 갈수있지 않을까하고   먼저 도착한 우리 버스로 갔는데

  우리버스는 이미 기사가 앉아있고
  서울에서온 4명의 친구들이 탄 버스기사는 아직 식사중인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버스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저친구들을 이차에 태우면 안되냐 하니

  그쪽  기사에게 양해를 구해야하고 우리 차에는 cctv가 붙어있어 나중에 곤란하단다.   

  우물쭈물하는새에  출발 시간이 되어 우리만 차에 올라 출발을 했다.

 

  해명없이 먼저 떠난 이유를   핸드폰으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던 기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긍게 시방 그게 다 동창들이요?>
  < 네,국민학교 동창들이 45년만에 정읍에 모이거든요>
  <어디 국민학교 나왔소?>
  <동국민학교요.> 

  <어 나는 서국민학굔디...아 그러고 봉게 아까 친구들중 하나가 동창 같은디요?    아 앞자리로 좀 와보쇼잉> 

   수더분한 기사아저씨는 자못 흥분된 얼굴로   두번째 좌석에  앉아있는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서울 버스같으면 어림없을 방자한? 소음이어서 나는 민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우리보다 더 늙고 후줄근한 시골 노인 서너명이 상관없다는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우리도 다 정읍사람아니여?> 하는 눈짓이었다.

 

  그때부터  정읍에 다 가도록 평소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버스기사 김동락씨와의 걸쭉한 수작?이 시작되었다.
  순전히 김동락씨의 리드에 휘둘리며...ㅎㅎㅎ
 <아까 네사람중에 한사람은 낯이 익은디? 어디살던친구요? 난 연지동 살았는디>
 <도대체 몇년생이신데요?>
 <나요? 닭띠요?>
 <어머 그럼 동창이 맞네요. 그중에 서국민학교 나온애가 둘 있었거든요>

 

  나는 핸폰으로  연지동 살았던 영자를 불러 이쪽의사정을 얘기하니
  내막을 듣던 친구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를 전해들은 기사는 더욱 흥분한 얼굴이 되어
  거울로 나를 쳐다보며 연신 앞자리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따 이리 오랑게요.아이고 반갑소  어쩐지 어디서 본듯 하드랑게.
  근디 다들 여태 어디서 뭣들 하다가 45년만에야  정읍엘 온다요?>
 <딴지방 남자와 결혼해서 서울 살고 부모님도 다 이사하시고 돌아가시고 하니까
  자연 그렇게들  되지요.>
 <아따 그랑께 정읍동창들하고 결혼을 해야제 ,머시매놈들이 다 빙신이랑게
  딴동네 놈들한티 다 뺏기고...>
 <후후 아저씨는 그럼 여태 정읍 사세요?>,
 <그라지라 정읍 여자하고 결혼해서 여태 살지라우> 

  순박하고 정많은 기사 김동락씨는  정읍에 다 가도록 우리에게 말을 시켰다.

 

  서울 깍쟁이 기사들은 앞자리에서 껌을 씹는것도,전화를 하는것도,  큰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는것도 싫어하는지라... 

  그리고 그게 또 공중도덕이라 여기고 성 혜와도 소근 소근 얘기하고 있었는데...

 

  순진한건지 화통한 건지 김동락씨는,   정읍에 내리면 우리뒤에 도착할친구들을 꼭 인사시켜 달라.

  오늘밤에 찜질방에서 얘기하며 잘거라했더니 자기도 정읍에서 자는데   친구놈들을 소집해서 가볼까?

  그때 동국민학교 선생님들 얘기를 해봐라 ,  몇분은 아직 살아계시다는둥, 

  내일 서울로 돌아간다니까 ,5시 30분  막차를 타라 ,  

  내가 얘기 해 놓을테니 야탑에 내려서 전철 타지 말고   오리역 차고 까지 타고 가라는둥

  친동기를 만난듯 곰살맞게 굴었다.

 

 
  고향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더니...
  한번도 정읍을 떠나지 않고 인구가 줄어가는 고향에 살면서
  얼굴은 비록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졌지만
  까마득한 어릴쩍 얘기에 눈을 반짝이는것을 보니
  그건 분명 서울 아닌 정읍에 살고있기에 덜 닳아져 순박함이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그 차 올라먼 15분은 더 있어야 헝게 추운데 내리지 말고 안에서 기다리쇼>
  열한시 20분쯤 도착한 우리는 기사가 시키는대로 얌전하게 앉아
  친구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이윽고 도착한 영자를 끌어와 인사를 시켰다.영자말고 정순이도 동창이라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서로 동창임을 확인했을뿐 더이상의 진전은 어려웠다.

 

  <아 앨범이 있으먼 좋겄는디...>
  그의 탄식대로 50년 가까운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는데, 

  더군다나 무슨 아련한 분홍빛 썸씽이있던 친구도 아닌데   더이상의 대화를 끌어갈 무슨 끌텅이 남아있을것인가...

  소봉이의말대로 우리들의 비극은, 마음은 옛날 그대로 인데 몸은 늙어버렸다는것이었다.

  김동락씨는 내게 핸폰 번호를 주며 정읍에 올일이 있으면 또 내차를 타라, 

  도울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했지만...
  글쎄...우리에게 그럴일이 다시 있을까?  

 

  열두시가 되자 목포에서 영남이가 왔고 다시 정읍 사람이 되려하는 혜선이와
  정읍에 남아있는 정덕이,명순이,익산에서 온 승은이까지 합하여 열두명이 되었다.
  임자도에서 올라오는 소봉이만,
  배타고 버스타고 올라오느라 시간이 맞지 않아 1시20분에나 도착할거라한다.
  할수없이  먼저온 우리들 먼저 혜선네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혜선이가 렌트해둔 15인승 미니버스에 올랐다.   
  
 
 


   [혜선이가 차린 진수성찬앞에서 ,희영의 생일을 축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