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뜨락

사과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1]

왕언니 2001. 10. 6. 18:55

 

정읍 동 국민학교 시절[1952~57]
우리처럼 [ 나, 혜선. 경라, 성옥] 버라이어티 하게,
화려하게 재미있게 보낸 아이들은 없었으리라.

우리 집은 수성동이었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 필통 소리가 달그락거리는 책보를 허리에 매고,
학교 쪽으로 10분쯤 가면 소방서가 있고 소방서 바로 뒤에 경라네 집이 있다.
경라는 전주에서 전학 온 친군데 눈이 동그랗고
노래를 잘하고, 그림도 나와 쌍벽을 이루는 , 노란 옷이 잘 어울리는 친구다.

내가 경라네 집에 도착하면, 대개 경라네는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경라 어머니는 얼굴도 예쁘고 재주 많고 얌전한 분이셨는데 ,
맨 위로 오빠, 그 뒤 론 계속 딸을 낳는 바람에
그 당시에 벌써 딸이 일곱이었는데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나을 거라 했다

암튼 오월쯤 되는 그때 반쯤 열어놓은 미닫이 안쪽의 밥상에 식구들이 버글 버글 했다.
나는 경라가 나올 때까지 마당의 평상에서 감나무를 본다.
커다란 단감나무에 노란 감꽃이 가득 피어있다.
벌써 땅에 떨어져 누운 감꽃도 있다.

나는 실을 얻어 떨어진 감꽃을 주워 일반 먹으면서 목걸이도 꿰고, 팔찌도 꿰고, 반지도 만든다.
단감 꽃은 크기도 크고 달기도 땡감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학교에 가며 또 뜯어먹는다.

조금 더 가면 성옥이네 집이 나온다.
고부 殷 씨, 옛날 양반댁으로, 번듯한 ㅁ자 기와집이,
내 어렸을 기억엔 궁궐의 집이 그렇지 않았을까? 했다.

빨간 벽돌담을 빙 돌아 대문 안에 들어서면 안채까지 깨끗한 자갈길이 깔려있고,
화단엔 형형 색색의 꽃들이 깔끔하고 부지런하신 성옥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눈부시게 사철 피어있었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그냥 홑꽃이 아닌 탐스럽고 귀티가 나는 겹꽃이었고,
그때 처음 본 협죽도[죽도화]는 마치 일본 정원에 와 있는 듯 우리를 황홀하게 하였다.

성옥이네도 만만찮은 딸 부잣집이다. 다 예쁘고 재주 있고 공부 잘하지만
아들이 아니어서 , 보고 또 보고, 아홉이나 아우를 봤다. 끝내 홈런을 치지 못했다
.
성옥이는 우리 네 사람 중에 유일하게 피아노 공부를 제대로 했다.
그 덕분인가? 나중에 성악가 박인수 씨의 동생, 박범수[덕성여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우리 모임에서 노래하는 걸 여러 번 들었는데 박인수 씨보다 더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

성옥이도, 공부, 글씨, 그림, 운동 못하는 게 없는 재간둥이다.

지금 신두영 씨에게 한글 고체를 배워 국전에 특선까지 한 서예가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우리 세 친구는 혜선이를 데려다 줄 겸 혜선이네 과수원으로 놀러 간다.
먼지 폴싹 폴싹 날리는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면
탱자꽃이 하얗게 핀 울타리가 나오고,
우리는 네 잎 클로버를 찾듯, 네 잎짜리 탱자 잎을 찾으며 걸었다.

혜선이네 상리과원은 내 유년기의 요람과도 같다.
눈만 감으면, 사과나무에 뿌린 소독약 냄새까지 사과향처럼 느껴지고,
내 집보다 , 더 그리운 과수원이었다.

헤선이 엄마는 미당 서정주 님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다.
얼굴도, 느릿느릿 한 고창 사투리도,
아이고 내 새끼들 왔는가, 하는 말소리도
빙긋이 웃는 웃음까지 남매가 너무 닮았다.

혜선이는 피부가 하얗고 입술이 예쁘고 ,
특히 말을 너무 맛있게 똑똑하게 잘해서 나중엔 웅변을 했다.
놀 공간이 부족했던 그 시절의 우리들에게 혜선이네 과수원은
무궁무진한 놀이터요, 공짜로 낙과를 주워 먹을 수 있었던 먹거리의 보고였다.

혜선 엄마 서정옥 여사도, 오빠를 닮아 문재가 있었다.
아니 그 집안의 형제들은 모두 끼가 있었다.
비록 미당을 제외하곤 이름을 날린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단명하거나, 잘 안 풀렸는지...
너무 순탄하면 시적 영감이 밍밍해질까 봐였을까...?
막내 삼촌 서정봉 선생님은
우리가 정읍여중 다닐 때 한문을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발라먹다만 대추씨>란 별명으로 불렀다.
얼굴이 너무 마르고 검고 좀 울퉁 불퉁해서였다.

그러나 이몽룡의 변학도 생일잔치에서 지은 한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金樽美酒 千人血
옥 반가 효는 만성 고라. 玉盤佳酵 萬成膏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燭淚落時 民淚落
가 성고처에 원성 고라. 歌聲高處 怨聲高

그 한시만큼은 중1 때 완벽하게 흥미만점으로 배워
두고두고 요긴하게 아는 척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몸도 약하고 가정도 원만치 못했는데 40도 안되어 요절하셨다.
그 위의 이모 서정희 선생님도 국어를 가르치셨는데 암으로 돌아가시고,
지금 한분 남은 바로 밑의 동생분은 질마재에서 형님의 생가와 기념관을 돌보고 있는데
역시 부인과 별거하신 지가 몇십 년이다. 전북일보에 글도 쓰시고 아마 시집도 내셨을 텐데...


왜 내가 혜선네 족보를 소상히 적는가 하면 ,
혜선 엄마가 나를 유난히 예뻐하고 인정해 주신 탓도 있을 것이다.
혜선 엄마는 나를 반장이라는 이유 말고도, 항상
<조것은 뭐가 돼도 꼭 될 놈이여.>라고 들을 때나 안 들을 때나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하곤 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혜선 엄마가 난을 캐러 가시다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던 94년 말까지도,
아니 지금까지도 그분이 말하던 의미의 <뭐>가 되지 못했다.

재주는 있으나 끈기가 없고 , 너무 환경과 타협을 잘하는 회색분자랄까?

묘하게도 미당 선생님과 혜선 엄마는 음력으로 제삿날이 같다.
살아서 오빠를 늘 못 잊어하고 걱정하더니 한날 제삿밥을 나눠먹게 생겼다.
미당의 아들들이 다 미국에 있으니, 양력으로 치를지는 모르지만

혜선네는 그렇게 음력으로 밥 한 그릇 더 떠놓기로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