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르라미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초가지붕에는 빨간 고추가 널리고,들판이 점차 누런빛으로 물들면
대추볼은 점점 붉어지고, 게장사 할아버지가 거품을 내뿜는 털달린 참게를 팔러오시면
장독대옆 감나무에도 주황빛 얼굴들이 하나둘 늘어가고,시장으로가는 골목 함석처마는 그늘들이 좀더 짙어지고
고추잠자리가 낮게 날며 꼬리에 꼬리를 물면,엄마는 벌써 추석준비를 시작하셨다.
토란대를 잘라 볕에 쪼개 널고, 옥양목호청도 눈부시게 빨아널고, 엿기름을 절구에 빻아놓고
유기그릇을 꺼내 가마니에 펼쳐놓고 ,깨진 기왓장을 가루내어 물축인 짚으로 윤나게 닦으셨다.
거피[去皮]한 통깨를 볶아놓고, 콩나물잡채를 만들기 위해 기와시루에 콩나물콩을 앉혀 검은 보자기를 씌워놓고
엄마는 바쁜 하루를 쪼개 시장으로 가신다., 잘말린 가오리와 북어를 사고,기름집에 들려 대두[大斗]병 하나 가득 참기름도 짜고
말린 누룽지며,검은콩,들깨들을 강정거리로 맡기고,잰걸음으로 포목전에도 들리신다.
넷이나 되는 딸년들의 추석빔을 장만하기 위해서이다.
큰딸은(언니) 작년보다 훌쩍커서,꽃분홍 갑사치마에 노란 고사저고리를 새로 해서 입히고
고운것을 좋아하는 둘째딸(나)은 큰것의 남갑사치마를 물려 입히고, 저고리만 색동을 새겨 입힐참이다.
네살씩 터울이지는 아랫것들은 물려입히면 되지만 ,며칠씩 입고 뛰어놀아 얼룩진 동정만은 바꿔주어야 한다.
개화한 남편탓에 얻은 앉은뱅이 <씽가미싱>은 엄마를 요술쟁이로 만들었다.
하루종일 부엌일에 종종거리다가도 어두워지면 반짓고리를 챙기고, 불씨를 숨긴 놋화로에 인두를 꽂아
밤이 이슥하도록 잠도 잊고 저고리를 만드셨다.빨강,노랑,초록,남색,흰색,...
엄지손길이만큼씩 자른 색색헝겊을 하나 하나 이어 박아 색동저고리를 만드시는 것이다.
꽃버선과 코고무신까지 사놓으면 추석은 왜그리 더디 오든지....엄마가 새로피운 숯을 둥근 다리미에 담아
무릎을 곶추세운 언니와 추석빔을 다리는밤 ,우리는 마루끝에 앉아 조금씩 조금씩 배가 불러오는 달을 쳐다 보며
손꼽아 추석을 기다렸다.
이윽고 팔월 열나흗날이되면, 새벽부터 엄마는 방아간에 다녀오고,복남언니와 우리들은 평상에 두레상을 내놓고
모싯잎을 찧어 섞은 반죽으로 송편을 빚고, 엄마는 키낮은 부엌에서 하루종일 숯머리를 앓아가며 진나물이랑 지짐질을 하셨다.
들깨와 쌀을갈아 머위대,고사리,고구마순나물을하고,마른새우섞은 반달호박나물에,넓고 두툼한 두부전,입에서 살살 녹는 명태전,색색고명을 얹은 고기전까지...
눈치껏 부엌을 들락거리며 부침개를 줏어먹은 우리는, 설탕버무린 송편속을 넣다가 번번히 입으로 가져가서,추석날 상에 앉은 송편을 먹어보면
깨송편은 다 어디가고 덤덤한 풋콩 송편만 남았었다.
추석날 아침, 새옷으로 호사를 한 우리는,차례상을 물리고 널뛰러 나가고,큰집 작은집 남정네들은, 제법 멀었던 산소로 성묘를 갔다.
구불구불 누렇게 벼가 익은 다랭이 논길 사이로, 앞장 선 큰아버지의 ,다듬이질로 윤을 낸 흰 명주 두루마기고름이 소슬바람에 펄럭이던 그때...
들에서는 코스모스와 과꽃이 흐드러지고 ,벼이삭 무거운 마른논 여기저기서 메뚜기가 날던 그때..
새로 신은 흰고무신에 묻어오던 벌건 황토흙조차 정겹던 그때....
밤이면 색색의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학교운동장이나,빈 들에 모여 빙빙돌며 원무를 추던 강강 수월래...
이집 저집 밤이 이슥토록 돌아다니며 얻어먹던 강정과 볍쌀산자의 맛...
나는 지금, 내가 죽으면 전설처럼 파묻힐 그때의 그 추석을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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