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뜨락

한겨울의 타임머신[3]...본셈치고...간셈치고

왕언니 2005. 1. 22. 18:12

    

 

 

            2005년 1월 18일 [화]  맑은뒤 진눈개비

 

 

  

 

 
 
 

 
 

 

잠자리가 바뀌면 다들 늦잠자기가 어려운지 아직 깜깜한 시각인데 부스럭대기 시작한다.
새벽잠이 없는 노인네 습성의 발로인지, 

나처럼 몸속에 알람이 입력된 몇몇은 새벽기도 시간이어서 깨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한집에 여자들만,   그것도 회갑을 지냈거나 앞에둔 소꿉친구 할마시들이 

  열명넘게 숙박을 한다는게 어디 흔한 일인가?
  설렘때문인지 닭띠들 답게  다들 일찌감치 일어나 닭이 울기도 전부터  부시럭댔다.

 

 

  혜선이가  이집의 정 동향의 거실에서 맞는 일출이 장관이라고 하자

  너도 나도 일출을 보겠다고 거실로 모여든다.
  요가를 하는 아이,명상을 하는 아이,에어로빅을 하는 아이,스트레칭을 하는 아이..
  저마다 헤어져 산 45~6년동안 자기방식대로 익힌 건강비법들이 총동원되고, 

  시범을 보이는 아이 ,먼저 세수하고 화장을 하는 아이,  순번을 못탈가봐  아예 미리 볼일을 보는 아이 ...
  十人十色...해가 뜰때까지 거실은 다양한 모션들로 왁자지껄하다.

 

 

  바다에서 맞는 일출은 그보다 더 일찍 시작되겠지만,

  혜선네 앞산에서 시작하는 일출은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그래도 덜익은 단감처럼 발그레해진 봉우리 위에는   해뜨기 직전까지 鷄鳴星이 반짝거렸고
  7시40분이나 되어 계명성이 사라지면서    아이들의 탄성과 함께 눈부신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가부좌를 하고 가만히 해가 뜨는것을 바라보노라면 
  햇살이 퍼지면서 온몸이 따뜻해지고 어느새 몸이 해처럼 둥실 떠오르는것이 느껴져.>
  원래 감성이 풍부한 가계이기도 하지만,   시골집에서 사는동안 혜선이도 어느새 詩人이 되어있었다.

 

 

 

  나와 디카를 가져온 몇이 일출을 찍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정확히 8시반에 대문앞에 도착한 봉고를 타고 혜선이가 안내하는 해장국집으로 갔다.
  콩나물해장국이냐,쑥국이냐 설왕설래하다가   금호호텔 앞에 있는 쑥국이 유명하다는 충남집으로 갔다.

 

  남도의 별미집이란게 다 그렇듯,천정이 낮은 낡은 개량한옥의 유리문을 밀자
  꾀죄죄한 시골주막처럼 생긴 탁자 세개가 고작인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가운데에는 이미 넥타이를 맨 젊은남자 넷이 쑥국을 먹고 있다.
  <우리 다 못 앉겠는데? 딴데로 가자>
  왕년의 반장답게,막중한  인솔자?의 책임감으로  내가 한마디하자. 

  아직도 쪽을 찐 할머니가 황급히 막아선다.
  <몇명인디?방으로 가,방으로,여그도 여덜명은 앙글수 있어>

 

 

  허긴 오늘 하루 갈길이 바쁘니 아침 먹겠다고 우왕좌왕 할시간도 없다.
  할수없이 정말 어울리지 않게 큰 냉장고만 버티고 있는 좁은 방에 세명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좁고 낡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쑥국을 시켰다.
  쑥국이 나오기전에 따끈한 모주를 담은 노란 양은 주전자가 나왔다.

 

 

  母酒는 인목대비의 어머니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만들어 팔았다는  한약재를 넣은  달디 단 막걸리?인데
  언제부터인지 제주도보다는  전주 콩나물국밥과 전라도지방의 해장국에 자석처럼 붙어다니는 술이 되었다.
  어렸을적 기억으로는 노란설탕을 탄 막걸리정도로 알았던 술인데
  달착지근한 맛에 홀작홀작하다가는  취하기 십상이다.
  의례 먹어야하는줄 알고,아니 실은 공짜인줄 알고 한잔씩 마셨는데  나는 속이 알딸딸하였다.

 

 

  어떻게 쑥국으로 해장국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주모할머니는 30년 이상 그자리에서 쑥국을 팔아 유명해졌단다.
  제철에 어린쑥을 삶아 냉동 시켰다가   뚝배기에 사골과 멸치 우린물 붓고 된장풀고 다진 쑥을 넣고끓이다가
  밥 한덩이 넣고, 깍두기와 김치, 삭힌 청양고추를 썰어 내놓는게 전부인데
  30년동안 그 메뉴만으로 자식 다 가르치고 신문에 나는 유명한 맛집이 되었다니,
  사람들의 입맛은 어쩌면 복잡한것 보다는 원초적인,
  어려서부터 먹어온 단순소박한것을 그리워 하게 되어있나보다.

 


  한그릇에 4천원이라서  4만원인줄 알았더니 6만원이란다.
  공짜인줄 알았던 모주가 한주전자에 2만원이었던거다.  돈 주고 술마실일이 거의 없는 내겐 엄청 비싼 술이다.
  희영이가 공짜가 아니라면  반이나 남은게 아깝다고 페트병에 담아달란다.
  역시 알뜰한 할머니들이로고...

 

 

  오늘 일정은 미당 생가와 문학관을 거쳐  선운사와 동호,구시포해수욕장의 바닷가 구경,
  그리고도 시간이 되면 줄포, 곰소,를 거쳐   격포에 가서 바지락죽이나 백합죽으로 점심을 먹고
  정읍으로 돌아와 5시 경에는 각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대충 정했는데....

 

  중간에, 난데없이 혜선에게 모스크바에 가있는 용애가 서울에 왔으며

  지금 KTX를 타고 정읍으로 오고있다는 전화가 왔다.
  선교사부부로 모스크바에 간지 15년이상 된 용애도 동국민학교  동창이고   보고싶은 얼굴이니
  아무리 예고없이 온다고 하나 그냥 보낼수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흥덕에 가까 이 가고 있었으니

  가던대로 갔다가   예정을 좀 앞당겨 정읍에 도착하여 얼굴을 보기로 하고
  용애는 그동안   고부에 사는 다른 친구와 정읍에서 만나 내장산을 다녀오는걸로 낙착이 되었다.

 

 

 

   

 

                     [혜선네 방에 있는 미당 육필 가리개]

 

 

 

 

  미당의 생가가 있는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는, 우리 엄마의고향이기도 하다.
  질마재란 그동네 산 소요산이 소처럼 생겼고 , 그 고개가 소의 안장처럼 생겼다해서
  마소의 안장이란 다른말 <길마>를 사투리로 질마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채석강과 새만금방조제때문에 유명해진 扶安은 부안군에 있고,
  미당과 엄마가 태어나신 곳은 고창군에 있는 富安이다. 
  미당이 1915년생이고 ,  미당의 부인이신 혜선의 외숙모 방옥숙여사와 엄마가 똑같이 1920년생이니까
  어쩌면 어렸을적 서로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살아계실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미당은 200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아가셨다.  [우리 시아버지도 199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아가셨다.]
  꼬리뼈를 다쳐 오래 고생하시던  아내  방옥숙여사가 돌아가시자  이내 곡기를 끊고 맥주로 사시다가 두달만에 가셨는데
  두 아들이 다 미국에 있고 하필 크리스마스시즌이라 발인이 늦춰지기도 했었다.

 

  친일과 전두환생일 찬양시를 썼다고 ,

  한때 詩仙으로 까지 추앙받던 그분은  제자 高銀에게 철저하게 까발리고 폄하되어 있던 즈음이라  

  그 우울증이 명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문민정부이후에  평가절하 되던 미당은  

  그러나 地自制 바람을 타고   슬그머니  고창군의 관광수입을 올려줄 <껀수>가 되어있었다.
  고창군은 그동안  미당의 동생,서정태씨가 돌보던 기념관과 생가를 복원?하고 ,  산소에 국화밭을 만들고
  폐교를 사서 문학관을 만들어 고창군에게 효자? 노릇을 시키고 있었다.

 
 
 

   

         [ 고창군은 폐교를 사서 10억이나 들여 미당 문학관을  만들었다.]

 

 

 

 

 

  미당의 친일행적이나 전두환정권을 옹호하는 글등은 그늘임엔 틀림없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법이어서 ,  그래도 내겐 우리 어렸을적 혜선의 上里果園 을 시로 써주신 외삼촌으로,
  대학때 현대시론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으로  더 친근하게만 기억된다.

 

  내가 스무살때 미당은 마흔다섯이셨는데,  자택에서 철저하게 한복을 입으시는것과는 대조적으로
  학교에 오실때는 언제나 더블버튼의 체크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
  겨울엔 헌팅캡이나  중절모를 쓰시기도하고 스틱을 짚는 그시절 첨단의 모더니스트였다.
  학보사 시절 꼭한번 취재를 갔었는데   부부가 다 모시한복을 입으시고 결명자차를 진하게 끓여주시던 생각이 난다.

    

 

  우리는  썰렁한 생가로 먼저 갔다. 미당의 상징이 국화라고 여기는것일까?
  기념관과 생가에 이르는길의 대부분에 국화가 심겨있었고   생가 측백울타리 울타리안에는 얼어버린 무더기속에
  명이 길기도 한 단추같은 노란소국 몇개가 아직도 살아 남아 진한 향내를 뿜고 있었다.>

 

 

 

 

 

 

 

 

                          

 
 

 

 

                                   [생가의 화단에 있던 소국]

 

 

 

  

  사람의 온기가 없는 생가는,우리집 옆 민속촌에서 보는 불특정 시골농가의 박제 같았다.
  우리는 기념사진 한장을 찍고 기념관으로 갔고

 

  거기서 공덕동시절에 찍으신듯한 부부의 사진을 보았다.

 

  사람의 일생이,  모든사람에 의해  완벽하게 일치된 평가로 정리되려면 몇년이나 걸려야할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 평생을 산다는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변화많은 질곡의 세월을 겪을수록 그것은 더 힘이 들겠지...
  똑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무식한 우리엄마가   다만 우리형제들의 엄마로,아버지의 조강지처로
  이름없는 잡초의 유순한 일생을 살고 가셨다면 
  미당은 먹물을 먹은 아버지를 두었고 영리한 탓에  浮沈을 되풀이하는 영욕의 생을 살고 가셨다.
  누가 더 보람있는 인생인지...  하나님이 평가하실가? 아님 우리 후대에 또한번 평가가 바뀔때가 있을까..?.
  친구들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평가가 있겠지만   아무도 소감을 입밖으로 피력하지 않았다.
  [우리는 혜선이와 한배?를 탄 사람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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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덕동 시절의 미당 부부]

 

 

 

  우리가 기념관을 돌고 있을동안  혜선은 산소에 가보려 했는데 공사중이라 올라가지 못했다고 되돌아 왔다.
  미당이 걸물은 걸물인가보다   이 추위에도  순천대학이라고 쓴 버스가 답사생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선운사로 갔다. 우리들중에 선운사가 처음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선운사구경은 생략하고
  매표원의 양해을 얻어 봉고에 탄채 도솔암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가에 상사초 겨울잎들이 파랗게 무리져 있다.
  겨울에 있던 잎들이 봄이 되면 다 져버리고,   구월이면 생뚱맞게 맨숭한 꽃대만 올라와 빨갛게 무리져 피기에
  평생 꽃과 잎이 만날수 없다하여 相思草라한다. [석산 石蒜이라고도 한단다.]

 

 

 

 

 

                                           

                                     [상사초의 겨울나기]

 

 

  사실 서넛이 왔다면, 1.5k 정도이니  다음갈길이 바쁘지 않다면 쉬엄쉬엄 걸어가도 좋을만한데...

  도솔암은  관광객을 더 받으려는지   주차장을 위한 대대적인 공사를 흉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실망한 너댓명은 입구의 찻집으로 먼저 들어가고  

  나와 소봉이와 다른 친구 둘이 오솔길을 따라  마애불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선운사 동백은 동백이 아니라 春栢이라 4월에나 핀다는데
  도솔암 뒷켠에는 성급하게 봉오리를 연 동백이 추위에 얼어 반만 피어있었다.

 

 

 

                                                                      [얼어있는 동백]

 

 

 

  절 입구의 도솔암찻집에는 명상음악이 흐르고 각종 한방차와
  喫茶용 소품들, 한과,양초,천연염색한 개량한복,명상CD 같은것을 팔고 있었다.
  우리들은 솔잎차와 대추차에 곁들여 복분자한과를 먹었는데   차한잔에 5000원이나 해서
  해장국값보다 더 비싼 차를 마신셈이었다.
  반장의 재량으로 모두에게 서울에서 보기 힘든 甘苔구이 한포씩을 샀다.  꼭 메생이를  얇게 말려 김처럼 구운것같다.
  나는 아들딸들에게 주려고 별도로 두개를 더 샀다.진혁이가 아주 좋아할것 같다.

 

 

 

 

 

      

 


 

 

 

  어느새 두시가 되어오고 있었으므로 빨리 내려가서 점심을 먹어야했는데
  동호를 지나 구시포해변을 돌때 이미 시간은 점심을 넘었고,   정읍에서 용애를 만나고 서울엘 가려면
  차라리 배고픈걸 좀 참고 정읍에 가서   점심겸 저녁으로 맛있는걸 먹자는 쪽 으로 또 수정이 되었다.

 

  어제 먹다만 떡과 쿠키 밀감들을 차속에서 계속 나눠먹었으므로   사실 배는 그닥 고프지 않았다.
  다만 애초에 상상했던 바닷가에서의 조개죽이나 매운탕이 아니어서 섭섭했을뿐... 

  그러나 우리모두 이미 어렸을적 읽은 소공녀에서 주인공 세라가 하듯

 

  ...본셈치고,...먹은셈치고...에 이골이 나있었다.

 

 

  다들 정읍이나 그 근처에 살았고 아직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 코스가 처음인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올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일정과 코스가 수정되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었을것이다.
  아니 45년만에 같이 한차를 타고 한고향을 돌아다니는것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즐거웠기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읍으로 돌아온 우리는 몇사람이 추천한 맛있는집 중에서 

  호남고등학교 쪽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  혜선이가 추천하는 옛촌이라는 조그만 한식집으로 갔다.
  보리밥과 쌈밥과 같이 팥죽,팥칼국수를 하는 집이었는데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4000원짜리 보리밥에 곁들여 나오는 반찬이   어지간한 한정식 수준이었고 다 맛이 있었다.

 

  제일 비싼게 7000원짜리 소불쌈밥이었는데  다들 보리밥과 팥죽을 먹고 싶어했기에
  적당히 섞어서 시켜서 먹기로 했다. 팥죽을 먼저 달라했더니 먼저 주는건 어렵지 않은데
  그러면 밥을 다 못드시니까 나중에 주겠다 했다.  

  보리밥은 기장을 섞은 찰보리밥이었는데   고슬하게 밥도 잘 지었고 곁들이는 나물이며 생채가 다 푸짐하고 맛이 있었다.
  팥죽도 서울처럼 쌀을 섞지 않고 진한 팥물에 새알심만 넣은 것이 어찌나 맛이 있는지...
  밥을 다 먹어가는데 용애와 종순이가 물어 물어 찾아왔다.
  정말 느닷없는 동창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가던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점심밥값은 또 어젯밤 선수를 뺏긴 복남이가 먼저 낸 모양이었다.
  육칠만원 남짓으로 배부르게 맛있게 먹은것도  기분좋은 일인데 ,
  이제 살만큼 사는 친구들이 흔쾌히 밥한끼씩  사주는 선심도 기분나쁜 일은 아니었다.
 
  네시쯤 우루루 일어나 그근처에 오빠집이 있다는 소봉이만을 내려두고   다같이 봉고를 타고 터미날로 갔다.
  성혜와 영남이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5시 반 성남행을 타야했기에 터미날에 남고
  서울행 네명은 마침 떠나려는 4시반차를 타고 떠났고,
  승은이는 익산으로,용애와 종순은 혜선네 집으로 먼저 가게 했다.

 

  렌트 비용으로 25만원을 지불하고 보니 
  혜선에게 이사축하금으로 금일봉을 준것까지   1박2일 여행비용은 고속버스비를 포함하여 1인당 10만원꼴이 되었다.
  나는 아홉시 반이 넘어 서울에 돌아와,   그밤에 잘 챙겨온 영수증을 보며  결산보고서를 작성해야했다.
  잊어버리기전에...그것까지가  반장의 임무이기에.... 

 

 

 

  한겨울에 갑자기 올라탄 타임머신은 걱정했던 추위,눈,사이를 피해 잘 돌아다녔고
  집으로 오는길에 내리던 진눈깨비가, 정읍엔 눈으로 내렸는지 ,  이튿날 정읍엔 큰눈이 왔다고 했다.
  우리가 떠난뒤에 눈을 뿌리신걸 보면 ,눈내린 고향산천도 좋았겠지만 

  행여 눈길 사고로 식구들 걱정 안하게 나를 도와주신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던듯하다.

 
 
 
 
 
 
                                    
[도솔암 찻집에서 마신 솔잎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