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소리와 분노>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에 , 한국어 제목으로 <음향과 분노>라는 번역서가 있습니다.
이 미국 소설 원래 제목인 Sound and Fury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한 대사에서 따온 것으로, “인생은 백치들이 의미 없이 지껄이는, sound and fury로 가득 찬 이야기” 라고 번역했는데 이 sound and fury를 <소리와 분노> 라고 번역했는데...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 소설은 미국 남부의 컴슨 가문에서 일어난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작중 인물 4명이, 각각 자기 관점, 작가의 전지적 시점 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가족 상황을 비교적 건전하게 보는 관점도 있지만 자기 시점, 자기 감정, 자기 편견, 자기 환상에 빠져 말하는 인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인물의 이야기는 자기 말이 옳다며 말하는데, 떼를 쓰며 분노하게 하는 그 이야기가 마치 요란한 소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미국 남부인데 ,이 소설은 남부 사람들이 남부인들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떼쓰고 주장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 자기 관점, 자기 편견, 자기 감정에 붙잡혀 그것을 소리치며 주장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데 자기 관점, 자기 편견이란 악보를 가지고 건반을 마구 두들겨 댐으로 피아노 소리가 음악이 아닌 소음과 같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Sound and Fury, 분노가 가득한 떼를 쓰는 소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자기 주장,편견이란 악보로 분노에 찬 소음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면, 하늘 악보를 자신의 삶으로 연주하여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어떤 노래를 할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시편 23편
우리는 시편 23편에서 그런 음악을 연주하는 한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는 이미지로 그린 그림이자 운율이 있는 노래인데, 시편 23편은 그 속에 인생의 낮과 밤, 그리고 인생의 끝과 그 너머까지를 담고 있는 한 폭의 그림입니다.
1절은 인생의 낮, 2절은 인생의 밤, 3절은 인생의 끝을 노래하는 한편의 노래입니다.
인생은 낮과 밤과 끝,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된 것이 아니라, 낮과 밤이 반복되는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고 마침내 인생의 끝에 이릅니다. 낮과 밤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 평안과 불안, 밝음과 어두움의 두 박자의 리듬을 따라 매일 반복되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모두 낮과 밤, 기쁨과 슬픔의 반복의 하루, 일 년 십 년을 살아가는데, 그런 삶은 어떤 소리를 낼까요?
<소리와 분노>란 소설처럼 소음을 낼까요? 시편 23편처럼 음악을 연주할까요?
시편 23편의 시인은 이런 음악을 연주합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인생의 낮에도 밤에도 끝에도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연주가 가능할까요? 어떻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여호와가 우리들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리석고 무력하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여호와가 목자가 되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약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시면 인생의 낮과 밤과 끝에서 ‘부족함이 없다’라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뜻인데, 대체,여호와는 어떠한 목자이시기에 우리는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낮
여호와는 인생의 낮에 목자가 되십니다. 2절입니다.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2)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는 아름답고 좋은 인생의 낮입니다. 건강하고 직장생활하고 자녀들도 자라는 낮의 때입니다.
3절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3) 외적 형편만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도 활기찹니다. 영혼이 소생되고, 하나님이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말 그대로 인생의 낮입니다. 때로 이런 낮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음악을 연주합니까?
중국 전국시대 편작( 編鵲) 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명의라고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삼 형제 모두가 의사인 집안의 막내였는데 하루는 왕이 편작을 불러 이렇게 묻습니다. "삼 형제가 다 의사인데 네 생각에는 누가 최고 의사라고 생각하는가?” 편작이 말합니다. “예, 물론 큰 형님입니다. 저는 큰 형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큰형이 유명해지지 않고 네가 유명해진 것이냐?” 편작이 말합니다. “형님은 환자의 얼굴만 봐도 무슨 병인지 알아서 병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료합니다. 그런데 환자는 아프지 않으니 고마운 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증세가 미미하게 나타났을 때 그 병을 알고는 치료해 줍니다. 환자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누구나 다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병이 커져서 환자가 고통을 느끼고 죽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그 병을 압니다. 그래서 독한 약을 처방하고 때로 수술도 하면서 치료합니다. 환자는 제가 자기를 살려주었다고 생각하고 저를 최고의 의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평소 별 어려움이 없는 일상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고마운 줄 모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매일, 매순간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고 삽니다. 인생의 낮이 자기 실력, 자기 능력 때문인 것처럼 자랑하며 살다가, 이런 풍요와 편한 삶이 다 인간의 능력과 기술 덕분인 것처럼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의 낮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서 듣는 소리입니다.
“그가”
그러나 시인은 어떻게 합니까?
2절입니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2)
시인은 자신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는 것이 ‘그분’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리석은 양 같은 나의 목자셨기에 인생의 낮이란 은혜가 주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의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는다. (그 까닭은)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태양)으로 말미암아 그 밖의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C.S.루이스)
이 말처럼 우리는 해를 직접 볼 수 없지만, 대신 햇빛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식물과 동물들은 봅니다. 우리는 햇빛 때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을 봄을 통해 해를 간접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 않고,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무수한 동물과 식물의 생명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봅니다.
햇빛이 만드는 수많은 생명체를 보고 햇빛에 감사하듯, 우리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알고 그 선물들을 통해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들을 즐김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통해 그것을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는 인생의 낮에 여호와의 은혜를 연주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낮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범사에 은혜에 감사하는 음악을 연주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밤
인생에는 낮만 있지 않고 밤도 있습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머물 때도 있지만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만나고, 시편에서 무려 85번이나 나오는 원수라고 불리는 어려운 사람들도 만납니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이 인생의 밤을 만듭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요?
인생의 낮에는, 하나님의 주신 선물에 감사하지 않고 살다가, 인생의 밤에는, 하나님이 나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간 것처럼 불평 가득한 소리를 냅니다.
골짜기로 들어가면 그 속에 빠져 다른 것이 보이지 않듯, 어려운 상황의 골짜기 속에서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며 원망 가득한 소리를 냅니다.
원수 앞에 있으면, 주변의 많은 사람은 잘 보이지 않고 오직 그 원수 한 사람만 보입니다.
시편 23편의 원수란 단어는 ‘옥죄다,’ ‘묶다’라는 의미인데 원수에 관한 생각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마비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의 따스한 시선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원수의 차가운 시선만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원수가 저렇게 나를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며 왜 숨어 계시느냐는 한탄 가득한 소리를 냅니다.
인생의 밤은 이런 어려운 일들과 어려운 사람으로 인해 더 깊어집니다. 이런 밤에 여호와는 어떻게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일까요?
함께 하심
세상의 여러 종교나 사상은 대부분 인생의 밤을 다룹니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사람이란 인생의 밤을 인과응보로, 업보로, 인연으로, 우연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로 설명하려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그런 해석 속에 인간은 고난의 땅에 살고있으나, 신은 그런 땅을 초월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알지는 몰라도 고난에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다릅니다, 인생의 밤을 아실 뿐 아니라, 그때 함께 하십니다. 고난을 이해하는 정도나 마음의 공감 정도가 아니라 그곳에 계심으로 함께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곳으로 갔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떨기나무는 보잘 것 없는 나무처럼 되어 버린 백성들이고, 불은 그들이 겪는 극도의 고난입니다. 불이 붙은 떨기나무가 있는 곳을 거룩한 곳,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고난 속에 있는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갔을 때 빛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행전 22:7).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고통의 현장에 없으신 하나님이 고통을 함께 겪고 있을까요?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는 <그분의 형상으로>에서 뇌의 신비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뇌에는 고통을 감지하는 말단 신경세포가 없어서 뇌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의사의 손이 두개골 내부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는 무엇을 잘라낸다고 해도 뇌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뇌에 오묘하게도 전신의 모든 고통 중추가 다 있어 새끼손가락에서 엄지발가락까지, 모든 내장 기관에서 모든 외부 표피까지, 체내의 어느 부위이든지 그곳에서 생기는 모든 고통은 다 뇌를 통과하기에 뇌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취도 말단 신경세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뇌가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기에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처럼 여호와는 고통의 현장에 육체로 있지 않지만, 신비한 방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의 고통에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난을 친히 가장 극도로 겪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난을 공감할 뿐 아니라 고난을 공유하십니다. 이렇게 친히 고난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고난을 아시되 경험적으로 아십니다.
“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8)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의 밤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원수 앞이란 인생의 밤에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모습을 이런 그림 언어로 묘사합니다.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목자는 자신의 지팡이의 둥근 쪽으로 양을 건져내십니다. 지팡이의 곧은 부분으로 바르게 인도하십니다. 인생의 밤에 위기에서 건져내심으로, 돌이켜 바른길로 가게 하심으로 함께 하십니다. 늑대 같은 원수가 보는 앞에 있을 때, 양들은 꼴이 앞에 있어도 두려워 먹지 못하지만, 목자가 곁에 있으므로 늑대가 노려보고 있어도 목자가 둔 꼴, 그 잔칫상을 즐겁게 먹고 힘을 내 살게 됩니다.
달빛, “당신”
이렇게 여호와가 인생의 밤에 함께 하시는 방식은 인생의 낮에 함께 하시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인생의 밤에는 해가 보이지 않고 아예 해가 없는 것과 같고 하나님이 침묵하고 해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해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햇빛이 직접 비췄다면, 밤에는 저 반대편에서 달을 통해서 내게 달빛이 되어 여전히 비췹니다.
그런데 그 달빛은 햇빛보다 오히려 더 가깝고 오히려 직접 쳐다볼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밤에 여호와는 없는 것 같지만 계시고, 멀리 계신 것 같지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낮에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목자를 ‘그분’이라며 시인은 삼인칭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나 ‘원수 앞에 있을 때’ 그 인생의 밤에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라며 고백합니다.
이때 ‘주께서’의 단어는 ‘당신(thou)’이라는 뜻의 이인칭 명사입니다. 영어 성경은 “you are with me”로 번역합니다. 인생의 낮에 삼인칭으로 경험했던 여호와가 인생의 밤에는 오히려 이인칭으로 경험된 것입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달을 통해서 해를 더 가까이 만나는 것입니다. 더 은은히 친밀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빛처럼 함께 하신 여호와를 알면 우리는 인생의 밤에 이런 노래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메리 스티븐슨의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입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 주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꾸었네. /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 한 쌍은 나의 것 또 한 쌍은 주님의 것 /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아보았을 때 / 자주 내 인생길에는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 그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 그러나 보세요. /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 주님께서 대답하셨네. “나의 가장 소중한 아들아, 딸아! /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다. /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노라. /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모래 위의 발자국>, 메리 스티븐슨)
인생의 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때, 그때도 여호와는 목자로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난의 자리에 고난을 함께 받으며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인생의 끝
우리가 푸른 초장도 지나고 깊은 골짜기도 지나고, 인생의 낮과 밤을 지나다가 마침내 인생의 끝에 이릅니다. 낮과 밤,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의 이 박자 리듬을 따라 살다가 그 박자가 끝나는 인생의 마지막에 이릅니다.
한자어 ‘죽을 사(死)’(‘ 死 = 一 + 夕 + 匕’) 는 ‘한 일(一)’자, ‘저녁 석(夕)’ 자, ‘비수 비(匕)’ 자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이 ‘어느 날 저녁, 비수처럼 온다’라는 뜻입니다.
저녁 날아드는 비수처럼 불쑥 끝이 다가오면, 지금까지 땅 위의 길을 따라 걷다가 그 길이 뚝 끊어지는 것을 봅니다. 땅의 길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인생의 밤에 많은 이들은 모든 것을 다 놓고 모든 것을 다 잊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이 허망하고 덧없다는 허무의 소리를 신음처럼 말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끝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그런 허무의 소리를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발하고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 마지막 부르는 노래여야 할까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일 때 우리는 무엇을 연주할 수 있을까요?
별빛처럼
인생의 끝에 서서 그 너머가 보이지 않을 때, 까만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을 때, 목자되신 여호와는 그 벽 속에 숨겨진 창문을 여십니다. 그리고 저 멀리 별빛을 보게 하십니다.
그 끝 너머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게 하십니다. 인생의 끝인 END가 AND로 이어짐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게 합니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인생의 낮과 밤에 햇빛처럼 달빛처럼 함께 하신 여호와는 인생의 끝에서 별빛처럼 함께 하사 아버지의 집까지 인도하십니다.
그 여호와의 집은 이 세상의 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뱃속의 열 달의 시간과 태어난 이후의 7~80년의 세월을 비교할 수 없듯이, 이 땅의 집에서 7~80년과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은 비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는 우리가 가야 할 저 찬란한 별과 같은 여호와의 집을 별빛을 통해 보게 하시고, 마침내 그 별로, 그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낮과 밤, 기쁨과 슬픔, 웃음과 울음이 반복되는 하루가 모인 일생을 마치고 그 일생이 영생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지금 낮을 보내고 있습니까? 어떤 악보를 어떻게 연주합니까? 인생의 낮에 여러분에게서 나는 소리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인생의 낮이라면 모든 것이 햇빛 같은 선물이었다고 감사할 수 있을 때 더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감사를 말로만이 아닌 삶과 물질의 헌신으로 햇빛과 같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연주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감사가 감사를 낳고 은혜에 대한 감사로 인해 인생의 낮 순간순간이 더 소중하고 풍성해질 것입니다.
인생의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어려운 시련, 어려운 사람, 고통의 질병이 있습니까? 이런 인생의 밤에 어떤 소리를 내십니까? 운명을 탓하거나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이것 하나를 잊지 마십시오. 인생의 밤에 주님이 달빛처럼 계신다는 것을. 햇빛처럼 보이지 않아도 달빛처럼 오히려 은밀히 더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인생의 빔에도 여전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붙잡고 믿음의 노래를 부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망과 같은 상황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절망과 우울이란 감정의 골짜기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원수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양식을 먹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임재란 기름으로 내 삶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끝에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그럴 때 저 아름다운 별과 같은 천국을 더 소망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끝이 끝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임을 더 많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에 대한 실망과 후회가 아닌 여호와의 집에 대한 소망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마지막을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 중의 복음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양과 같은 나, 죄인된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나의 주님, 나의 아버지, 나의 목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면 사실 다른 것이 없어도 다 있는 것이고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아니라면 다 있어도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로서 낮에는 햇빛처럼, 밤에는 달빛처럼, 끝에는 별빛처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 것이 최고의 은총입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는 은총이 있으면 우리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이 하늘나라란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나를 사랑하사 지금도 나의 목자이시다, 이 복음을 더욱 붙잡고 삽니다. 그러면 세상은 분노에 찬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음악을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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