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믿는 내용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서로 각각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스토리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와 구원이란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는데 ,성부가 성자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은 성자의 이루신 구원을 적용하여 성도들을 세우시고, 또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받은 구원, 또 전해야 할 구원이 죄사함이고 몸의 부활과 영생입니다.
구원의 내용, 첫째는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은 죄들을 용서받아 죄의 짐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죄를 짓게 하는 세상과 죄성이란 죄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애굽으로부터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듯, freedom from에서 freedom to로 나아가야 하듯,
죄에서 벗어남은 의로 들어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남과 의로 들어감은 구원의 양면입니다.
하나는 구원에 대한 부정 표현이고, 하나는 긍정 표현입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 사함, 즉 죄에서 벗어남인데, 이 속에는 의로 들어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사함의 구원을 알려면 의로 들어감이란 구원의 또 한 면을 함께 봐야 합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벗어남으로 그치지 않고, 그다음 의로 들어감인데,
이때 죄와 의란 단어를 법적 의미로만 생각하기에 구원의 의미를 충분히 모릅니다.
법적 의미로 생각한다면 죄는 범죄요 의는 무죄입니다. 구원은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법정의 그림에서 무죄가 의인데, 이것은 죄의 결과만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들을 처리했지만, 더 깊은 죄인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원인과 죄의 힘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조폭으로 지은 죄들은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조폭 집단에 남아 있다면 온전한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죄와 의를 알려면 법적 의미만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 의미로도 봐야 하는데, 성경이 그렇게 보게 합니다.
법적 의미로 보면 죄는 드러난 범죄이지만 관계적 의미로 보면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그릇된 관계입니다.
사람은 모두 관계 속에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내와의,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아버지로서 자녀와의, 시민으로서 다른 시민들과의, 인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중 사람과의 관계가 폭력적이거나 신실하지 못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자리에 앉는다면, 그 관계가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관계가 죄를 짓게 하는 어둔 힘이자 죄의 뿌리인 더 깊은 죄입니다.
만약 그릇된 관계에 있다면 아무리 그 안에서 열심히 일해도, 마치 일제와 협력하는 관계 아래 있다면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그 자체가 죄인 것과 같습니다. 마땅한 관계가 아닌 잘못된 관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죄들을 만드는 죄입니다.
의 도, 법적 의미로 보면 죄가 없는 상태, 혹은 드러난 선행이지만 관계적 의미로 보면 의는 바른 관계입니다. 관계가 진실하고 신실하면 의로움 안에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이 ,요셉이 의인이라고 할 때, 요셉이 무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내 마리아와의 관계에서 정혼한 남편으로서 신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관계 안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이 의롭다고 할 때 그 의미는 흠이 전혀 없다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역의 관계에서 믿고 의지하는 바른 관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죄에서 의로 옮기는 것인데 그 의미는 범죄에서 무죄로의 옮기는 것, 즉 죄들을 사함만이 아니라, 그릇된 관계에서 바른 관계로 옮기는 것, 즉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법적 관점만으로 말하지 않고, 다양한 관계를 예로 들어 구원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해 줍니다.
구원의 여러 그림
구원의 그림 중의 하나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화해의 그림입니다. 사회에서 여러 일로 서로 친구가 원수가 되고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SK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부부의 세기의 이혼이 뉴스가 되고 있지만, 사랑으로 만나던 관계에서 법정에서 만나는 관계로 바뀌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동업하는 동업자 관계가 적대적 관계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재판하여 응당한 죗값을 치르게 되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심판으로 끝난 것 같지만 ,서로 관계는 회복 불능으로 끝이 나고 마는데...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상대의 죄로 생긴 손해를 감수할 뿐 아니라, 먼저 손을 내밀어 받아줌으로 화목한 관계가 이루어지게 했다면 이것은 참 구원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성자를 통해 보여주심 속에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 인간이 지은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적대적 관계를 화목한 관계로 만드신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로마서 5:10)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6)
성경은 사회 속에서의 이런 그림을 통해 성자가 이루신 구원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그림은 ‘나라의 그림’인데....
왕이 신하들에게 왕의 권한을 주고 여러 지역을 다스리게 했는데, 왕의 권한을 받아 한 지역을 통치하던 신하가 자신이 왕이라고 선언하고 반역하자. 왕에 대한 반역이 죄이기에, 이때 왕은 반역한 신하를 처벌하고 그 지역을 다른 신하에게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하에게 심판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신하의 죄를 용서하고, 그 신하에게 다시 지방을 맡아 통치하게 한다면
반역한 신하에게 죄사함과 회복된 관계란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유사한 그림이 주인과 종의 그림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맡기자, 종은 주인의 것을 맡아 , 주인의 것을 자기 맘대로 하다가 ,오너의 재산을 빼돌려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칩니다.
이때 주인은 종을 법적으로 처벌하고 다른 종에게 그 직을 맡길 수 있지만
주인이 종으로 인한 손해를 친히 감수하고 종을 다시 주인의 권한을 가진 청지기로 일하게 하여
주인과 종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복원합니다. 그러면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이런 구원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것은, 이는 단지 물질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나라에 왕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를 맡은 신하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이 왕이며 주인이라고 선언하고, 왕과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그릇된 관계 안에 거하자 스스로 왕과 주라고 선언한 인간은 점점 사탄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이런 반역한 인간을 심판할 수 있지만,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흑암의 통치에서 건져주시고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부왕으로 일하게 하시므로,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구원이 일이 성자의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3~14) 이런 나라의 그림을 통해서 성자가 주신 구원을 설명합니다.
또 하나의 그림은 가정의 그림으로....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데, 이것은 독립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고대 사회의 경우, 생전에 유산을 미리 받아 아버지 집을 떠난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는 의미입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맘대로 살다가 재산도 떨어지고 친구도 떠나고 끝내는 돼지를 치는 종으로 떨어지자.... 그 아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제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품꾼으로 일하자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 아들을 종으로 받기는커녕 아들을 향하여 뛰어가 그를 품에 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의 손실과 명예의 추락이란 아들의 죄를 자신이 대신 지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면서 탕자를 품꾼이 아닌 아들의 신분으로 복원합니다. 즉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이런 일이 성자를 통해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바른 관계인 의로의 회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그림 언어를 통해 성자가 주신 구원이 무엇인지 봅니다.
그것은 죄책을 씻음 받는 것, 잘못된 관계에서 벗어나 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죄에서 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들이 씻김을 받고 바른 관계로 옮겨가는 일이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열성, 우리의 회개,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대속의 희생을 치르게 하신 성부 하나님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역하고 배반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에 대해 의롭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끝까지 신실하셔서 참된 친구, 자비한 왕, 좋은 주인, 사랑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신실함이 아닌 그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는데,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로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이 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성자를 보내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심으로 죄에서 의로 옮겨지는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믿음
우리는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서 주신 구원을 봤는데, 그것은 죄사함으로 긍정 표현으로 하면 의롭게 됨입니다. 그 내용은 죄책의 씻음과 함께 바른 관계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구원이 이루어졌다면, 그 구원은 성령님은 성자가 베푸신 죄사함과 의로움의 구원을 믿게 하심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자가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시고 성령은 그것을 믿어 그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죄에서 구원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8)
마치 큰 비용과 어려운 실험을 통해 좋은 약이 계발되었는데
마침,중한 병에 걸린 환자가그 약을 소개받음으로 치료란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치료가 가능해졌으니, 그는 치료란 구원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자가 이루신 십자가 구원을 받아들임으로 그 구원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구원을 과거형으로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환자가 그 약을 만남으로 치료란 구원이 시작되었다면 꾸준히 그 약을 먹어야 점점 병에서 실제 벗어나듯이, 우리가 믿음으로 성자가 이룬 구원을 받아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믿음이란 결단을 통해서 시작되는데 그 이후 회복된 바른 관계 안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믿음이요, 들어간 구원 안에 머무는 것도 믿음인데, 두 믿음의 성격이 서로 약간 다릅니다.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들어간 이후 그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 거해야 하는데, 바른 관계에 거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으로 사는 잘못된 관계란 죄를 떠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올바른 관계란 의로움에 계속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점점 죄의 힘에서 벗어나게 되고, 성품과 언어와 태도와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처럼 바른 관계란 의로움 안에 거하고 머물 때 성자가 이루신 구원이 현재형으로 경험됩니다.
병을 치료하는 약을, 믿고 먹기로 작정한 환자가, 계속 먹다 보면 점점 건강해지듯,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바른 관계 안에 머물고 살아감으로 의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어, 성자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이 성령을 통해 현재형으로 경험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그 구원이 완성되는 지점에 이르는데 그 미래형의 구원이 몸의 부활이요 영생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의심
사도신경의 죄사함의 내용중,구원의 확신과 의심에 관한 것을 살펴보려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분들 중에, 과거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도 있고, 교회 오래 다녔고 모태 신앙이고 직분도 있으니,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필요한데, 그러나 그 확신이 참된 확신이 아닌 자기 확신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고 할 때, 우리는 영접한 이후에 관해 물어야 합니다. 지금 구원의 열매가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구원을 과거형으로 받았다고 한다면, 그 구원이 현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행실과 태도와 언어와 삶에서 의의 열매란 잘 보이지 않는다면 확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 해야 합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의심하는 분도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데 여전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으니,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럴 때에는 구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보면 실망스럽고 때로 뒤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에 의지하여 구원을 확신해야 합니다.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9)
성경은 어떤 이에게는 구원받았는지 살펴보라고 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구원받았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의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어떤 환자에게는 밥을 많이 먹으라고 어떤 환자에게는 밥을 적게 먹으라고 하는 것은 환자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나는 모태신앙이고 직분을 가졌으니,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진짜 확신인지 점검해야 하고, 자기의 부족을 보고 구원을 의심한다면 구원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의미
둘째 생각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먼저 구주로 믿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분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죄에서 건져주신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데,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또 매일 짓는 죄들을 회개함으로 예수님을 죄에서 건져주시는 구주로 믿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성자가 주신 구원은 지은 죄들에서 건져주는 구원만이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힘 즉 잘못된 관계에서 건져주시는 구원입니다. 자기를 주인으로 삼는 그릇된 관계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바른 관계 안으로, 즉 하나님의 왕되심, 주되심, 아버지되심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런 관계 안에 거한다는 말은 이제부터 자기가 아닌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매일 예수님을 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의로운 관계 안에 계속 거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며, 죄를 지었을 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매일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삽니다.
이전까지 자신을 세상과 소유와 물질을 믿고 살아가는 그릇된 관계에서 떠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바른 관계란 의로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자가 이미 이루신 구원을 , 즉 과거에 주신 구원을 현재형으로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두 표현을 씁니다.
하나는 “구주 예수”이고 또 하나는 “주 예수”입니다.
성경에 구주, 구세주를 의미하는 ‘소테르’(soter)라는 단어는 총 24회 나오지만,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kyrios)’란 단어는 747회나 사용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매일 살아가는 믿음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구주로 믿는 것은 한 번의 결단이라면 ,주님으로 믿는 것은 평생이고 매일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것은 죄를 짓고 난 이후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사는 것은 죄를 짓기 전에 예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매일 기도해야 한다고 한 제목이 “나라가 임하소서”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 이성과 감정과 언어와 태도에 주가 되게 하소서입니다. 하나님이 주가 되어야 할 영역이 주기도문에서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경제영역, 죄 용서를 구하는 인간관계의 영역, 시험에서 건짐을 구하는 세상의 각 영역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어야 온전한 구원이 온다고 가르칩니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사도행전 19:5),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골로새서 2:6~7)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을 입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미래 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런 미래의 영광의 구원이 있겠지만, 찬송가는 성자가 주는 그 구원은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화되는 현재의 구원을 말하는데, 어떻게 슬픔 많은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가 되는 것입니까?
내가 중한 죄짐을 벗었기 때문이고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나를 죄에서 건지셨기 때문이고. 이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 예수와 매일 동행해야 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주님으로, 아버지로 모시는 바른 관계 안에, 의로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됩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오지 않았지만,
아직 이곳은 슬픔의 땅이고 아직 이곳은 눈물의 장소이지만,
이 슬픔의 땅에서 하나님이 위로하시고 동행하시고 말씀하시고 힘주심을 경험합니다. 구원을 현재형으로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시절, 소록도에서 오신 분들이 로마서 8장을 성경을 암송하고 난 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잊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파도가 넘실대는 인생 바다를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 가지만
우리들은 고난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주님과 같이 발로 밟고 건넙니다.”
그들은 주 예수와 동행함으로 그 고난 속에서 구원을 현재형으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냐가 아니고, 좋은 때나 힘든 때가 아니고,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핵심이고,
시간이나 장소의 문제보다 누가 주인이냐 하는 것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님과 동행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되고, 슬픔의 이곳이 천국으로 화하게 됩니다. 지금 슬픔 많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분들,우리 모두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것만 보지 말고, 매일 구주 예수를 보고, 죄를 회개하고 죄의 짐에서 건짐을 받으십시다.
매일 주 예수와 동행하며 주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사십시오.
힘든 마음에, 슬픔의 자리에, 고통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 이곳이 하늘나라로 바뀌는 현재의 구원을 맛보며 삽시다.
그렇게 현재 이곳에서 구원을 맛보며 나누며 살다가 미래의 완전한 구원을 향하여 갑시다.
“하늘 나라가 날로 날로 가깝도다”라고 찬송하며 나아갑시다.
성자가 주시는 죄사함과 의롭게 됨의 구원을 (현재 구원을 )맛보며 살아가고
미래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2024,6월2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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