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골로새서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죄사함을 얻었도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자는 그리스도로서 구원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시고 , 성령을 보내시고 ,
오늘 성령강림주일인데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초로 성도들 즉 교회를 세우시고
또 그 성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의 드라마를 계속 써가게 하십니다 .
성령은 교회가 구원의 결과이면서 구원의 도구가 되어, 구원이란 복을 받고 전달하는 통로가 되도록 ,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받은 성도이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도들이 되게 합니다 .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교회가 모여 성만찬을 대할 때마다 두 가지를 같이 기억하라고 강조합니다.
“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를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3~27).
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행하는데 그럴 때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위한 ’ 대속의 죽음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죽음은 ‘세상의 그들 ’도 역시 위함이니 성찬이 의미하는 십자가의 죽음 속에 담긴 구원과 사랑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 즉 성찬의 거룩한 식탁으로 부름을 받은 교회는 그것을 들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성찬을 대할 때 주의 떡이나 잔에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지 말라고, 그것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 그 죄가 무엇일까요 ? 전통적으로 우리는 성찬을 대할 때의 우리의 경건치 못한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 문맥상 그 죄는 성자의 살이 찢김과 피 흘리심의 목적을 분별하지 못한 채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 즉 주의 죽으심을 먹고 마시면서 그것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 성찬 속에 하늘 사랑을 먹고 마심으로 은혜의 힘을 얻은 우리들이 , 성찬 속의 하늘 사랑을 그들도 먹고 마시게 하지 않는 것이 성찬을 합당하게 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구원을 온 세상에 전파하십니다.
구원을 먼저 받은 성도들이 생겨나게 하시고 , 그들을 통해서 구원을 온 세계에 전하게 하십니다 .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이루어 성도들에게 주신 구원이 무엇일까요?
또 우리들을 성도가 되게 하시고 또 성도 된 우리들이 세상에 전해야 하는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
그 구원의 내용이 성경 속에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오는데 사도신경은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
죄 용서함 , 몸의 부활 , 영생 .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죄 사함, 부활 , 영생이란 구원 안으로 계속 들어가
그 구원이 얼마나 높고 깊고 넓은 것인지 더 분명히 알려고 힘쓰고 경험하고 소망해야 하고 ,
또한 그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더 멀리 더 넓게 나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
바로 그 구원의 내용 중의 하나 죄사함을 보려고 합니다 .
죄 아래 있는 인간
죄 용서함은 어떤 것입니까? 죄 용서함을 알려면 , 먼저 죄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죄가 무엇입니까 ? 구원은 죄 용서함이라고 할 때 , 먼저 인간이 처한 상황 , 구원이 필요한 상황을 ‘죄 ’란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법을 어긴 범법 행위 , 그릇된 행동 등으로 생각합니다 .
맞습니다 . 죄는 법을 어긴 행동들 , 겉으로 드러난 결과들입니다 .
하지만 죄를 제대로 알려면 드러난 죄의 결과들보다
죄를 짓게 만드는 죄의 원인인 죄의 뿌리도 함께 봐야 합니다 .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다, 우리가 죄 아래 있다고 할 때 , 그 의미는 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첫째 , 죄를 지은 죄의 결과들 , 죄의 열매들 , 이것은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입니다 .
둘째 , 죄를 짓게 하는 원인 , 죄의 뿌리 , 이것은 죄의 힘입니다 . 죄의 짐과 죄의 힘 아래 있습니다 .
먼저 우리는 모두 죄의 결과들을 짐으로 지고 있습니다. 죄를 법을 어긴 행동들로 보자면 우리가 어긴 법들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소위 여러 민법 상법 형법 등의 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 그런 것들만 두고 보면 교통법규 정도는 몰라도 나는 별다른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 그러나 양심의 법 , 도덕법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 윤동주 시인이 쓴 시 ,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시인 윤동주는 일제 치하에서 지식인으로 살면서 지식인의 양심을 따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 하지만 그 시대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
그래서 겉으로 실정법은 어기지 않았지만, 지식인의 양심에 비춰보면 부끄러운 것이 많아서 , 양심이란 잎새 안에 부는 죄책감의 바람으로 괴로워했다고 토로했습니다 . 우리도 양심의 법에 비춰보면 누구든지 내 양심의 잎새 안에 이는 바람 , 내 양심의 잎새를 심히 흔드는 바람에 괴롭다고 하지 않을까요 ?
나아가 하나님의 법에 비춰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의 빛 앞에 서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라고 말했고 , 성자 바울도 “나는 죄인의 괴수 ’라고 말했습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당히 괜찮은 존재인 것처럼 여기며 살지만 , 그것은 양심의 법 , 높은 도덕법 , 하나님의 법 앞에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희미한 빛 아래 있으면 보이지 않지만 , 밝은 빛 앞에 서면 우리의 마음의 얼굴에 묻은 수많은 얼룩이 보이면서 ‘나는 죄인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죄인들로서 자기가 지은 죄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 그렇게 하려면 교통법규 어길 때 범칙금 내서 해결하듯 해야 하지만 , 우리가 지은 여러 죄를 그렇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죄들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음으로 미결상태로 두는 것들이 많고, 어떤 일은 법적으로는 분쟁이 끝나고 해결되었지만 , 감정적으로는 그 원한은 평생 남아 있기도 합니다 . 즉 우리가 지은 수많은 죄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계속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지고 있는 죄의 짐들이 많아지고 그 무게가 더 무거워집니다 . 이런 죄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인간 곤경의 현주소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죄의 결과들을 짐으로 지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 그 죄의 힘 아래 있기에 언제든 죄를 지을 가능성을 안고 실제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죄의 원인, 죄를 짓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 밖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 우리 밖에 있는 죄의 힘을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것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 그런데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 서로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
식물과 동물, 동물과 사람 , 사람과 사람 , 나라와 나라 ,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삽니다 . 촘촘히 연결되된 관계의 그물망이 우리가 사는 터전이고 이것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그 관계가 비뚤어지고 깨어지고 뒤틀리게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 그 관계가 서로 살고 살리는 관계가 아닌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이 세상이 삶의 필수적인 관계들이 일방적이고 공의롭지 못한 채 뒤틀려 있게 되니 죄와 고통이 생기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합니다 .
‘주코시스 '(zoochosis) 라는 말이 있습니다 . ‘주 ’, 동물원 ‘코시스 ’ 정신병 ,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
동물원 안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 한 곳에서 계속 왔다 갔다 , 하고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보입니다 . 즉 동물원 안의 동물들은 거의 다 정신병적 비정상 행동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 그 이유는 아무리 동물원을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줘도 그곳은 야생 동물들이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동물원은 동물들에게 기형의 서식지이기에 그 안의 사자와 곰들이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
인간이 살고 만드는 세상도 삶을 이루는 필수적 관계들이 기울고 깨어지고 뒤틀려 있기에, 세상은 일종의 기형 거처와 같아짐으로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죄란 병을 앓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 괴롭고 갈등하고 미워하고 스트레스받고 육체의 질병도 얻게 됩니다 . 이처럼 우리는 우리 밖에 죄를 짓게 만드는 외적 힘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인간이 지은 죄들은 계속 누적되어 쌓이고 깨어진 관계가 노멀처럼 되어 버리니 우리는 우리를 죄로 빠뜨리는 어둔 힘 아래 있는 것입니다 .
죄의 힘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죄성이라고 부릅니다 . 그 죄성이란 원래 인간이 악하다는 성악설이 아닙니다 . 안에 있는 죄의 힘은 무엇일까요 ? 우리 시대에 수많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 ‘내가 내 배의 선장이다 .’ ‘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 길이다 .’ 이런 말들은 멋지게 보이고 , 또 보편적 진리처럼 들리는데 사실 이런 말들은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들었던 소리의 메아리이고 , 시대의 문화의 옷을 입은 표현들입니다 .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너는 하나님을 닮은 존귀한 존재다 , 그러나 너는 하나님은 아니다 ”, “너는 아래로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의 통치 대행자다 , 그러나 너는 위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다 ”는 의미입니다 . 즉 인간을 , 하나님을 닮은 매우 존귀하게 지으셨는데 , 그렇다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 네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인간이 그 순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영어 sin이란 단어에서 i가 중앙에 있듯이 , 삶의 중앙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나란 중앙에 둡니다 .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 내가 기준이다 , 라고 하면서 , 자기가 자기 주인의 자리에 앉은 것을 삶의 기본값 , 디폴트로 삼고 삽니다 .
이런 잘못된 자리, 잘못된 순서 , 이것이 죄성입니다 . 이것을 바울 사도는 “내 속에 거하는 죄 ”(로마서 7:17) , 혹은 “육신 ”이라고 불렀습니다 . 이것이 우리 안의 죄의 힘이 되어 우리를 죄로 이끌어갑니다 .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절규하듯 말했습니다 . “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도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4~15)
이렇게 인간이 주인이 되어 살면 결국 주인이 될까요? 아니면 종이 될까요 ? 자기가 주인 노릇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아의 욕망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고 , 물질을 숭배하는 종이 됩니다 . 마침내 죄를 매개로 작용하는 악한 사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 ”(요 8:34)
이처럼 인간이 처한 상황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그것은 ‘죄 ’입니다 .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 처리하지 못한 죄들을 짐으로 지고 있고 ,
여전히 죄를 짓게 하는 죄의 힘 아래 살아가면서 , 죄의 짐과 죄의 힘 아래 있습니다 .
죄 용서를 주시는 성자
우리가 죄의 짐과 죄의 힘 아래 있고 그래서 죄의 종이 되어 산다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상황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먼저 이미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합니까?
종교들은 행한 죄만큼의 선행을 통해 죄책을 해결하라 , 죄짐을 벗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세속 사회는 죄는 드러나지 않으면 되고 , 드러나지 않은 죄에 대한 심판은 없다고 말합니다 .
또 죄는 환경과 , 심리적 요인의 결과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고 죄를 회개하려고도 말고
너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 받으라고 권합니다 .
이것이 죄의 짐을 벗는 길일까요? 세상 법도 드러나면 심판을 받는다면
양심의 법 , 도덕법 ,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도 사람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죄를 없는 것처럼 여길 수 있을까요 ?
죄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데 누가 받습니까? 당연히 죄를 지은 자가 받아야 합니다 .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공의롭지만 , 죄인을 살리는 구원은 아닙니다 .
죄를 죗값대로 처리하는 공의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죄인을 살리는 사랑의 대안이 있어야 합니다 .
그 대안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는 누군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대신 질 질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질 수 없으니 인간이어야 합니다 .
수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자격을 가진 자여야 하고 또 죄인이 아닌 의인이어야 합니다 .
우리의 죄를 대신 질 자격을 갖추면서 그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이 세상에 그런 분이 누가 있습니까 ? 아무도 없고 오직 한 분만이 있습니다 .
인간이되 인간들을 대표할 자격을 갖추시고 의인이신 분 , 그리고 죄인을 대신할 마음도 가지신 분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 성자는 우리의 죄짐을 해결하는 길이 되시고 죄 용서함을 얻어 의롭게 하십니다 .
죄의 짐을 성자가 대신 지심으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죄의 힘에 묶여 있다면 다시 죄를 짓게 되니 , 우리는 죄의 짐만이 아니라 죄의 힘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
우리 밖의 죄의 힘인 세상은 하나님과 사람과 세계와의 그릇된 관계가 고착된 곳이기에 그 관계 안에 있음이 죄를 짓게 만들기에, 바른 관계를 만들어 그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뒤틀린 관계를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 , 사람과의 수평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상징입니다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를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 바울 사도는 이것을 두고 “화목하게 되었다 ’라고 설명합니다 . “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9~10)
성자 예수님은 ,죄를 짓게 만드는 그릇된 관계를, 의를 행할 수 있는 바른 관계로 회복하셨고 그 바른 관계 안에 머물게 하심으로 죄의 힘을 이기게 합니다. 폭력적 가정에서 자라던 아이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게 함으로 달라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우리 안의 죄의 힘인 죄성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에는 마음의 왕좌가 있는데, 그 자리는 비어있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가 앉아 그가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 그 주인의 자리에 내가 앉고 탐욕 , 물질 , 우상 등이 앉으면 , 그것들이 나를 죄로 향하게 하는 내 안의 어둔 힘이 됩니다 .
내 안의 죄의 힘을 이기는 길은 ,그릇된 주인이 아닌 참 주인이 마음의 왕좌에 앉는 길입니다.
참 주님은 부활 승천하사 온 세계의 주님이 되신 성자 예수님입니다 .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게 하는 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가짜 주인을 내려오게 하는 길입니다 .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짜 주인이 행세하는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되고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사랑의 아들의 , 사랑의 통치 아래로 들어갑니다 .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1:13~14)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주가 되실 때 우리 안의 죄의 힘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
이처럼 성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함으로 죄의 짐을 벗게 하고, 우리의 주님이 되심으로 가짜 주인이 행세하는 죄의 악한 힘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 죄 사함을 받게 합니다 .
회개와 성령
이렇게 성자께서 죄의 짐을 벗고 죄의 힘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자의 구원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됩니까 ? 오늘 성령강림주일인데 성령님은 우리가 회개함으로 죄 사함의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십니다 .
성령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는데, 그 회개는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함으로 시작합니다 . 양심의 빛, 말씀의 빛을 밝혀 그 빛 아래서 우리의 죄들을 보게 합니다 . , 성령의 빛 앞에서 죄들을 발견함으로, 애통하며 죄를 자복하게 하고, 때로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게 합니다 .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런 후회 애통이 곧 죄 사함을 주는 것은 아니고,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볼 때 죄 사함이 주어집니다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음을 알고 믿을 때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9)
우리의 죄를 보면 볼수록 나에 대해 절망하지만, 눈을 들어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를 볼 때 우리는 이런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찬송가 252장 )
또 성령님은 회개하게 하시는데 그 회개는 지은 죄들을 회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주인으로 삼은 것을 회개하게 하십니다 . 사실 죄의 결과가 아닌 죄의 원인인 자기중심 , 자기가 주인됨을 돌이키게 합니다 .
지은 죄들은 자복하면 되지만,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 앉은 죄는 돌이켜야 합니다 .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주인 노릇하던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
일제강점기를 예로 든다면, 참 회개는 개인적으로 성실하지 않았고 맡은 일을 부지런하게 하지 않았던 것을 뉘우침이 전부가 아니라 , 일제의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고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며 살아간 것에서 돌이키는 것 , 그릇된 주인을 모셨던 것에서 돌이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
성령님은 죄들을 자복하는 회개와 주인을 바꾸는 돌이킴의 회개도 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게 합니다 .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주님으로 믿으라고 하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라고 했습니다 .
이렇게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을 통해서 우리에게 죄의 짐을 벗게 하시고 죄의 힘에서 자유롭게 하심으로 죄의 열매를 맺던 우리들이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죄사함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 , 죄 사함을 봤는데, 두 가지를 적용하고자 합니다 .
첫째 죄사함의 은혜를 매일 받자는 것입니다 .
사실 이 시대는 죄에 대해 피상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그저 상처 , 갈등 , 등의 중립적 용어로 바꿈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나의 책임을 일부러 잊어버립니다 .
실제 죄가 작아서가 아니라, 죄를 보는 빛이 너무나 약해진 탓에 죄가 별로 없는 듯 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삽니다. 내가 지은 잘못에 대한 성찰이 약하고 죄에 대한 애통이 없고 대신 누구 탓에 그러면 탓합니다 .
이것은 죄의 짐을 바로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하수구가 고장 난 집에 온갖 오물이 쌓이게 되듯 , 십자가 속죄의 통로를 통해 죄가 씻겨나가지 않으면 , 우리 안은 죄가 만드는 미움 , 상처 , 고통이 더 누적되어 갑니다 .
처리되지 않은 죄들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기쁨이 사라지고 영적 통로가 막히고 사랑이 식고 심령이 답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복하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죄의 짐을 바르게 해결하여, 영적 동맥경화에 걸리지 않고 피가 잘 순환되듯 영적 흐름이 원활하여, 죄 용서함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
주되심
둘째 죄 사함의 회개는 죄들을 자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근본적인 회개는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
내 마음의 왕좌에 가짜 주인이 앉으면 죄를 이길 수가 없고, 매 순간 마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며 살아가야 죄의 힘을 이깁니다 . 그러므로 매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더 근본적인 회개 , 돌이킴이 있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 회개는 죄들의 자복이 아닌 주인을 바꾸는 회개입니다 . 그렇게 할 때 천국이 임한다는 겁니다 . 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합니다 . 여기서 구원자 예수님이 아닌 주 예수입니다 .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 주님으로 모셔야 온전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씻음의 회개만이 아닌 돌이킴의 회개,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을 모시는 회개가 있기를 바랍니다 . 교사주일인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죄 사함을 바로 가르치고 그들 속에 죄 용서함의 감동과 감격을 가슴에 담고 살게 합시다 . 그러면 달라질 것입니다 . 성령강림주일입니다 . 성령님은 우리의 영원한 교사로서 성자가 이루신 죄 용서함을 더 알게 하고 체험하게 합니다 . 우리 모두 죄 사함의 구원을 알고 누리고 또 전하기를 바랍니다 .
<2024년 5월19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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