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51~58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 받을 수없고 또한 썩는것은 썩지 아니하는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 되리라 이 썩을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진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도신경9>
독생자, 그리스도, 주님.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중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독생자, 그리스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독생자로 나셨고,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임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그리스도로 33년의 고난의 생을 이 땅에서 사셨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서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서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다스리시고 있고, 미래 그곳으로부터 즉 하늘에서 땅으로 오셔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이름의 뜻인 ‘여호와의 구원’을 독생자가 되심으로, 그리스도로 사심으로, 주님으로 다스리심으로 온전히 이루십니다. 주님으로 다스리심은 세 가지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오르시고’ 과거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현재,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시고’. 미래.
주님으로 다시 땅에 오시고, 이것은 미래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면 그 주님은 하늘에서 어떻게 다스리고 또 하늘에서 언제 어떻게 강림하심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시는 것일까요?
거기에 앉아 계신 주 예수
보좌 우편에서 주로 다스리심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33년을 이 땅에서 사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사 하늘 즉 하나님의 보좌에서 오르시는데, 이때부터 천상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대권, 세계 통치권을 위임하신 것이고, 주로 내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주님으로서 어떻게 다스릴까요? 하나님께서 받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보혜사 성령은 성부의 영이자 성자의 영으로서 성자 예수님이 지상에서 이루신 역사적 사역을 기초로 일하십니다.
성자는 성령을 통해 다스리고 마지막에 세상의 권세와 악을 멸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성부에게 돌려 드립니다. “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린도전서 15:24)
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기 어렵지만 창조에도 구원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나로 일하십니다.
교회
예수님은 천상에서 주님으로 다스리면서 하시는 일은 먼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역사적으로 이루신 속죄 사역을 믿게 하도록 하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3~14)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하고 힘들고 위대한 일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란 영적 건물, 참 성전을 짓습니다. 신앙을 고백한 시몬을 베드로 즉 돌로 삼아 영적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데, 그 믿는 자와 교회가 하늘의 주님이 땅을 다스리는 통로가 됩니다. 즉 그들이 다스림의 동역자가 됩니다. 마치 머리가 몸의 손과 발을 통해서 일하듯,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를 손과 발로 삼아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이어가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치유하는 일을 이어가게 합니다.
또 그 교회가 건강하게 서도록, 마귀와 세상의 공격에서 보호받도록 붙드십니다. “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요한계시록 2:1) 일곱 별은 교회 사역자, 금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교회의 사역자와 교회 사이에 거닐면서 흔들리지 않게 서도록 도움으로 다스립니다.
또 그 교회가 선교하게 합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보내어 죄 사함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주님으로 통치하십니다.
이러한 직접적 복음 전파를 통해 다스리지만, 또한 성도들이 삶의 여러 영역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함으로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하셨던 일을 이어 하게 하고,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주님의 다스림이 막히는 경우도 있지만 좋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주님의 다스림이 나타납니다.
하늘의 주님은 또한 역사의 큰 흐름이 종말의 목적을 향해 가게 함으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큰 그림에서 봐야 비로소 보입니다만, 요즘은 이전보다 더 온 세계가 분쟁과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강줄기는 예수님이 지향했던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그래도 자유, 인권, 여성과 약자들에 대한 배려로 나아가는데 이런 가치는 이슬람이나 힌두교의 가치나 아젠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통해서 가르치신 가치입니다.
예술도 고급 예술은 그 속에 선에 대한 그리움과 정의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고, 사상도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것은 기독교적 가치와 부합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세계는 잔혹함과 어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어둠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고 역사가 예수님의 포괄적 통치를 받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스림을 받는 자를 통해 다스림
이처럼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는데, 그 다스림 속에는 개인의 변화, 공동체의 변화인 교회의 세워짐, 세상의 변화인 선교가 있습니다. 이런 주님으로서의 다스림은 직접적인 경우도 있지만 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데, 주님의 통치가 내게 임하여, 내가 다스림에 순종하여, 주님의 다스림과 나라가 지금 이곳에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우리가 어떻게 왕입니까?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감으로 주님의 하늘 다스림이 땅에 임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순종하면 주님이 만드시는 평화, 회복, 용서, 사랑이 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지난 금요일 찬양기도회에서 하누리부 집사님들이 제일 앞에 앉아서 수어로 찬양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보면서 주님이 이 찬양을 받으신다는 마음이 들었고 들을 수 있는 나는 어떻게 했는가, 더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 집사님들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자, 그들을 통해 주의 감동의 다스림이 저에게 임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좋은 밭이 되면 그를 통해 주님의 통치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보이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로 다스리니, 우리는 그 다스림이 받아, 내 마음과 언어와 관계와 일터에 임하고, 그런 우리와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하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거기로부터 오실 주 예수
거기로부터
이렇게 예수님은 거기에서, 즉 하늘 보좌에서 주로써 땅을 다스리다가 거기로부터 땅으로 오십니다. 처음 땅에 오실 때 비천한 가정의 아기로 왔지만 둘째 땅에 오실 때는 능력과 큰 영광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0) 승천할 때 천사도 말했습니다. “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행전 1:11)
예수님께서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을 성경은 하늘에서 땅에 오는 ‘강림’이라고 말합니다. “ 그가 강림하실 때에”(고린도전서 15:23),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데살로니가전서 1:10)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데살로니가전서 3:13)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야고보서 5:7)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강림이 원어로 “파루시아”입니다. 황제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방문하는 행차를 두고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시는 것은 왕이 자신의 땅에 오는 것입니다. 황제가 올 때 영광의 모습으로 옵니다. 하늘의 주님도 땅에 임하실 때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그 영광의 모습을 구름을 타고 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태복음 26:64)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요한계시록 1:7)
황제가 영광스럽게 도시를 방문할 때 신하들을 데리고 오고, 그 행렬을 도시의 사람들이 나가서 영접하여 왕을 궁궐로 모십니다. 주님이 하늘로서 강림하실 때, 먼저 죽었던 구원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오시고, 땅에 있던 사람들은 구름으로 끌려 올라가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것을 ‘휴거’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러 나간 그들을 땅에서부터 저 하늘로 완전히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이 땅에서 항상 함께 있습니다. “ 주께서 …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6~17)
그리고 주님은 회복된 땅에서 왕노릇하시고, 성도들은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았던 것처럼 새롭게 된 땅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왕노릇을 합니다. “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6) “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우주적 희년
강림의 모습이 구름을 타고 임할 뿐 아니라 나팔을 불면서 임한다고 합니다.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데살로니가전서 4:16)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51~52)
나팔을 불며 강림한다는 의미는 성경을 통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행할 제도를 주십니다. 7년마다 안식년을 행하고 그 안식년을 7번 지닌 50년째에 49년간 생긴 여러 문제와 잘못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희년을 실시하게 합니다. 이렇게 희년을 시작할 때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이런 율법을 받은 출애굽 백성들이 드디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길목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그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정복합니까? 나팔을 불어 무너지게 합니다.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바알신의 지배 아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희년을 선포해야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강림할 때 나팔을 분다는 것은 긴 역사 속에서 뒤틀리고 잘못된 세상에 우주적 희년이 마침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하늘의 왕이 자기의 땅에 오시는 것이고, 또 그 왕이 온 세상과 우주에 희년, 기쁨의 해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받은 성도들을 모으리 [후렴]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 하겠네” (찬송가 180장) 찬송가 가사는 나팔 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른다고 되어 있지만, 나팔 소리로 우주적 희년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년 속에 내 이름을 부르는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여하는데 그 진치는 저 공중이 아닌 우주적 희년이 임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잔치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이렇게 주님은 거기로부터 구름을 타고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강림하십니다. 그러면 왕이 자기 땅에 오면 왕이 상을 줄 사람, 벌을 줄 사람을 판단하여 심판하듯 예수님이 주로 오시면 심판이 있습니다. “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사도신경)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주님과 함께 살아갈 자, 주님과 분리되어 있을 자를 구분합니다. 그 살아 있는 자는 역사를 벗어나 역사 밖 영혼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런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참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내 것으로 받아, 내가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죄란 영적 애굽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다스림이란 영적 가나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란 죄에서 벗어남과 주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감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입술로 주님이라고 고백함으로 죄 용서 안에 들어갈 뿐 아니라, 삶에서 주님의 다스림에 순종함으로 실제 변화된 마음과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믿음만이 아닌 행위로 증명된 참 믿음이 기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로마서 14: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요한계시록 20:12)
마태복음 25장에도 양과 염소,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심판의 기준은 믿음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병든 사람들을 살피는 등의 이웃 사랑의 열매로 입증된 참 믿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심판과 함께 사탄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로마서 16:20)
이렇게 주님의 강림으로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데 그 구원의 전체적 그림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1-5)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구원, 새 예루살렘이란 성도의 개인의 변화와 새 공동체를 이루는 구원, 온 세상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으로 회복되는 구원, 만물을 새롭게 하는 구원을 이루십니다.
깨어 있으라
우리는 예수님이 현재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고, 미래 거기에서부터 오셔서 심판과 구원을 이루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어디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재림을 통해서 아직 임하지 않았지만 임하게 될 완성될 하나님 나라, 그 둘 사이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하철을 타고 갈 때 , 어디쯤 왔는지 어떤 역에 내려야 하는지 알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듯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강림이 있지만 그때는 잘 모르기에 강림이 도둑처럼 임할 것이기에 깨어야 합니다.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42)
하지만 종종 깨어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깨어 있도록 종말의 징조들을 주십니다. 그 징조 중에 자칭 그리스도라는 이들의 등장이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의 모습으로, 공산주의나 기술주의와 같은 이념의 모습으로 나타나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며 거짓 희망을 전하는 가짜 그리스도들의 등장이 있습니다.
곳곳에 기근이 있습니다. 경제는 엄청나게 발전하는데 여전히 가난과 기근은 줄지 않고 더 초양극화가 되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심해집니다. 곳곳에서 지진이 더 자주 일어납니다. 선한 모습, 선한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그 반대도 더 자주 강도 높게 일어납니다.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디모데후서 3:2~4),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들이 재림의 징조를 보면서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을 알고 깨어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등불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처럼 도시의 야경은 더 밝히면서 영혼의 불이 끄고 영적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불야성인 현대 도시 속에서 살면서 주의 강림에 대해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준비하며 기다리라
둘째, 재림을 기다리되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겨두고 떠났습니다. 한 종은 주인이 와서 결산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자기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하지 않은 채 삽니다.
그러나 다른 종은 언제 올지 모르지만,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고 맡긴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하여 이익을 남깁니다. 드디어 주인이 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책망과 심판이 있고, 착하고 충성된 종에 대한 칭찬과 구원이 있습니다.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태복음 24:44~46)
우리는 모두 달란트를 받은 종입니다. 우리의 받은 모든 것은 다 주인이 자신의 것을 일정기간 동안 맡긴 것입니다. 그것이 직분, 직책, 재물, 건강, 직업, 시간 등입니다. 주인이 주신 이것을 내가 살아서 가지고 있을 동안, 그것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잘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할 때 하던 일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긴 일을 더 열심히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재림을 기다릴수록 현재의 내가 하는 일을 더 열심히 잘 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오늘 장로 권사 투표가 있고 수요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투표권도 하나의 맡긴 달란트인데, 잘 사용해야 합니다. 누가 성경적 가치에 좀 더 부합하느냐를 생각하고 투표함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행동하면, 달란트의 이익을 남기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면서, 주님의 미래의 오심에 대해 깨어 있으면서,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서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인내하라
셋째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의 재림에 대해 깨어 있으면서 현재 우리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며 살지만, 이런 태도를 지속적으로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뭔가 달라져야 할 것 같지만, 현실 세상은 여전히 불의와 고통이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정말 다스리시는가? 주님의 강림이 어디에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어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 영적 겨울과 같은 현실이 너무 오래되면 세상은 원래 이런 겨울과 같은 곳이야, 이렇게 끝날거야, 이렇게 낙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겨울의 계절에 서 있는 나뭇가지 끝에서 봄의 새 순을 보면서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직 바뀌지 않고, 어떤 점에서 더 악화되고 있다고 보일 수 있지만, 그럴수록 영적인 봄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직의 겨울 현실을 만날 때, 우리는 이미의 봄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여전히 악하고, 교회는 아직 불완전하고, 나 자신은 아직 제대로 변치 않았지만, 그래서 비관적으로 되거나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도 선한 사람이 있고, 그래도, 교회 안에 회심과 헌신과 순종과 변화하는 성도가 있고, 그래도 내 안에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의 자리에 두 손 들고 나오는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초림과 재림의 그 사이의 세월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전히 아직의 겨울 현실 속에서 살지만, 그럴수록 이미의 봄을 붙잡고 더욱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섣부른 비관주의에 빠지지 말고, 설익은 낙관주의에 빠지지도 말고, 지금도 예수님이 다스리고 있고 그 주님이 오신다는 성경적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푸른 희망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하면서, 주님이 오실 미래에 대해 깨어 있으면서 지금 현재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 거기, 하늘, 하나님의 보좌에서 주님으로 다스리고 계시고, 그 주님은 땅에 강림하실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 깨어 있게 하소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함으로 재림을 마지막 결산을 준비하게 하소서. 세상의 모습, 나의 모습, 너의 모습이 아직 실망스럽지만, 이미 임한 변화, 이미 임한 작은 새로움을 보고, 겨울 속에서 봄의 소망을 붙잡게 하소서. 그래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게 하소서.
2024년 4월7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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