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성령을 믿습니다 ..

왕언니 2024. 5. 17. 22:51

 요한복음 14장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6:7~15    그러나 내가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창조의 두 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면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되 삼위일체로서 하십니다. 창조하실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구원하실 때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십니다.

 

창조하실 때도  공허와 혼돈 속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시고 공허와 혼돈이란 수면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심으로 창조하십니다. 즉 창조에 말씀이신 성자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 때 오른손 왼손을 함께 사용하듯, 하나님은 말씀과 영, 성자와 성령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특히 인간을 만드실 때는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시면서 삼위가 함께 의논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과 영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브리서 1:3). 세상은 세계가 저절로 우연히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하지만 세계가 말씀과 영으로 붙드심으로 오늘도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두 손

 

이처럼 창조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구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이루십니다. 우리가 아파서 거의 죽게 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서 위로해 주고 함께 울어줌으로 그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이런 정서적 도움도 필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처방하여 먹게 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심판받게 되었다면... ..감옥에 찾아가서 그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것이 그에게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런 심리적 정서적 도움만이 아닌 법적 문제를 해결해서 그가 석방되게 해주는 실제적인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떻게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까요?

 

 

 

두 보혜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한복음 14:16)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보혜사가 계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있다는 말인데, 이미 있는 그 다른 보혜사가 누구일까요?

 

첫째 보혜사는 성자 예수님 자신이고,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입니다. ‘보혜사’를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합니다. ‘파라’는 ‘곁, 옆’이란 뜻이고 ‘크레이토스’는 ‘부르다’라는 뜻의 ‘클레오’에서 나왔습니다. 곁에서 도움이 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 곁에서 도와주는 존재란 뜻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위로자, 대언자, 중보자 등으로 사용됩니다. 성자와 성령이 각각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곁에서 돕는 보혜사란 말입니다. 두 보혜사는 함께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는데, 각각 어떻게 구원이 되도록 돕는 것일까요?

 

우리는 죄인이고 사망의 권세 아래 있어서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여러 도움이 필요한데 마음이 힘들 때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위로하는 도움, 곁에서 말을 들어 주고 상담하는 정서적 감정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그런 도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므로 이런 우리를 돕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주는 법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관적 정서적 도움과 객관적 법적 도움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자

성령의 힘으로

 

구원을 위한 객관적 도움, 법적 도움을 위해, 성부 하나님이 구원을 예정하셨고 그 구원을 위해 성자를 보내시자, 성자는 역사 속에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는데, 이때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태어날 때에도 성령으로 잉태되었고,(누가복음 1:35).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3:22).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도 성령을 힘입습니다(마가복음 4:1; 누가복음 4:1).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할 때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십니다(마태복음 12:28).

 

마침내 성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성부에게 순종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성자는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고, 우리의 죄가 그의 죽음 안에서 처리됩니다. 그래서 그 결과 우리의 죄를 처리하고 마귀의 참소를 이기는 법적 조건을 만드십니다. 죄의 질병으로 아픈 환자인 우리를 치료하는 약을 만드는 실제적 도움을 만드십니다.

 

 

법률적 대언자

 

요한일서 2 장 1~2절을 보면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한일서 2:1~2)

 

여기에 ‘대언자’란 단어가 나오는데, 곧 ‘보혜사’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인데 우리 죄를 대신 지시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보혜사가 되었습니다. 즉 대언자가 됩니다. 대언자란 법정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변호하는 변호사입니다. 죄인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 변호사는... “심판관이신 하나님, 저는 내 의뢰인 이 사람을 대변합니다. 저 사람은 형편없었고 율법을 알고도 위반했으며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 사람에게 무죄 선언을 해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이 사람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한번 봐주세요. 딸린 가족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판사의 심금을 울린다고 될 일이 아니고, 설득력 있는 객관적 법적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대언자는 변호합니다. "내가 이 사람의 죗값을 치렀으니... “내가 죄의 형벌을 다 당했으니 같은 죄를 두 번 벌하심은 의롭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구합니다.” 이렇게 법적 근거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 대언하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됩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한 법적 객관적 기초를 마련하심으로 우리를 돕는 첫째 보혜사가 되신 것입니다.

 

 

성령, 성자의 사역 적용

 

이렇게 성자는 성령과 함께 성부의 뜻인 구원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후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부에게 청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십니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16~17)

 

그 다른 보혜사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원래 ‘영’은 주로 중성 명사인데 예수님은 성령님을 ‘그’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흔히 생각하듯 어떤 비인격인 힘이 아니라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십니다.

 

그러면 그 성령님은 우리가 힘들 때 우리를 위로해 주고, 어려울 때 상담해 주는 위로자와 상담자와 같은 분이 되심으로 보혜사가 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단지 정서적 도움을 주면서 아픈 마음의 마음을 도닥거려 주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그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자 예수님이 지상 사역과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루신 법적 구원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함으로

< 즉 성자의 객관적 구원이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일어나게 함으로> 우리를 돕는 보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성자가 행하신 구원을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십니까? 어떻게 성자의 위대한 구원을 믿는 우리에게 적용함으로 그 구원이 우리 개인과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합니까? 그런 성령의 사역이 매우 다양하게 성경에 나타납니다.

 

 

성령의 사역들

 

먼저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과 그의 행하신 구원을 알게 하십니다.

즉 첫째 보혜사인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나를 위해 대언하며 말하신다면,

두 번째 보혜사 성령님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일을 나에게 듣도록 말해줍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

 

성령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여러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는 의미보다, 자신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는 그분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게 하는지 이 구절을 보십시오. “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한복음 16:8~11)

 

성령님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뜻은 , 유대인들과 세상이 죄라고 의라고 그리고 옳은 심판이라고 말한 것이 다 잘못이었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 정결례법, 성전법을 어기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죄는 안식일과 성전을 완성하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이 의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감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오히려 하나님의 참 의인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 임금이 예수님을 심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사실상 심판받은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담긴 구원을 바르게 알게 해줍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증언합니다. “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복음 15:26)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 의인이고, 성경 예언을 전달한 선지자가 아니라,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요 주님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게 함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도우십니다.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을 영접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이루신 구원, 다시 갱신한 새 언약, 그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믿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재창조가 일어나게 해주십니다.

 

 

내주

 

이렇게 성자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후에,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성자가 이루신 구원이 계속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도우십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로마서 8:9).

 

믿게 되면 그다음부터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셔서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 됩니다. “ 너희 몸은 …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6:19) 우리의 몸도 성전이지만 우리가 함께 이루는 교회 공동체도 역시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이렇게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게 합니다.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5~16)

 

 누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십자가 사역을 근거로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고, 또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되면,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지만, 우리는 종종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아버지의 뜻과 무관한 기도를 드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친히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로마서 8:26~27)

 

위로와 평안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가 살면서 여러 어려움을 당할 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와 평안이란 것은 심리적 정서적 위로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위로와 평안을 주시되 차원이 다른,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6~39)

 

우리는 죽음 앞에 서 있는 듯한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암이란 질병 앞에 서는 두려움,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안, 자녀 문제로 인한 한계 앞에서 겪는 좌절, 사람 관계 속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 수많은 종류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삽니다.

 

이럴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막연한 정서적 위로 보다는, 성자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극심한 고통을 겪으신 것을 알게 하시고, 그런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함으로 성자 예수님을 통한 깊은 위로를 주십니다.

 

이럴 때 성령님은 성자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의 사랑, 십자가에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그 사랑은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으며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음을 알고 그것에 기초한 하늘의 평안을 갖게 합니다.

 

그런 사랑에 근거한 위로와 평안을 노래하는 찬송이 많지만, 그 중에서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이처럼 성자가 이루신 그 구원을 생각하게 함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맛보고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음

 

이렇게 성령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고, 또 삶의 여러 상황 속에서 위로와 평안으로 견디고 이기게 하시면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며 우리가 변화되게 합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에베소서 3:16.) 그리고 우리 속에 9가지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그 성령의 열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함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성품으로 바뀌게 해주심으로 우리를 돕는 보혜사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그것을, 서로를 위해 사용하게 함으로 서로가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예수 공동체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교회를 작은 예수로서 세상으로 파송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도우시는 보혜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균형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삼위일체가 함께 이루시는 것임을 봤습니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고, 성자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하시고, 성령님은 그것을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도록 적용하십니다. 구원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성자와 성령, 둘을 함께 붙드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성자는 그 속에 엄청난 내용이 담긴 책이라면 성령은 그것을 보고 읽을 수 있는 빛과 조명과 같습니다. 성자가 성부에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성령은 그 길로 가게 해주는 힘과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할 때 이 둘의 균형이 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하신 일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성령님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는 지식은 있지만 자기를 바꾸는 능력이 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나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지만, 성자가 이루신 구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은 있지만 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혹시 나는 어떤 경우에 해당됩니까? 온전한 구원이 되려면 성자가 이루신 객관적 구원만으로 안 되고, 그것을 내 안에 주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왼손에 해당되는 성자와 성령이 함께 역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점에서 기울고 있습니까?

 

 

사모함

 

성경과 기도, 성자와 성령, 둘의 균형이 맞아야 하지만, 그 각각이 너무 피상적이고 얕고 가벼우면 안 되고, 둘이 다 깊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더 깊이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브리서 3:1) 정보의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지식, 성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루신 구원을 아는 지식은 미흡합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자녀됨, 하나님 나라, 소망, 약속에 대한 나를 살리는 영적 지식을 세상의 그 어떤 지식에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만 있으면 그 지식에 이르는 길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노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도 받아야 합니다. “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어떤 신적인 힘과 에너지를 내 안에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충만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내 마음 집에 주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집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데, 그 마음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의 집, 거실과 안방과 주방에서 주인 노릇하는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 우상들, 내 중심의 자아, 여러 인간들, 상품들, 탐욕, 이런 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성령님이 주인의 자리에 앉으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강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성령님이 주인이 되시도록 구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주되심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제 안에 충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 안에 충만한 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주인 노릇합니다. 성령님, 오셔서 마음의 집에 주인의 자리에 앉으시옵소서. 그래서 내 몸이 주님의 성전이 되게 하소서. 내 마음의 집 거실과 안방과 주방과 다락방, 모든 곳을 다 개방하오니 성령님이 주인이 되소서. 이렇게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닮음

 

셋째 이렇게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하면,.. 성령님이 주인이 되면 ... 그 성령님은 내 안에서 성자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즉 성자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 놀라운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합니다.

 

그 죄 용서하심, 자녀 됨의 권세, 기도의 풍성함, 영적 교제, 이런 구원의 내용이 점점 내 것으로 경험되게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실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란 성품으로 나타난 예수 닮은 모습으로 변합니다. 종교적 사람, 지식의 사람, 광신적 사람이 아닌 예수 닮은 모습이 나타나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마다, 성령님을 마음의 성전에 매일 주인으로 모십시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이 이루어지게 함으로 신앙이 추상적이고 지식만으로 메마르지 않고,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됩니다. 우리 안에 예수 닮은 변화가 보입니다.

 

 

            2024년  4월21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