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에베소서 3:10~11) 이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알게 하려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를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겉으로 보면 때로 초라하고 불완전하고, 꼭 필요한가, 이런 질문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함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훨씬 더 중요하고, 눈에 비치는 교회의 모습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과 존재 의미가 매우 큽니다. 겉모습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면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대할 수 없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 속에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교회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에는 교회의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를 바로 아는 것이 포함됩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정체성과 핵심사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시몬에게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고 십자가 그 너머 세워질 교회를 보냈습니다.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내 교회’란 ‘에클레시아’... “불러낸 무리들”로 종교 조직체나 건물이 아닌, 살아 있는 돌, 사람으로 세워진 참 성전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셨지만, 사실 예수님이 혼자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세우시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이 만든 열매입니다.
그 교회는 , 성부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뜻을 따라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니, 성자 예수님은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시되 그 순종의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위한 객관적 법적 기초를 마련하셨고 이후 부활 승천하신 성자는 하늘 보좌에서 주님으로 통치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성령님은 성자가 이루신 구원 사역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시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하셨으니... 그들이 바로 부름받은 무리들, 에클레시아이고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만든 결과이자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님은 이 교회를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 속에서 성자 예수님 안의 십자가 구원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교회들은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도구와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니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데 사용하시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베소서 1:23, 공동번역)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필연적인 결과이면서 필수적인 도구가 되고, 또한 하나님이 세상의 통치를 위해 여러 기관을 사용하되 교회를 직접적 도구로 사용하시니 , 눈에 보이는 것 훨씬 이상의 존재 의미가 있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초대교회
성자 예수님께서 세우신다고 하신 ‘그 교회,’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이루시는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세워지는 그 교회는 주후 30여 년 어느 오순절에 예루살렘, 120명 제자로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예루살렘이란 장소이며 오순절이란 시간이며 왜 120명이었을까요? 시간과 장소와 인원수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속에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장소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란 뜻이고,
일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땅, 역병의 심판을 받았을 때 다윗이 제사를 드렸던 타작마당 자리였는데, 이곳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평화를 가져오는 속죄제사 화목제사가 계속 드려졌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진정한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과의 평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그 참 평화의 기초 위에 첫 교회가 세워져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평화를 경험하고 증명하게 됩니다.
시간 오순절은, 유월절을 기준으로 50일이 지난 때입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신이 넘어감으로 출애굽하게 된 여호와의 구원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때로부터 50일째 시내산에 도착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받습니다(출애굽기 19:1,11,18). 십계명이 중심이 된 율법을 받아 파라오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즉 유월절 이후 50일째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곧 구약의 교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로부터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돌 판이 아닌 마음 판에 새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성자와 성자 안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알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하니 이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출애굽한 12지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구원을 온 열방에 알려야 할 사명을 갖고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줄 열방의 빛이자 그 구원을 전달할 복의 통로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120명의 제자가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의 입에서 방언이 나옵니다. 그 방언은 하나님에게 말하는 기도의 언어가 아닌 온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선교의 언어였습니다. 그 방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아니라 모여든 모든 사람이 자기 나라 언어로 알아듣는 언어였습니다. 이런 방언을 주신 것은 영적 애굽인 죄에서 건져내신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그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세상의 빛이자 구원의 통로가 되는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란 장소에, 주후 30~40년 경의 오순절이란 시간에, 약 120명의 제자들로 첫 교회가 탄생한 것인데, 이 교회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서 분명한 이유와 사명과 목적을 가진 영적 공동체로 생겨난 것입니다.
첫 교회의 모습
그렇게 탄생한 첫 교회의 모습은, 초기였기에 아직 외적으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교회가 반드시 가져야 할,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예배와 말씀입니다.
“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그들은 모였을 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떡을 뗐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삶의 교훈들이나 인생 지혜들이 아닌 십자가가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란 것, 예수님이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귀로 듣기도 했지만, 빵을 떼는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십자가 속의 구원을, 시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온 감각을 통해서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핵심은 들리는 말씀인 가르침과,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모여 대화하는 친구가 되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성이 다른 이들이 모여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영적으로 같은 성을 가진 형제 · 자매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신분 직위 재산 등등의 계급장을 달고 차별하며 살지만, 교회안에서는 주 안에서 그 모든 계급장을 다 떼고 다 같이 서로 형제 · 자매가 되었다는 것이니,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 가정으로, 초대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 등의 모든 차이를 넘어, 서로 형제와 자매란 새로운 관계를 넘어, 심지어 소유를 나누는 교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성도의 교제는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의 모습과 다른, 삼위가 일체가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는 공동체였습니다.
셋째, 선교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이 임함으로 방언을 받았고 그 방언으로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자, 첫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인, 오순절에 3천 명이란 영적 첫 수확이 일어났고, 그 후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마지막 영적 추수를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등장한 교회는 위로 하나님께 예배, 안으로 서로 교제, 밖으로 선교하는 공동체였고 이 세 가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작동했습니다. 이리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결과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역사 속의 교회
초대교회 이후 역사 속에서 다양한 시대 다양한 지역에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다양한 교회들을 하나의 교회가 되게 만드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모습 속에도 있었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고백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사도신경).
이 고백은 모든 시대 모든 곳의 다양한 교회가 가져야 할 공통 분모,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첫째 공통 요소는 거룩성입니다.
거룩한 공교회라고 했는데, 그 거룩이란 우리가 성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까?
우리가 남 달라서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은혜 안으로,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은혜로,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오직 은혜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무리인데, 성도 즉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우리가 어두움에서 그분의 기이한 빛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직 그렇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 때문입니다. 성자의 은혜, 성부의 사랑 때문에 구별되어 거룩한 무리가 되었다면 그 교회는 구원의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말씀 속에서 성자의 구속을 더 알고, 성부의 사랑에 감격하며 예배하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무리가 된 성도들은 점점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런 위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그래서 거룩하게 칭함을 받았고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 이것이 모든 교회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둘째 공통 요소는 ‘단일성’ 혹은 ‘보편성’입니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하는데, 공교회란 보편적이란 의미로, universal, catholic으로 씁니다.
개별적으로 의자들은 너무 다양하지만, 의자란 보편적인 단어로 다 묶을 수 있듯이,개별적인 사람들은 다 다양하지만, 사람이란 보편적인 이름으로 하나로 묶습니다.
보이는 유형의 교회들이 매우 많지만, 이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무형 보편적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다양한 성도들이 각각의 은사들을 가지고 사용함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교회들이 있는데 참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다양한 여러 교회는 큰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 몸은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아래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에베소서 4:4).
다양한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되려면, 서로의 개별적 특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공유하는 핵심 요소를 붙들어야 합니다. 각 성도가 서로 다르지만, 한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알고 서로 영적 가족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하고, 지역과 문화에 따른 다양한 교회들이 있지만 개별적 특징 때문에 나뉘지 말고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바른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사도성입니다.
사도란 말은 보냄을 받은 무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이들인데 예수님은 이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들을 열두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비록 12사도는 아니지만, 그들처럼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았고, 또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점에서 사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공교회의 ‘거룩한’의 의미는 두 가지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구별됨, 하나님에 속함,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옴, 이런 소극적인 의미의 거룩이 있고,
또 하나는 거룩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속을 거룩하게 만듦,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만듦, 이런 적극적 의미의 거룩도 있습니다.
더러움을 피함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할 수도 있지만, 더러움을 제거함으로 깨끗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된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 자기를 지키는 거룩만 말했지만, 예수님은 죄인으로 불리는 이들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적극적 의미의 거룩을 보여주셨습니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거룩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구별된 거룩한 무리인 성도란 고백이면서, 동시에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거룩하게 만드는 무리인 사도들이란 고백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무리로 선택하신 이유는 아직 선택되지 않은 그들에게 보내기 위함입니다. 선발대가 먼저 가서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해두는 것처럼, 선택은 우리만을 위한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이타적 선택입니다.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이렇게 세상 속으로 보내어 사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두고 선교라고 합니다.
모든 성도는 사실 사도들이고, 모든 교인은 선교사, 미셔너리입니다. “미셔널 쳐치”란 말도 모든 교인은 선교사다,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이 교회의 필수적 모습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의미는 역사 속의 모든 교회는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공통 요소로 가져야 하며,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필연적 열매이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한 필수적 요소임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우리 교회의 의미를 더 알고 더 소중히 여깁시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은,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셨고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필수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함부로 혹은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비록 지상의 교회는 건설 중인 건물과 같고 치유 중인 환자와 같기에 우리의 눈으로 보면 약하고 불완전하고 초라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에베소서 3:10~11)
교회의 존재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힘써야 합니다.
지난주 배곧영동교회 창립 7주년이었고 지금 청소년 포함 180명 정도가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교회를 더 개척하고 이 교회도 건강하게 세우도록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서울영동교회도 과거 믿음의 선배들과 지금의 우리를 사용하사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또 붙들고 계십니다. 지금의 이 교회도 계속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교회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를 더욱 건강하게 있게 만드는 일에 더욱 힘씁시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교회에 여러 제도 전통도 사역도 생기는데, 때로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약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을 중심으로 더 단순화하고 가지치기하면서 교회의 핵심에 더욱 집중하여 그것들의 열매가 더 풍성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우상이 난무하고 자아가 신이 된 세상에서, 어둠의 세상 속에서 진리의 빛이 밝히 드러나는 말씀, 예수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가 밝히 보이는 말씀이 있는 예배,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단비에 젖는 예배,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바다에 빠지지는 은혜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제입니다.
이해타산적 만남, 가벼운 만남, 동창 만남, 등과 같지 않은, 참된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카페들이 생겨나 커피 향으로 후각을, 좋은 인테리어와 전망으로 시각을, 잔잔한 음악으로 청각을, 맛있는 커피와 디저트를 미각을 자극함으로 만남의 더 좋은 환경을 만들지만, 그러나 그런 환경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만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는 ,서로 만나되 좋은 친구로서 만남을 넘어, 영적 가족의 형제 · 자매로 만나는 교제가 실제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도 교우 한 분이 아파서 투병 중인데 구역원 한 분이 자기 가족도 아닌데 그를 위해 사흘을 금식했습니다. 교회에 이런 진정한 만남과 교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교제는, 말씀을 나누고 받은 은혜를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눌때,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는 만남과 교제,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참된 만남과 교제가 있도록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셋째, 선교입니다.
성부가 성자를, 성자는 성령님을 보내셨고, 성령님은 성도를 세상으로 보내시듯, 우리 교회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자녀들에게 보내어 수직선교가 일어나고, 삶의 현장으로 보내어 세상 속의 수평선교가 일어나게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선교사란 타이틀이 없지만 사실상 모두 선교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 속의 선교사이니 우리의 태도, 말투, 표정도 일종의 전도지입니다. 얼굴 표정이 굳어 있고 말투가 거칠고 태도가 무례한 것은 선교를 막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인데도 얼굴이 밝으면 그 얼굴 전도지를 보고 왜 그렇죠? 물으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회 때문이라고 말하고,
고통 중에서도 불평과 원망이 아닌 감사의 말을 하는 언어 전도지를 통해 왜 그렇죠? 물으면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 함으로
모든 성도가 일상에서도 선교사로서 살아감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위로 예배하고 안으로 교제하고 밖으로 선교하는 본질적 모습을 갖추되 그 깊이가 더해지면,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영혼이 활짝, 사귐을 통해 서로가 단짝, 선교를 통해 삶이 반짝이게 할 것입니다.
영혼이 활짝 서로가 단짝 삶이 반짝, 이렇게 더 밝고 더 빛나고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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