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
<7월7일 창립기념예배 설교>
오늘은 교회 창립48주년 기념일입니다.
오늘 교회에 들어오면서 출입구 좌우에 붙은 사진들을 보셨을 텐데 그 속에 우리교회 48년의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되돌아 보니 다 감사한 일들입니다. 무엇보다 48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교회가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명을 감당하며 든든히 서게 될 것을 믿으니 감사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은 왜 우리교회가 이곳에 세워졌는가?
교회가 무엇을 위해서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교회가 왜 있어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 있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사용한 비유를 사용하자면 , 복음이라는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가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여러 종교적 의식과 제사들에 열심이 많았고, 그런 의식이 매일 계속되었지만,
사람들은그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화목의 기쁨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7개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의 첫째 기적이 사역 초기에 행한, 가나 혼인 잔칫집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기적 사건 다음에는 사역의 말기에 이루어진 성전 청결 사건을 병치해서 기록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당시 유대교의 형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신랑 신부의 만남의 기쁨의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의 기쁨이 사라진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당시 유대교는 포도주가 아닌 맹물을 주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메카 순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많은 사람들이 이 더운 여름에 순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종교적 의무를 다함에도 하나님과의 참 만남의 화목의 기쁨이 없다면, 그 종교적 의례는 포도주를 기대한 신도들에게 물만 주는 또 다른 유대교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를 외쳤고, 로마 황제는 로마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니, 황제가 하는 일은 굳 뉴스, 곧 복음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은 일부 로마인들에게나 해당하지, 다수 피지배국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모든 이들은 그 로마의 평화를 참 평화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건강한 판단력을 잃고 참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복음이라며 선전했던 정치적 선전과 구호는 독주이지 좋은 포도주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여러 종교나 정치적 선전을 통해 포도주를 기대하게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맹물이거나 독주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기쁨도 감사도 삶의 의미와 목적이 없이 그저 생존하며 사는 밍밍한 맹물과 같거나, 더 자극적이고 더 감각적인 것을 구하면서 도덕과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독주와 같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참 만남의 기쁨을 안겨다 주는 참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그 포도주는 포도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만듭니다.
그 영적 포도주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인간과 인간의 참 만남의 기쁨을 줍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 그 영적 포도주를 마셨지만, 이 새 포도주는 우리만이 아닌 세상 모두가 마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 포도주를 담고 보존하는 가죽 부대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그 새 포도주를 담고 보존하고 전달하는 건강한 새 가죽 부대가 되어 있어야 했고 ,또 계속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른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교회, 나의 사랑, 나의 고민>이란 책에 , 얼 파머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밀피타스란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과 같은 곳도 없고, 괜찮은 문화행사조차 구경 하기 어려운 곳이었고, 다만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소박한 악단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단이 강당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연주를 들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여서, 만약 베토벤이 그 연주를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숙한 연주가 그 동네에서 연주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 마을 사람들은 그 고등학교 악단이 아니고는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 9 번을 일생동안 한 번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연주가 비록 미숙하고 형편이 없지만, 그 고등학교 교향악단이 그 마을에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많은 노래와 연주를 듣습니다.
멋지게 연주되는 곡들이 많지만, 그 연주의 내용은 대부분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사람들의 상처받은 감정 이야기 들입니다. 이런 이야기들로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 사실 우리에게는 더 새로운 노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져온 새 시대에 관한 내용을 담은 새 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이야기, 그런 내용을 담은 새 악보와 그것을 들려주는 연주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악보를 누가 연주합니까?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하기에 교회는 밀피타스 고등학교 교향악단과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니면 교회가 세워진 지역들에서 그 곡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교회는 복음을 연주하는 악단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의 악보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복음이란 새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로서, 복음이란 새 악보를 연주하는 작은 악단으로 있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돌아보니, 감사한 것은 복음이란 새 포도주의 맛을 비교적 보존하고 새 악보를 비교적 바르게 전달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복음이란 악보가 아닌 다른 악보를 들고 연주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개신교는 성경이란 바른 악보를 되찾아 연주하게 되었는데 ,개신교회 중에 더러 성경이란 악보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경우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성경 해석의 자유가 오히려 성경 해석의 오류를 만들어 ,교회들이 부분적인 복음, 피상적인 복음, 파편화된 복음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질 1970년대 당시 한국교회도 그랬습니다. 여기저기 교회가 많이 세워졌는데, 지나고 보니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양적으로 세워졌느냐 보다, 얼마나 교회들이 성경이란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을 성공복음, 번영복음, 심리 복음으로 주된 멜로디를 바꾸어 연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부로 된 곡을 소프라노 하나의 멜로디만 연주하는 예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영혼 구원이란 멜로디만 연주하고, 사회구조, 윤리적 실천, 창조세계 보전과 같은 악보 속에 있는 다른 화음 멜로디는 다 빼버리는 것입니다. 베토벤 9번 합창교향곡이 다른 곡으로 바뀌거나 그저 그렇고 그런 수준의 곡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복음이란 악보를 바르게 그리고 들리게 연주해야 하는데, 우리가 감사한 것은 우리교회에 복음이란 악보는 바르게 읽어 내고, 4부로 충실히 들리도록 연주하는 분이 계셨다는 점입니다.
영혼구원이란 소프라노, 사회참여와 관심이란 알토, 윤리적 실천이란 테너, 창조회복이란 베이스를 4부로 강단에서 연주하는 손봉호란 설교자가 계셨고, 이후 복음을 비교적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하려고 힘써 온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함께 하는 연주
또 감사한 것은, 교회 온 성도들이 복음이란 악보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악기를 가지고 화음을 만들며 연주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비교적 많은 성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교회의 여러 일들을 맡아 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의 권한과 일이 많이 위임되어 수평적 구조로 자발적 사역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양한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악기 소리만 크게 내려는 사람도 없었고, 자기 악기 소리를 아예 내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이, 다른 악기 소리가 잘 들리도록 자기 악기의 소리를 절제하며 연주했습니다. 어거스틴이 교회가 갖춰야 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사랑을.”
교회에서 본질과 진리 문제에 관해서는 성경이란 권위를 같이 붙들고,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합의로 결정된 것을 따르면서, 서로 자기들의 악기를 가지고 성경의 악보를 연주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48년 교회 역사에서 특별한 분란이나 문제가 전혀 없었으니 감사합니다.
들리는 연주
이렇게 성도들이 다양한 악기로 화음을 이루면서 복음이 들릴 수 있도록 연주했습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고 믿고, 자라나는 세대를 교육하려고 한 것,
성도를 키우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여러 신학생을 유학시켜 십여 명이 넘는 이들이 학위를 받고 신학생을 키우는 교수가 되어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으며, 지금도 신학생들을 키우기 위해 적지 않은 금액을 장학금으로 지원해 왔습니다. 복음의 연주가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왔고, 복음 연주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곳에서 이루어지도록 새로운 형태의 교회 개척도 했고,또 계획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복음의 연주가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 문화선교, 학원선교, 문서선교, 통일선교 등으로 피어났고, 또 농어촌에서 해외에서 더 일어나도록 지원하고 돕고, 힘든 약자들이나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사역을 통한 복음 연주가 있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악기로 조용히 복음을 연주하는 일들이 매우 많다는 점입니다. 한 분, 한 분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면서, 겸손과 온유와 성실함으로 복음을 개인적으로 연주하며 사는 분들이 많은 것은, 우리 교회가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48년이 흘렀습니다. 앞으로도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많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뀔 세상은 너무 급격한 변화가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세상은 외적으로 아무리 바뀌어도 내적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종교와 이단들이 있을 것이고, 더 자극적이고 더 감각적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 현대 문명 문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에서 진정한 포도주를 기대했지만, 맹물이나 독주를 경험할 것입니다.
지금 이시대에 필요한 것은 복음이란 새 포도주, 베토벤 9번 합창과 같은 새로운 연주입니다. 성경이란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콘텍스트에 잘 적용되도록, 복음의 원뜻에 충실하되 변하는 상황에 더 긴밀하게 적용되도록 하는 연주, 이런 연주를 위해 교회가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런 연주를 위해서 세 가지 과제가 있다고 봅니다.
1.교회의 갱신
첫째 교회의 꾸준한 자기 갱신을 통한 성숙과 지속입니다.
한국사회 48년은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들이 들어 있는 압축파일과 같습니다. 이런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변할 수 없는 복음을, 변하는 세상 속에 연주하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앞으로 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공지능과 기술과 환경문제와 극단적인 소수가 지배하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형태 등이 생겨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새로 오시는 목사님을 통해서, 복음에 더 깊어지고 더 명료해져 복음의 연주를 잘할 수 있다면 이런 위기의 시대는 오히려 교회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더 갱신하여 더 멋진 복음의 연주를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성도들도 개인적으로 바쁘지만 수동적으로만 있지 말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함으로 더 멋진 화음을 만드는 교회 공동체가 되도록, 갈수록 더 갱신되어 더 분명하고 더 아름답게 복음을 연주하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갱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둘째, 교회가 복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는 다양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갱신은,지금까지는 예술의 전당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잘 준비된 연주를 듣게 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교회는,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로 찾아가서 연주하는 버스킹과 같습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교회를 개척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모델의 교회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복음 연주의 고전적 방식이 필요합니다.
개인 전도, 복음의 개인연주입니다. 하모니카 하나, 기타 하나, 풀피리 하나로 복음을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연주하는 개인전도입니다.
선하게 사는 삶을 통해 복음을 연주하는 간접전도도 있지만 ,복음을 직접 전하는 직접적 전도도 있습니다. 이제 갈수록 관계를 통한 직접 전도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여러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만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 곳곳에서 성도들이 소박하게 개인 전도를 통한 복음연주를 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국 연변에 선교사로 들어가기 전 3개월을 한 선교단체 공동체에서 함께 살면서 개인전도를 훈련했습니다. 매일 대학교 캠퍼스에 들어가서 전도했습니다. 벤치에서 만나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노크하고 만나고 했습니다. 많이 거절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열매도 있었습니다. 한 학생에게 전도했는데 일주일 후 다시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마침 다른 지역으로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그 학생과의 약속 때문에 일정을 조정해서 고속버스를 타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찾아갔습니다. 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그 학생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실연당한 사람처럼, 구멍 난 가슴으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점에 가서 우유 하나와 빵 하나를 먹으려고 하는데 속상하여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그냥 돌아갈까 했지만, 다시 학생 기숙사로 가서 노크했습니다. 방안은 엉망진창이고 학생들이 비스듬히 누워 “아저씨 왜 왔어요.”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관심을 보여서 전도했는데 그가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바람 맞아 눈물을 흘린 눈에서 다른 종류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그 형제는 지금 의사가 되어서 믿음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삶의 무게로 인한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살지만, 그런 눈물만이 아닌 다른 종류의 눈물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개인전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만나는 관계, 기회, 시간 등을 낭비하지 말고 잘 활용해서 복음을 곳곳에서 연주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창립일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새 포도주를 맛보고 맛보게 하려고, 복음의 새 악보를 연주하고 들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교회는 복음이란 새 악보를 더 분명하고 더 아름답게 더 깊은 소리로 복음을 연주할 수 있기를,
갈수록 더 갱신되고 더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는 교회가 되길, 온 성도들이 자기 악기로 삶의 자리에서 연주하길, 복음을 연주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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