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왕언니 2024. 8. 30. 12:25

시편 22:1~2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22:  11~19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난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그 고난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성경의 몇 인물을 예로 들어 보면, 요나와 다윗처럼 자신의 불순종과 범죄로 인하여 생겨난, 원인이 명백한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과 예레미야처럼 자기 잘못과 무관하게 악인들의 배신이나 공격으로 생겨나는 의로운 고난도 있고,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겪는 상실이 주는 고통도 있고,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은 자기 죄를 회개하게 하고,  원수로 인한 고난은 그 원수를 용서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고, 상실의 고난은 슬픔을 이길 힘을 구하고, 억울한 고난은 분노를 이길 힘을 구하고, 욥 같은 고난은 신앙에 대한 의심을 이길 힘을 구하게 합니다.

 

이처럼 여러 고난이 있는데  원인을 알 수 있는 고난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두 면을 함께 바라보게 합니다.   잠언은 고난을 만날 때 무엇을 고치고 회개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바르게 고치면 고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잠언의 시각으로 풀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잠언의 세계처럼 흘러가지 않는 부분이 세상에 많습니다. 이것을 욥기와 전도서가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이 정당하기도 하고 부당하기도 하고,     알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종류의 고난을 겪고 사는데 , 그  고난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라    감당할 만한 고난에서부터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난도 있습니다.

 



시편 22편

 

시편에는  탄식 시들이 많은데 각각 다양한 종류와 정도의 고난들이 있습니다.     

시편 22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

이 고난은 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의 이유를 잘 알 수 없기에 더욱 힘든 고난입니다.

 

 

 

그러면 대체 시인에게 닥친 고난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시이기에 배경을 충분히 알 수 없어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구절을 통해서 대략 상황을 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시인은 평소 자신의 조상들을 건지신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다녔습니다. 그 믿음의 선조의 하나님은 과거 그들을 구했고 그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 22:4~5)

 

그런데 그 시인이 고난에 처하자, 그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그를 조롱합니다.   너의 조상은 건지셨다는데 어떻게 너만 버린 거냐? 입술을 비쭉 대며 조롱합니다.

 

그들의 비웃음 앞에서 시인은 마치 벌레 취급을 당한다는 비참한 심정을 갖게 됩니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편 22:6~8)

 

그들은 비웃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통 중의 시인을 더 괴롭힙니다. “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 22:12~13)

 

그들은 황소나 힘센 소나 사자같이 시인을 죽이려고 할 뿐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을 보면서 놀립니다. “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7~18)

 

이런 고난에 처한 시인은 결국 온몸에 힘이 빠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신체적 통증을 호소하게 되고, 그뿐 아니라 촛농이 녹아내리듯 마음이 녹아내리고 입술도 타들어 가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시 22:14~15)

 

이런 외적 상황과 그것이 가져오는 내적 감정은 시인을 코너로 몰고 가서 이런 외마디 탄식을 발하게 합니다.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편 22:1)

 

 

고통의 사람들

 

시편 22편 시인의 탄식 시들이 현대에도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가 남편을 병으로 보내고 몇 개월 뒤 25살 아들을 떠난 보낸, 소위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한 후, 아들을 목 놓아 부르면서 했던 고통과 절규하는 글이 그녀의 <한 말씀만 하소서>란 책에 담겨 있습니다. 현대판 시편 22편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딸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그 딸이 어릴 적 자신의 무심함으로 인해 힘들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지고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쏟아낸 글이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굿나잇 키스>란 책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도 현대판 시편 22편들입니다.

 

비록 글로 쓰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창고에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마음속에 시편 22편을 담아두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실제 그런  분들을 알고 있고 너무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종류, 다양한 정도의 고통을 겪고 살고, 때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22편은 어떻게 하라고 말해주고 있을까요?

 

나를 버리지 아니하셨다!

감정을 토로함

 

시편 22편은 1절부터 시인이 고통 속에서 가진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구절구절 자기 고난의 상황과 그것으로 인한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쪽으로 흘러갈까, 이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가 더러 있습니다. 고난의  감정은 급한 급류처럼 우리를 어디론가 쓸어가는데, 그중의 하나가 ‘단절감’과 ‘고립감’이라고 합니다.     고난이 닥치면 이전까지 가깝던 친구와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친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그런 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고난은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이라며 자기를 향해 화살을 쏘면서 자책감과 자학의 웅덩이에 빠뜨리기도 하고, 반대로 이 모든 것은 다 그 누구, 혹은 그 무엇 때문이라며 그를 향해 화살을 쏘면서 깊은 분노나 냉소의 굳은 마음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깊은 자기 연민 속으로 끌고 간다고 합니다.

 

사실 고난이 이런 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끌고 가도록 그대로 두면 ,  결과는 고난이란 상황이 마음마저 더 상하게 하고, 그 마음은 고난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만듭니다.

 

고통에 대해 보이는 심리적 반응도 있지만 종교적 처방들도 있습니다.

고통이란 현실을 보면서 고통이란 참 실상이 아닌 환상이고, 이 모든 것은 마음의 욕심이 만드는 결과이니, 명상과 사색의 힘을 빌려서 부처님의 미소와 같은 평정심에 이르고자 합니다. 

또는 모든 것은 업보와 카르마라고 생각하고 체념하고 고통에서 초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라.

 

그러나 시편은 고통이란 것은 너무 생생하고 손에 잡히는 현실이라고 하고 그것이 만드는 감정도 자기가 스스로 통제하고 컨트롤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 감정의 둑을 개방하여 쏟아지게 하라고 합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솔직하게 표현하라고 합니다.

 

시편은 고난의 상황을 내 감정 때문에 그 어려움과 힘듦이 좀 과장된 모습으로라도 그대로 표현하라고 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라며 자신에게 느껴진 심리적으로 과장된 현실이라도 그대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딸을 먼저 보낸 점잖은 노 교수도 그랬습니다.

“ 네 생각이 난다. 해일처럼 밀려온다. 그 높은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나는 운다.” (이어령, <네 생각>)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란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너무 울어서 이제 다 쉬어 겨우 한 마디씩 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책 끝에 평론가의 서평이 붙었는데

제목이 ”통곡과 말씀의 힘”이라고 잡았습니다. ‘통곡의 힘’, 그녀의 통곡이 그녀를 건져 올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감정을 분출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고통에서 그를 건져 올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시편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울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시편 62:8). 여기서 토하라는 표현은 그릇의 물을 단박에 쏟아붓는다는 뜻입니다. “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시편 44:23)라고 하나님에게 다그치고 “주여 그전에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시편 89:49) 라고 추궁하며 따지고 싶은 마음까지도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시편은 절반이 탄식 시입니다. 시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이 가져온 여러 감정들을 쏟아낸 것들의 사진들이고, 고통으로 상처받은 감정으로 연주한 애절한 단조 가락의 노래들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그 내용이 고상한 내용보다 무게로 나를 짓누르는 고통을 쏟아내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시편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십니다.

 

 

너를 새롭게 봄

 

이렇게 내 고통을 하나님 앞에 시편의 기자처럼 쏟아내면, 그때 그 눈물 어린 눈으로 새롭게 보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받는 그들입니다.  그동안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머리로 알았지만,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을 가슴으로 알게 됩니다.

 

고통을 겪자 비로소 고통받는 이들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정채봉 시인이 백두산 천지를 보고 이런 시를 씁니다.

“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정채봉, “슬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라 – 백두산 천지에서-”)

설마 싶었던 저 사람에게도 그 마음속에 큰 눈물샘이 있다는 것을 그 산의 꼭대기에 가보고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가 큰아들 유진을 먼저 보냈을 때도 그랬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이런 원망의 말을 하나님에게 합니다. “ 부모 말 안 듣고 말썽 부리는 아이들은 다 잘살고 있는데 왜 우리 유진이만 데려가시나요?” 아들을 먼저 보낸 안타까운 어미의 입에서 나올 법한 탄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한참 보낸 후에, 비로소 그녀의 눈물 어린 눈에 부모 말 안 듣고 말썽부리는 아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구분했는데, 그 벽이 사라집니다. 술과 마약에 빠진 아이들은 다 사랑이 그리워 그것들을 찾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남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땅끝의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어령의 딸”, “캘리포니아주 검사”, “변호사” 등의 멋진 타이틀을 내려놓고 오직 땅끝 아이들의 엄마로 자신을 사역을 감당하는 데 힘씁니다. 그리고 땅끝의 아이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쓰는데 그런 그녀의 삶을 담은 책이 이민아 목사의 <땅끝의 아이들>이란 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살았던 사랑하는 딸을 이어령 교수가 자기에 앞서 보내고 그 비통의 마음을 절절히 글로 담아내다가 자신의 딸을 통해서 세상의 딸들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 너는 한 아들을 잃고 세상의 땅끝 아이들을 품었다. 나는 딸 하나를 잃고 더 넓은 세상의 딸들을 품는다.” (이어령) 그리고 딸을 잃어버린 슬픔을 담은 책을 펴내면서 그 글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딸을 잃은 이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바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이어령,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고 씁니다.

 

 

 

김동연 집사님의 <있는 자리 흩트리기>란 책 뒤의 에필로그와 중앙일보 칼럼에 실린 “혜화역 3번 출구”란 글이 있습니다. “2013년 10월 7일, 자기 삶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날은 스물일곱 살 아들 덕환이가 2년 1개월의 투병 끝에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만나러 늘 혜화역으로 다녔기에 그 역 3번 출구는 아들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들이 생각나서 힘들었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씁니다. “옆에서 많이들 그럽니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일에 몰두해 잊어보라고 고마운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식 대신 나를 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어 보지 않은 사람, 자식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란 것을….” (김동연 “혜화역 3번 출구에서”)

 

그러다가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나게 되고 혜화역 3번 출구를 나오면서 그는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아이들과 자기 아들이 마음에서 오버랩되는 것을 느끼면서 이렇게 씁니다. “2 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 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더 아프다.” (김동연, <혜화역 3번 출구>)

 

그 후 아주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청년들을 볼 때마다 자기 아들이 더 아프게 생각날 수 있지만, 그 청년들을 자기의 아들로 생각하면서 청년들을 사랑하며 총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사람은 고통 속에 있을 때, 타인에 대해 더 마음이 굳어지고 냉소적일 수도 있지만, 고통 속에서 있는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을 겪는 그들을 머리로 생각하다가 가슴으로 품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란 현실을 고통을 통해서 이겨내게 됩니다.

 

팀 켈러는, 고통은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이겨간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너를 잃어버린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새롭게 만나면서 그 관계를 통해서 그 이웃을 통해서 고통의 파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주어지면 관계를 떠나 고립되어 가면 안 되고 고통을 공감하는 관계의 공동체 안으로 더 들어와야 합니다. 고통을 겪는 나는 네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각각의 고난을 통해서 서로의 고통을 더 공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울음을 통해서 서로의 울음을 함께 울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다시 만난다.

 

고통의 눈물 어린 눈은 너를 새롭게 보게 할 뿐 아니라 고통 속의 나를 새롭게 보게 만듭니다.

아니 그래야만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고통에 관해서 한 말입니다. "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지만, 사실 쾌락 속에서는 거의 듣지 못하거나 깊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양심 속에서나, 특히 고통 속에서는 그 말씀이 또렷하게 들리고 또 매우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또렷이 크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실제 모든 일이 평탄하게 돌아갈 때는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인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들인지, 별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별문제가 없다고 여기면서 삽니다.

 

하지만 고난의 순간이 오면 자신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조용히 물었던 질문이 비로소 또렷하게 크게 들립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던진 질문,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단순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고통의 순간에 비로소 가슴속에 쩌렁쩌렁 울리는 확성기가 되어서 들립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니?”

 

고통 속에서 들리는 이런 하나님의 질문들과 말씀을 크게 들으면, 그때 우리의 믿음 속에 섞인 불순물이 걸러집니다. 진짜 나의 모습을 다시 만나, 바울처럼 내가 모든 이들 중에 얼마나 작은 자인지, 얼마나 죄인의 괴수인지를 비로소 봅니다. 이처럼 고난을 통해서 나를 새롭게 볼 때 그 고난이 나를 태우지 않고 나를 정화시킵니다.

 

 

시인을 버리신 하나님??

 

고통은 남을 새롭게 만나고 나를 새롭게 만나게 합니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면 아직 충분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봐야 합니다.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2편 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시인의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시인을 버리고 떠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때, 원수들이 곰이나 사자처럼 그에게 달려들 때 시인을 버려두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순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시간이요 하나님이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시인을 버리신 하나님이실까요?

 

복음서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본문에 구약 본문 13구절이 나옵니다.

그중의 8구절이 시편에서 나오고, 그 8개 중의 다섯 구절이 다 시편 22편에 있습니다.

1 절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마가복음 15:34)가 마가복음 15:34에,

7절 “나를 보는 자가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 22:7), 가  마가복음 15: 29에,

8절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시편 22:8이, 마태복음 27:43)에, 15절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시편 22:15 )이 요한복음 19장에, (요한복음 19:28 내가 목마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18)가 ..... 마가복음 15:2, 마태복음 27:35, 누가복음 23:34, 요한복음 19:23~24)에 나옵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아람어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배반, 비웃음과 조롱, 극도의 목마름, 자기의 죽음을 노리개처럼 삼음, 이런 시편 22편의 시인이 겪었던 여러 상황을 시인의 겪었던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극한의 상황으로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그 시편의 기록된 일, 특히 시편 22편의 일들이, 사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있을 일을 예언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인의 말처럼 고통받는 시인을...,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림으로 우리를 도리어 붙드신 것입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울부짖었을까요?

버림을 받아야 할 죄인 된 우리를 붙들기 위해서 기꺼이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권자가 고난을 당함

 

우리가 새롭게 봐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

그분은 분명히 주권자요 고난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며 고난을 지배해야 할 분이신데

그 주권자가 고난을 받으신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자이신데도,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신 분입니다.

 

주권자가 고난을 받는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볼 때 비로소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하여 나를 버렸느냐고 원망하다가, 도리어 어찌하여 하나님은 의로운 당신의 아들,

고귀하신 당신의 아들을 버리시고, 추하고 악한 죄인인 나를 붙드셨냐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나를 더 붙들기 위해

죄인인 나를 용서받은 아들로 다시 붙들기 위해서, 의로운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폭풍 이는 바다와 같은 내 삶을? 울음의 샘이 터진 내 감정을?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누구를? 그것들을 바라봐야 할까요? 그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만 바라보면 안 되고, 우리의 한쪽 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힘들수록 억울할수록 고통으로 아플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십시오.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될수록 질병의 고통의 순간일수록 더욱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외마디가 하나님이 나를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말씀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이사야 43:2~3)

 

 

의인과 왕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난 속에 있습니까? 이 자리에 여러 종류의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이 있을 것이고,

특히 시편 22편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부서뜨릴 수도 있지만 다듬어 줄 수도 있고, 마음을 더 딱딱하게 굳어지게 할 수 있지만 더 부드럽게 할 수 있고, 우리를 태워버릴 수도 있고 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내릴 수도 있지만 올릴 수도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는 의인이 되면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인은 상황과 현실을, 마음을 바꾸고 성장시키며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다스리지 않으면 고난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우리는 고난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까?

 

 

 

시편 22편의 시인처럼 평소 고통을 겪을 때, 그때의 모든 상황과 마음을 수시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남에게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 수시로 기도하면서 아뢰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항의와 분노가 되어도 좋습니다. 고난으로 깨어지는 감정을 계속 아뢰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고통당하는 그들을 다시 보는 눈을 열어 주시면 그들을 다시 보고,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는 것,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함께 우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나를 다시 만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고통을 통해 더 또렷하게 들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되, 더 자주 더 깊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보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버리심으로 더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드셨고

지금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우리는 고난의 바다를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됨으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파도치는 갈릴리 바다를 예수님만 바라볼 때 걸어갈 수 있었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면 ,고통의 파도가 이는 인생의 바다를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를 함께 부르십시다

 

   <2024년 8월 18일  주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