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 1:1~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 답을 낳고 아미다 납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몽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5~17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마산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예수님입니다.
죄와 타락으로 흘러가던 인간의 오랜 역사가 구원을 향하도록 결정적 터닝 포인트를 만드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주전과 주후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반드시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또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은 더 바르고 확실히 알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려면 예수님을 여러 면에서 봐야 하는데
신약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일생을 네 각도에서 보게 합니다.
드론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면, 평소 앞과 옆에서 찍은 사진들을 통해서 보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되듯이, 예수님도 여러 측면에서 봐야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알려면 예수님이 사셨던 역사적 상황을 봐야 하고
일세기 유대 상황 속에서 볼 때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당대의 역사에 관한 지식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에서 종말까지의 긴 역사, 즉 구원역사 속에 두고 봐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이전에 몰랐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 예수님이 왜 중요한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헤롯이 왕으로 있을 때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 시의 역사적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때는 “유대 왕 헤롯 때”(눅 1:5)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이 왕으로 다스리던 때,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그때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 당시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던 유대는, 독립국가가 아닌 로마의 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헤롯왕도 유대가 아닌 , 로마가 세운 왕이었으며, 유대 혈통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헤롯이 왕으로 다스리던 당시 분위기를 알려면 좀 더 이전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이 있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윗이 통일왕국을 세워 전성기를 누렸지만
솔로몬 왕 때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후 점점 쇠퇴하다가,
북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남유대도 바벨론에 포로가 됩니다.
남유대는 70년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 성전마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란 시리아 왕에 의해서 모독을 당하고 심히 훼손됩니다.
이때 유다 마카비 가문이 3년간 게릴라 전을 벌여 마침내 성전을 수복하게 되고,
이 승리로 그들이 왕이 되고 하스몬 왕조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 왕조도 곧 타락하고 부패하면서, 얼마 가지 못해 로마에 의해 망하고
이후 로마를 도운 이두매 사람 헤롯이 로마에 의해서 유대 왕으로 임명됩니다.
로마의 꼭두각시였던 그는 정통성이 없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재건했고(헤롯 성전),
아내와 가족을 살해하기도 하고,
유대의 왕이 탄생했다는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아기 예수와 비슷한 연령의 아이들까지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당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존중의 호칭이 아니라, 유대의 왕도 왕이냐는 투의 냉소적 의미로 사용될 정도로
헤롯은 백성들의 마음에 드는 왕이 아니었기에 ,
모두들 , 모세나 다윗 같은 왕을 고대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아구 스도가 천하를 다스릴 때
또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는 로마(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천하를 다스릴 때였습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 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 2:1)
여기에 나오는 ‘천하’란 당시의 지중해 전역입니다.
그가 온 천하를 다스리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보면.
당시 지중해 전역이 전쟁과 혼돈 속에 있었을 그때 로마는 공화정이었고
견제와 균형이 제도화되어 누구도 절대 권력을 쥘 수 없었던 제도였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틀을 깨고 자신이 절대권력을 손에 쥡니다.
그의 성 카이사르가 왕의 칭호가 될 정도로 강력한 일인자가 됩니다.
(알다시피 독일어 ‘카이저,’ 러시아 ‘차르’도 다 카이사르란 뜻입니다.)
이렇게 변방의 군사 영웅이었던 카이사르가 이 위치에 오르자
공화정을 신봉했던 이들이 그를 암살하여 로마는 유혈 내전에 빠지게 되어,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권력을 잡고 자신의 양부 율리우스를 신으로 선언하고,
자신에게는 ‘숭배를 받아야 할 존엄한 자’란 뜻인 ‘아우구스투스’란 호칭을 붙이고
“폰티 팩스 막시무스”
즉 라틴어로 “대제사장”이란 이름도 덧붙이면서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로마 궁중 시인들과 사관들은
아우구스투스에 이르러 천년의 로마의 이야기가 위대한 절정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온 세계가 비로소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면서,
그의 이야기를 하나의 위대한 신화가 되게 만듭니다.
그는 여러 왕들 중의 한 명이 아닌 ,
그의 존재와 탄생이 곧 온 세상에 비로소 평화와 구원을 가져온 기쁜 소식이요
복음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선전합니다.
이렇게 신이 된 황제가 온 천하에 내린 호적령은
단순한 인구통계의 의미를 넘어 제국 내의 모든 인간이 그의 소유란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이 중의 한 사람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왕, 평화, 나라, 복음의 의미가 아구 스도를 중심으로 오용되고 왜곡되고 고착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아구 스도가 호적령을 내렸을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 뱃속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던 태중의 아기였는데,
헤롯이 유대 땅을 다스리던 그때, 예수님은 여행 중에 어느 집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헤롯에 의해 살해의 위협을 받아 애굽까지 피신해야 했고
로마의 변방에 살았던 피지배국 신민이었고,
나중에는 나사렛이란 변방에 사시다가 로마에 의해 십자가 형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 이후 2천 년이 지난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혜를 가르친 스승,
혹은 그 시대를 개혁하려다가 십자가형을 당한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탄생하신 예수님의 전부가 아님을, 사복음서의 탄생 기록을 통해서 더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탄생 시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 창조, 타락, 구원의 가장 큰 역사의 맥락에서 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
마가복음은... 이런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막 1:2).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오심을 준비하는 이, 세례 요한을 먼저 보냈고,
그가 오는 것을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우연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일이란 의미입니다.
그분의 탄생한 지역도 그렇습니다.
아구 스도의 호적령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내려가게 되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되었지만,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오래된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서 5:2; 마태 2:6).
예수님의 탄생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팔복교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님의 탄생이 미리 예언되고 약속된 것이었는데, 그 예언은 어떤 내용입니까?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알려줍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태 1:1-2)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먼저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은 그의 후손들이 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출애굽 역사, 받은 율법, 절기를 담은 구약성경은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통로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려주려면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와야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후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한 지상의 나라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모습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나타날 것인데, 그 후손이 예수님입니다.
마태의 족보에 기록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조상들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명,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 14명,
바벨론 포로부터 예수님까지 14명, 이렇게 14명씩 기록한 것이 매우 특징적입니다.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태 1:17).
이렇게 14명씩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자음을 숫자로 사용했는데, 다윗이란 이름의 히브리어 자음에 숫자 값을 부여하면 14가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그 후손인 참된 왕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의 왕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족보는 남자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 족보에는 네 명의 여자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당시 여자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두 명이 이방 여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바로 라합과 룻입니다. 그런데 밧세바의 경우 밧세바란 이름 대신 ‘우리야의 아내’라고 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는 유대인이 아닌 헷 사람, 즉 히타이트 족속인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족보 속에 이방 여인과 이방 남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이를 통해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은 ,
이스라엘만의 왕이 아닌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한 온 세상의 왕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내용이 이 족보의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 1:16).
보통 족보라면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요셉에게서 예수가 나셨다로 끝나야 하지만,
여기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되어 있고,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아들로서 다윗의 혈통임을 알게 해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로서 다윗의 후손이란 육신적 혈통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암시하여 줍니다.
즉 예수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약속,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따라 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즉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면서,
또한 마리아의 아들, 즉 성령으로 잉태한 ‘그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독특한 이중적 근원을 가지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특별한 분입니다.
둘째 아담
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다른 면을 보게 해줍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기적적으로 아이를 잉태한 이야기,
이어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서 아이를 잉태한 이야기를 먼저 기록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남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과는 다른 분이심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3장에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 족보는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달리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지 않고 더 멀리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이 아닌 모든 인류와 관련짓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신 참 왕이시지만,
그보다 더 멀리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 참 아담이심을 알려줍니다.
즉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모든 아담의 후손을 회복시키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이시며,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 되신 분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입니다.
성육신
이렇게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
첫째 아담을 회복시키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이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을 더 깊은 차원에서 알게 해줍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 14).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후 세계를 법칙을 따라 움직이게 하신 후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세상에 관심도 없으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계의 일부로 계신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를 만드신 말씀이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하신 그 말씀, 혼돈을 생명의 질서로 만드신 그 말씀이
피조물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섬으로 창조의 질서가 깨어진 역사 속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창조의 질서를 회복시키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인간 족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겉모습만 볼뿐이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던 천군 천사는,
하늘에서 하나님에게 영광 땅에서는 평화란 찬송을 불렀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던 사탄은 예수님의 탄생을 막으려고 하늘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2:1-9).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봤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아기였고, 구유에서 탄생한 서민이었고,
헤롯과 아구 스도의 통치 아래 살았던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 역사적 맥락을 넘어, 창조, 타락, 구원이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보게 해 줍니다.
그러자 그분이 누구신지 더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을 성취하신 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신 분,
아담을 구원하는 둘째 아담으로 오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때가 차매”란 주님은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헤롯과 아구 스도가 통치하던 그 역사적 시점에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여자에게서 난 여자의 후손 인간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때에 탄생하시고, 왜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하며
왜 신성을 가지신 분이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까?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할 인간으로 탄생하신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량 하려면 그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대표자 자격으로 인간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구원하려면 인간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죄인인 인간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려면 하나님이시고 의인이셔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은 어느 인간이 할 수 없고, 오직 여자의 후손으로 탄생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 17:3)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살면서 만나고 알아갈수록 놀라는 소수가 있지만, 알수록 실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수록 더 놀라고 더 경탄합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참된 나를 만나고, 세상을 바르게 보고 하나님 나라를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알고 만나려고 하지만, 누구를 참으로 알고 만나려고 해야 할까요?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 잠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 폰 시대에는 우리의 관심이 넓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관심이 너무나 분산되어 꼭 알 필요가 없는 것까지 알려고 하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분을 알려고 힘쓰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관심을 단순화하고 집중해서 예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려고 합시다.
현실 물질세계를 알아가고 가상세계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앎으로서만 열리는 영의 세계, 은혜의 세계, 하나님 나라를 보기를 원합니다.
머리로만이 아닌 가슴으로 체험적으로 알기를 원합니다.
더욱더 예수님을 알고 체험하고 동행함으로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2월 6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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