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계시록12)

왕언니 2022. 1. 13. 15:35

15:1-4,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원수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 하리이 다하더라 

16:10-16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일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가장 깊은 원인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금년도 코로나에서 시작해서 코로나로 마친 것 같습니다.

 

한 해의 수많은 일들과 어려움은 코로나가 주된 원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코로나가 한 해의 모든 일의 변수가 아닌 상수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일어난 원인이 있습니다.

표면적 원인도 있겠지만, 깊은 원인은 인간이 넘지 말아야 생태계의 경계를 넘은 것이고 

이렇게 생태계의 경계를 넘게 된 원인은 또 더 깊은 , 인간 속에 있는 탐욕이라고 봅니다.

 

몸이 여기 저기 아픈 증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원인이 있는데

이때 드러나지 않은 깊은 원인을 찾아야 치료가 됩니다.

이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증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일곱 인, 일곱 나팔 심판, 일곱 대접의 재앙을 봅니다.

이런 재앙들은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됨으로 생기는 증상인데

이런 증상이 있다면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겪는 재앙적 상황들, 자연재난, 전쟁, 인간의 악해짐, 깨어지는 가정,

이런 증상들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문제만 말고 그 깊은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의 심판과 깊은 원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에 이어 드디어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임하는데

일곱 대접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계 15:3).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가 있고 그 곁에서 모세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내렸고,

드디어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불이 섞인 유리 바다인 홍해를 건너고,

그 바다 가에서 미리암이 지은 가사를 따라 노래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대접 재앙 전에 왜 이 장면을 보여주실까요?

일곱 대접 재앙과 애굽에서 임한 심판과 어떤 연결, 유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애굽, 바벨론이란 이름은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나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부르는 대명사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이제 바벨론이란 세상에 일곱 가지 재앙이 내릴 것인데,

이것은 과거 애굽이란 세상에 내린 열 가지 재앙과 성격이 기본적으로 같으니,

애굽 재앙의 원인을 상기함으로, 임하게 될 일곱 대접 심판이 왜 오는지를 알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애굽 심판의 이유는 애굽이 포악한 제국이었기 때문이거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던 까닭이 없지 않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우리 민족을 왜 힘들게 하느냐, 왜 고통을 주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5:3)

제사를 드리는 것, 즉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바로를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하게 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예배할) 것이니라”(출 8:20, 5:1, 7:16, 8:1, 9:13, 10:3).

무려 6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합니다.

 

애굽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애굽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를 그냥 자기가 믿는 종교를 따라서 정해진 시간에 참석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배는 삶의 여러 영역들 중의 한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예배의 대상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자기를 바친다는 의미로

그 대상의 말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머리와 손등에 인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신이 말하는 것을 머리에 담고 그 신이 말하는 것을 따라 손을 행하며 사는 것,

그 믿음과 행함이 곧 예배입니다.  그것이 백성들의 삶을 만듭니다.

 

이렇게 예배의 대상이 잘못되면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애굽에서는 바로 왕을, 여러 우상들을 신으로 숭배했기에 벗어나야 할 애굽이 된 것입니다,

 

마치 수직선이 잘못되면 모든 수평선이 잘못되고,

차의 방향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듯이,

예배의 대상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애굽에서 나오라고 한 것은 애굽이란 땅이 좋지 않아서 나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예배의 대상을 바른 대상으로 보고 믿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들은 예배의 대상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문화에 오래 지내다 보니

출애굽 이후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경배하려고 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예배의 대상을 잘못 알고 그것을 추구하면

결국 그곳은 재앙과 심판이 임하는 땅, 벗어나야 할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 후에 하려고 했던 과제는 사실 한 가지,

그들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시내산 율법을 통해서 예배의 대상이 누구신지 바로 알게 하고,

성막과 제사장을 세워서 그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가나안 땅에서 약속하신 나라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타락 사건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닌 삶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가 비뚤어졌습니다.

 

무엇이 삶 전체를 무너지게 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것이었습니다.

금지된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꾸자, 그들이 하나님처럼 숭배한 것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결국 에덴을 상실한 것입니다. 즉 에덴의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과 깊은 원인

 

이제 일곱 대접 심판이 전개되는데, 바벨론이란 세상에 심판이 임하는데

이 재앙의 의미를 출애굽 사건에서 찾게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째 재앙이 임하자,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악한 종기가 납니다.

애굽에서 일어난 재앙과 흡사합니다.

둘째 재앙은 바다 생물이 죽는 재앙입니다.

나팔 재앙에서는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다면,

대접 재앙에서는 바다 전체가 피로 바뀌면서 범위가 넓어집니다.

셋째는 강과 물의 근원이 오염되는 재앙입니다.

넷째 재앙은 지구의 기온이 매우 올라가는 재앙입니다.

 

이런 재앙들이 몸의 질병들로, 바다와 강물의 오염으로, 대기 온난화로 나타납니다.

 

애굽의 바로가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그 원인을 모르고 계속 거역했던 것처럼,

몸과 자연에 일어나는 재앙들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잘못함으로 일어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돌이키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인간과 자연에 심판의 대접이 내린 후, 짐승의 왕좌에 심판의 대접이 쏟아집니다.

그러자 적 그리스도가 지배했던 나라가 암흑처럼 됩니다.

애굽에 내린 암흑 재앙과 비슷합니다.

 

 

여섯째 대접이 큰 강인 유브라데에 쏟아집니다.

유브라데 강은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의 자연 경계선 역할을 했는데

동쪽의 적들이 로마로 진입을 막는 자연장애물이었고,

바벨론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 강이 마르게 되어 전쟁의 조건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준비되었다고 꼭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영토에서 살면 되지만, 이때가 정복하고 탈취할 때라고 땅의 왕들이 생각하고

수많은 왕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세 영들, 용과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넣은 준 것입니다.

이들이 계속 말을 하여 머리에 넣고 손으로 행하게 하는데,

그 영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개구리 소리에 비유합니다.

그 소리는 속임과 미혹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세상의 왕들이 아마겟돈이란 곳에 모입니다.

(아마겟돈은 이스라엘이 이방과 싸웠던 고대의 전쟁터 므깃도에서 온 말로. 전쟁터를 상징)

이곳에 폭력과 칼이란 사탄의 무기를 들고 모입니다.

19장에 가면 그들이 어린양과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자, 번개와 우렛소리가 나고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 지진은 유사 이래로 없었던 지진이고 도시의 땅이 쩍쩍 갈라지고 도시가 무너집니다.

이런 묘사는 핵폭탄이 떨어지면 일어나는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우상의 시대

 

이런 대접 재앙이 바벨론이란 세상에 일어나고 있고 또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출애굽이란 렌즈로 보면 깊은 원인이 보입니다.

애굽이란 세상의 깊은 문제는 예배의 문제였는데,

애굽처럼 심판을 받게 될 바벨론의 근원적 문제도 역시 예배의 문제,

예배의 대상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시대는 무엇을 예배하고 있을까요?

톰 라이트란 학자는 <우상의 시대>란 책에서 우리 사회가 세 가지 신을 예배한다고 했습니다.

그 신은 마르스, 맘몬, 아프로디테입니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자기에게 붙입니다.

 

마르스는 전쟁의 신으로 지금도 이 신은 강력하게 우리의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전쟁과 정복이 길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이들은, 전쟁의 신 마르스를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 전쟁의 신 앞에 난민의 위태한 삶을, 인권 유린과 약한 자의 고통을 제물로 갖다 바칩니다.

권력을 준다는 신의 약속을 믿고 계속 그런 제물을 갖다 바치면서 마르스 신을 숭배합니다.

권력을 잡을 수 있다면 부정, 음모, 술수, 거짓말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

여론을 조작하고 닥치고 정권! 이런 대선판을 만드는 이들 역시 마르스 신 숭배자들입니다.

 

이런 마르스 신의 숭배는 맘몬 신의 숭배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맘몬은 돈의 신입니다. 권력자와 이권은 늘 같이 붙어 다닙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와 무기 제조업자는 같이 공생합니다.

미국이 총기 사고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도 총기법을 잘 고치지 못하는 것은총기 업자들의 로비 때문입니다.

결국 맘몬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맘몬은 더 많은 물질을 주겠으니 가족도 친구관계도 가난한 이들의 한숨과 눈물을 제물로 갖다 바치게 합니다.

평범한 일은 하찮게 여겨고 돈만 유일한 목표가 됩니다.

퓨리서치센터에서 세계 선진국 17개의 국민들에게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1위가 가족 2위가 직업 3위가 물질적 풍요였습니다.

 

그런데 한국만이 1위가 물질, 2위가 건강, 3위가 가족이었습니다.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이 보여주는 사회가 왜 한국의 모습이 되었습니까?

무엇을 숭배하느냐가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닐까요?

 

세 번째가 성애의 여신 아프로디테입니다. 라틴어로 비너스라고 합니다.

에로티시즘은 하나님이 주신 성을, 만병통치약으로 삶의 목적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신문, 잡지, 인터넷, 영상들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메시지를 계속 쉬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광고판은 그 메시지로 우리 얼굴을 강타합니다.

이렇게 여신 아프로디테는 행복과 황홀한 기쁨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들은 다 지켜지지 않아서 아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아프로디테에게 시간, 돈, 가족 관계까지 바칩니다.

때로는 태어나지 못한 아이란 생명까지도 바치면서 숭배합니다.

 

 

바벨론은 대접 재앙, 자연, 몸, 관계, 전쟁 등의 증상들이 나타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는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어린양 예수님 대신에 마르스, 맘몬, 아프로디테를 신으로 숭배하며

그 신들의 표를 이미 와 손목에 받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원인이 재앙이란 증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

이런 세상에 결국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자,

그 우상이 재앙의 원인임에도 여전히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과

우상의 실체를 알고 어린양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전자는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뉴스들의 깊은 원인이 권력과 돈과 성을 신으로 숭배함으로 생기는 일인데,

이런 재앙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이 숭배하는 신들을 더 숭배합니다.

애굽에 재앙이 임할 때 바로는 그들의 신을 더 숭배했듯

바벨론의 세상에서도 여러 재앙이 임해도

예배의 대상이 잘못됨을 알고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그 신을 숭배합니다.

 

마르스 숭배가 만드는 온갖 전쟁을 보면서도, 맘몬 숭배가 만드는 온갖 고통과 비인간화의 결과를 보면서도

아프로디테 숭배가 가정과 관계를 무참히 파괴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의 눈에 다 드러나고 있어도 자신이 옷을 벗고 있는지를 모르고 삽니다.

 

후자는 의의 옷을 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바벨론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의 증세를 보면서 그 원인을 압니다.

그래도 어린양 예수를 섬깁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주님은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도둑 같이 온다는 것은 깨어 있지 않으면 모른다는 의미요,

“오리니”란 동사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주님은 과거에도 오셨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아는 사람은 알았습니다.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현재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여러 사건으로,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아는 사람은 압니다.

 

주님은 지금 예배시간에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여러 상황을 통해서 오시어 의의 옷을 입고 살게 하십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여러 죄악들, 재앙이란 증상을 만드는 깊은 원인,

그 뒤에 있는 세 가지 우상의 실체를 보게 하시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게 하십니다.

 

전쟁과 폭력과 무기를 숭배하는 세상에서, 평화와 진실의 어린양을 따름으로 예수님을 예배하게 하십니다.

맘몬이 나쁜 주인이 되어 사람의 마음과 삶의 전체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세상 속에서,

맘몬을 종으로 삼는 청지기적 자세를 가지게 함으로 맘몬의 땅에서 어린 양 예수를 예배하게 합니다.

아프로디테가 성이 상품으로 만들고 성의 의미를 변질시킴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세상에서

기독교적 결혼관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이 주신 남성성과 여성성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고 살아가게 함으로

어린 양 예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핵심이고,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회의 운명을, 개인의 운명을, 영원의 운명을, 바꿔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형으로 계속 오셔서 정말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지 알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예배한다고 하지만 사실 예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말 중요한 목표는 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의 대상에게 바르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자가 되면 지금 여기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예배가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들고 회복시킵니다.

개인만이 아닌 가정과 사회를 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의 대상을 상실한 우상의 시대에서 참 예배자가 됩시다.

건성으로 예배하는 시대에 정성을 다해 온전히 주님을 예배합시다.

 

비대면 상황이라도 예배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사는 참 예배자가 됩시다.

그래서 온전한 예배자가 됨으로 예배가 주는 승리를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기를,

바벨론 세상을 살아갈 힘과 은혜를 받아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2월26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