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역사의 중심
금년이 서기 2022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 연도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고
당대에서는 대단했으나 지금은 기억조차 되지 않은 존재들이 대부분이지만,
예수님은 역사를 BC와 AD로 나눌 정도로 역사에서 중요한 분이며
예수님의 33년 짧은 일생만큼, 크고 항구적인 영향을 준 인물도, 비교할 대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만적인 세상을 바꾸시고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세상이 가야 할 바른 방향을 알려주신,
2천 년을 통틀어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분이십니다.
모든 선한 것에는 예수님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2천 년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이유는,
탄생 이후 2천년 간 그분이 끼친 놀라운 영향 때문만이 아니고
사실 예수님 이전의 긴 역사 속에서 끼친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더욱 중요하신 분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님 이전 역사가 어떤지 잘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와 인간은 언젠가 시작된 것은 분명한데,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고,
모든 것은 물질로 해석하여, 물질이 전부요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적자생존을 통해서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적이나 약속이 없습니다.
이것을 유물론적 환원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안에 목적이 있으며, 인간이 타락함으로 혼돈이 왔지만, 그대로 두지 않고 회복시키시려고 합니다.
그 인간의 회복을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 이래 가장 오래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창조에서 시작되어 구원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완성됩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며 창조된 세계가,
보시기에 좋지 않게 바뀌었다가, 다시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모습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예수님 이후 이천 년 역사만이 아닌 ,예수님 이전의 더 긴 역사에서는 더욱 중요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예수님 이전과 이후의 역사에서 중심이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분은 아무도 없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창문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를 바르게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지만..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육신의 눈으로도 이성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한 14:9).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영적 창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을 바르게 보게 하십니다.
탁월한 스승을 안다는 것은 , 그 스승의 학문을 통해서 세상을 새롭고 깊게 바르게 보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해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된 세상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다 같은 세상을 산다고 하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해석이 다르면 다르게 살게 됩니다.
세계를 물질현상으로만 보느냐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느냐,
인간을 물질현상으로 보느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태 6:22).
예수님과 그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로 보게 하는 바른 눈이 됩니다.
뉴비긴이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바라볼 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하는 책이다.”(레슬리 뉴비긴)
예수님과 그 말씀인 성경은 세상을 바르게 보게 하는 태양 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
정보의 시대에서 우리는 정보를 보고 듣고 소비하는데,
그 정보들은 객관적 정보가 아닌 어떤 관점으로 해석된 정보들입니다.
그 속에는 세상에 대한 해석과 관점이 들어 있어서 그 정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므로 정보를 통해서 생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각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눈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로마서 12:2).
여기서 ‘마음’은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 즉 관점이고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바른 눈을 갖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바로 보고 알 수 있게 합니다.
유명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즉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거의 모두가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갖가지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중 어느 것이 먼저 오며,
또 어느 것이 그 뒤에 결과로 따라오는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칼빈, <기독교강요>)
우리는 우리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 그 지식이 참된 지식일까요?
우리를 바로 알려면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바른 거울이 필요합니다.
늘 보는 자기 기대란 거울, 세상의 기준이란 거울, 욕망의 거울들은 참된 우리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 깨어지고 왜곡된 거울에 비췬 모습이 참된 우리가 아닙니다.
참 거울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란 거울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우리를 바로 아는데
그 거울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속에 인간의 창조된 본래 모습이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참 모습이란 거울을 통해서 내가 어떤 모습인지를 바로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거울을 통해서 내가 어떤 죄인이며 또한 어떤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거울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없고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죄인이면서 의인인 나, 흙이면서 하나님의 형상인 나,
파스칼의 말처럼 가장 비천하면서 가장 존귀한 나를 예수님을 통해서 바로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세상을, 나를, 바로 보게 해주는 눈이요 창문이기에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으로서 살다가 그렇게 죽고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의인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려면
갈망과 지식
이렇게 중요한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에 알려는 갈망이 부족합니다.
삶에서 물과 공기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덜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덜 중요한 것들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정보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시로 스마트 폰을 보지만,
예수님을 더 알려고 성경을 펼치는 것에는 그 정도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보를 통해 열리는 세계와 예수님을 통해 열리는 영적 세계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또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익숙함이 예수님을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는 ‘은혜’란 단어를 많이 듣고 너무 익숙하여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그 은혜에 관해서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란 분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란 책을 썼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였던 그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예수님에 대한 책을 쓰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점에 대해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너무 친숙해져서 알아볼 수 없는 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을 전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보적 교회는 인간이신 예수님만, 보수적 교회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 전합니다.
필리핀과 같은 카톨릭 국가를 가보면 예수님은 주로 마리아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로 보면서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고정관념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곳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어떤 곳은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 예수님만 강조합니다.
“한 사람이 온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라는 시구도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33년의 일생을 전체로 봐야 예수님을 잘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33년의 짧은 생애를 , 창조 타락 구원의 큰 이야기 속에서 두고 봐야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지를 더욱 잘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창조와 구원의 가장 큰 이야기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데오빌로와 누가
바로 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하려고
누가가 데오빌로란 사람에게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 승천까지의 기록을 써 보냈던 글이 누가복음인데,
데오빌로란 사람은 누가가 각하라고 부른 것을 봐서 기독교로 입문한 로마 관료인 것 같습니다.
또 ‘데오빌로’란 이름이 하나님이란 ‘데오’와 좋아하다는 ‘필로’가 합쳐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의미임을 봐서
그는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예수님을 알려는 갈망이 많았던 것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 사회와 달리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서로 평등하게 형제로서 만나는 교회 공동체를 보면서
교회에 대해 알고 싶은 열심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태동부터 전파의 내용을 기록해서 보낸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려면 데오빌로처럼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과 갈망과 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 고관이었기에 피지배국인 백성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그가
우월의식을 내려 놓고, 또 로마 문화에 익숙한 그가 그 틀을 깨뜨리는 용기를 갖기도 했습니다.
“공부는 망치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공부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과정입니다.
기존의 틀을 깨뜨려야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데오빌로는 로마의 관점에 묶이지 않음으로 예수님을 새롭게 보는 앎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로 알려면 누가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전체로 알려줘야 합니다.
누가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3).
당시 예수님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도들을 통해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들도 있었고 짧은 글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었지만,
누가는 그것들을 다 모아 탄생부터 부활까지를 차례대로 정리해서 씀으로,
퍼즐조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완성된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데오빌로의 갈망과, 예수님을 전체적으로 알려주는 누가의 헌신이 서로 만난 것입니다.
열망이 있어도 지식이 없거나 지식이 있어도 열망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알려고 하는 열정과 바르게 알려주는 지식이 만나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편에서 알려는 갈망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차례대로 전체로 보여주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려는 열심과 예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만나면 반드시 변화와 회복을 만들어 냅니다.
박완서 작가가 쓴 “시를 읽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상심하고 상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박완서 <시를 읽는다>)
사람마다 상심하고 상심할 때가 있습니다. 왜 사는지 모를 때가 있고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등 따습고 배불러지면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시를 읽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글의 맛을 아는 분이니 시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데오빌로는 로마 고관이었으니 당시 호머, 키케로의 글을 읽었을 수도,
아니면 연회에 참석하여 술을 마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무엇을 합니까? 사람에 따라 그럴 때 도움을 얻는 방편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경우에 참된 답은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에 대한 진정한 답이 되십니다.
송명희 시인이 이러한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예수 그 이름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송명희)
그 엄청난 장애란 격한 파도 속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 파도를 밟고 가게 한 비밀이 예수님 이름 속의 비밀입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찬송하며 고난의 파도를 딛고 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에게 모든 상황 속의 참된 답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면 상심을 이기고, 예수님을 알면 정신이 번쩍 들고 깨어 살게 되고,
예수님을 바로 알면 나이가 들어도 쓸쓸함을 이기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한 명의 데오빌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이 정말 더 잘 알려는 열망이 있습니까?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기에 잘 알고 있다고 여기지 말고,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예수님을 새롭게 처음부터 바르게 알려는 각오가 있습니까?
예수님에 관한 부분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알려는 간절함,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차원에 머물지 말고 체험적으로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지난 번에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오실 예수님을 봤다면 다음 주부터 복음서를 중심으로
오신 예수님 탄생부터 부활까지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성경의 바른 설명이 만남으로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2년 1월 30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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