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2:1~6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스며 부르짖더라
하늘에 도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게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3:11~18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하는데
첫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의 오심을 막고 저항하는 악한 사탄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람과 바이러스의 전쟁이 있고, 사람들 간의 분쟁과 싸움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입니다.
원래 사탄은 하나님과 싸움의 대상이 아닌데, 인간이 타락하여 사탄의 종이 되면서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사탄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사이에 영적 전쟁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전쟁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에게 속한 생각과, 사탄에게 속한 생각 사이의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고, 교회 안에도 세상에도 늘 전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사탄의 방해의 전투와 충돌이 있습니다.
두 장면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봐야하고, 어린 양과 일곱 영인 성령을 봐야 합니다.
계시록은 영적 전투 중인 7교회에게 먼저 그것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보되 한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와 그분의 통치를 계속 반복해서 봐야 합니다.
늘 그분에게 시선이 가야 하는데, 예배가 그것을 가능 하게 해주므로, 예배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매일 가정에서, 매주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탄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악은 그냥 가만히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려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악한 자’이기 때문에,
그 악한 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를 시험할지 모르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악한 자의 정체는 쉽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 세상 무엇으로도 잘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특히 계시록이 악의 정체를 잘 볼 수 있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7교회에게 영적 전투에서 이기도록 적의 정체를 알게 하십니다.
악한 자의 정체를 알라.
용, 사탄
먼저 악한 자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악한 자는 용이란 상징으로 등장하는 사탄입니다.
일곱 째 나팔을 불고 대접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하늘의 전쟁을 보게 하는데 그 속에 원수 사탄이 있습니다.
한 여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녀는 밝은 해를 옷처럼 입고,
발 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해산하려고 합니다. 이 여자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이는 그 백성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입니다.
구약의 백성을 통해 여러 과정을 거쳐 메시아가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그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할까요?
그가 오기를 막으려는 다른 세력, 막으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흉측한 진홍색의 용으로 하늘을 날다가 일곱개의 머리를 들이대고
여자가 아기가 낳으면 바로 삼키려고 합니다.
꼬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여자에게 다가오는데, 그 꼬리에 의해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이 땅에 던져집니다.
하늘의 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데,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 그를 탄생시킬 백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애굽의 장자 살해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용은 왜 태어날 아이를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탄의 일을 멸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입니다"(요일 3:8, 새번역).
그러면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원래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입니다.
에덴에서부터 그는 아담을 속였고, 하나님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을 속여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날 에덴에서의 뱀이었기에 ‘옛 뱀’이라고 불립니다.
또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 12:10)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계속 하나님 앞에서 고발합니다.
당신의 공의를 따르면 이런 죄는 당연히 사망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서 심판관이신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그런데 태어날 아이는 “만국을 다스리실 분”(계 12:5)입니다.
사탄이 속임수와 참소함으로 인간과 만국을 망가뜨리고 있고 자기 왕국으로 삼고 있는데
이 아이가 그 만국을 다스리는 왕으로 와서, 용의 속임수를 진리로 고치고,
용의 참소를 용서로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여 인간과 만국을 다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삼키려고 했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 12:5).
그 아이는 구출되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탄의 공격에서 건짐을 받아 올림을 받았다는 이 한 구절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다 담고 있는 한 장의 스냅 사진입니다.
우리는 이 한 구절 속에 압축된 예수님의 생애를 풀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헤롯 왕이 예수님 또래의 많은 아이들을 죽였고,
장성했을 때는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가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용은 아기 때에는 죽이지 못했지만, 결국 죽였습니다.
마귀는 기어코 그 아이를 죽였고, 이제 이겼다고 자축했습니다.
그리고 삼 일이 지나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십니다. 분명히 죽였는데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닌,
자기 안에 인류의 죄를 품고 죽으신, 속죄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마귀가 인간을 고소하고 지배할 근거가 되는 죄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결국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그것이 도리어 마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웬일이냐, 너, 아침의 아들, 새벽 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이사야 14:12, 새번역)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복음 10:18)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습니다.
베들레헴 구유에서 탄생하시고 목자와 동방박사가 방문하는 이야기,
헤롯이 죽이려고 하자 애굽으로 피신가는 이야기, 이것이 땅에서 본 탄생 이야기입니다.
탄생과 관련한 더 깊은 하늘에서 본 이야기는,
태초의 말씀이 성육신하셨다는 요한복음의 이야기요,
그를 죽이려는 용이 있었다는 요한계시록의 이야기입니다.
아기를 죽임으로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패함으로 용이 땅으로 내쫓깁니다.
먹이를 놓친 그 용은 분노하면서 아이 대신 여자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는 구약의 교회요, 아이를 낳은 여자는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 여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입니다.
바다의 짐승
그런데 아이를 낳은 여자인 교회를 공격할 때 용이 바다와 땅에서 두 짐승을 불러냅니다.
먼저 바다에서 한 짐승을 불러는데, 그는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고 열 왕관을 썼습니다.
뿔은 권력, 왕관은 통치를 의미하니까,
열 뿔과 열 왕관을 가진 이 짐승은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게다가 외모는 표범과 곰과 사자의 부위를 합쳐 놓은 기괴한 모습입니다.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할 수 있는 힘과 모습을 가진 짐승입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이 짐승은 교회를 박해하는 불의한 권력, 정권, 국가 들을 포함한 존재인데,
이를 적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공평과 온유와 겸손으로 다스리지만,
적 그리스도는 공포와 폭력으로 지배하며 성도들을 심히 박해합니다.
일찍이 로마에서부터 수많은 성도들을 악한 권력으로 죽였고 이후 수많은 악한 권력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폭력적 세상 속에서 살면서, 교회도 힘의 방식을 쓰려고 하면
바다의 짐승의 길을 가게 하여 교회의 본질을 잃게 함으로 공격합니다.
13장 7절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계 13:7)란 구절은
폭력과 공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했던 적 그리스도입니다.
땅의 짐승
용은 또 한 마리 짐승을 땅에서 올라오게 합니다. 그 모습이 이렇습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 13:11)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합니다. 순하고 선한 모습으로 보이고, 하는 말이 신의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그는 기적을 행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같습니다.
사람들은 양 같은 외모에 속고, 신의 말 같은 말에 속아서, 그가 절하게 한 우상에게 경배합니다.
그리고 이마와 오른 손에 주는 표를 받습니다.
로마 황제 신상에 경배할 때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손으로 예를 표합니다.
이런 제의는 자신이 황제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황제는 그렇게 한 사람에게는 경제 활동의 득을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황제가 참으로 주님이라는 생각을 머리에 새겨 넣는 것이고,
그 생각을 따라 손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악의 삼위일체
이처럼 용과, 바다짐승과, 땅 짐승이 교회와 성도를 공격합니다.
사탄과 악한 권력과 거짓된 종교가 악의 삼위일체가 되어 이 땅에서 여자인 성도들과 교회를 삼중으로 공격합니다.
참소하고 핍박하고, 속이는 방식으로 계속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상하지 않은것은 ,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이러한 싸움은 이미 창세기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그리고 바울 사도도 신앙생활은 영적 전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싸움의 대상이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이런 공격이 있다면 누가 무슨 능력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와 말씀
계시록은 우리에게 악한 자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용, 바다 짐승과 땅의 짐승, 즉 사탄과 악한 권력과 거짓 종교입니다.
보면 두려움을 갖게 되고 우리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급소가 있습니다. 그들을 이기는 무기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씨름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엡 6:12)하기 때문에
악한 영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의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합니다.
영적 공격을 인간적인 도구로 숫자나 물량으로 인간적인 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영적 무기만이 이기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 영적 무기 세 가지를 말합니다.
용은 누구입니까? 속이는 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에 관해서 속임으로,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삶과 죽음과 세상과 인간을 생각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죄에 빠져들게 합니다.
또 용은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우리에게 죄를 근거로 심판을 요구하고, 자기의 통치 밑에서 살게 합니다.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계 12:11)
속이는 사탄을 이기는 무기는 ‘진리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의 시험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의 공격을 이기셨습니다.
배고픔, 가난, 욕망, 명예심, 탐욕 등으로 다양하게 공격할 때,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는 말씀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또 죄를 참소하고 고발할 때 무기는 어린 양의 피입니다.
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될 때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와의 교제를 늘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과 예수의 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인내와 믿음
또 바다의 짐승은 그 권력으로 핍박하고 위협하고 체포하고 박해하고 심지어 죽게도 합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로마 시대도 일제시대 지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핍박이 있고,
또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믿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계 13:10).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믿음, 고난 이후에 상급이 있다는 믿음,
이땅의 잠시 받는 환난과 영원한 영광은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함께 함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주시고 견디게 해주는 공동체를 주십니다..
분별
땅의 짐승은 어린 양처럼 속입니다. ‘어린 양 같은’ 모습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처럼 말합니다.
그리고는 우상을 하나님인 것처럼 믿게 하고 그것에 숭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숭배한 자에게는 표를 줍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신처럼 이마를 땅에 데고 절하는 것은 나는 황제가 보호하는 황제의 소유요,
황제는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준다는 생각을 머리에 갖는 것이고,
그것을 따라 손을 행하며 사는 것이 이마와 손에 표를 받는 참 의입니다.
이처럼 권력이나 물질이나 성을 숭배합니다. 이 역시 그 이마를 땅에 대면서 절하면서,
그것은 나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구원해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머리에 굳게 믿고 그것을 따라 손으로 행합니다.
이것이 그 숭배하는 신에게서 그 보장을 쓴 약속의 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말하는 신조를 믿고 그것을 따라 삽니다.
이렇게 볼 때 모두가 어떤 숭배하는 것이 주는 표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권력이나 물질이나 성의 우상에게서 받은 그 표,
그 속에 담긴 내용, 그것이 보장한다는 안전 행복이 정말 그렇다고 믿고 삽니다,
성경에서 7은 완전수요 신의 숫자이고 6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수입니다.
다들 그 표에 새겨진 그 숫자는 777의 숫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숫자요, 즉 그 내용은 확실한 것이고,
숭배하는 신이 신으로 지키고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표를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 표에 새겨진 숫자를 자세히 읽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숫자는 777이 아닌 666입니다. 신의 숫자가 아닌 인간의 숫자입니다.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8)
한 마디로 가짜입니다. 내가 신처럼 믿고 추구했던 것이 우상입니다.
가짜 표를 진짜 표처럼, 가짜 신을 진짜 신처럼 여기며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속임수를 이기는 길은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자세히 살피는 믿음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고난은 있지만 패배는 없다.
우리가 본 것처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한 자가 있습니다.
그 악한 자는 우리를 속임으로 핍박으로 유혹으로 공격합니다.
성탄 캐롤을 들으면 정말 푸근하고 행복한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악한 자와의 영적 전투이기에 고난이 없지 않습니다.
또 사탄의 공격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세상 속에 있습니다. 가정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의 사탄의 공격은 더 은밀합니다. 달콤하지만 말씀을 떠난 복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 대신 자기의 의를 드러내게도 하고 화평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탄의 공격이 있기에 땅에서의 신앙생활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러면 그 광야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됩니까?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여자는 교회를 말하는데, 교회가 사탄에 의해 공격을 받는 기간이1260일입니다.
달로 환산하면 42달입니다. 42달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42번 진을 옮겨 다녔던 사건과 연결됩니다.
42달 동안 광야에 있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와 같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광야에는 사탄의 공격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호와 도우심이 있습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지키십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도 있지만, 그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승리가 있습니다.
악의 삼위일체인 용과 두 짐승의 공격이 있지만,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동행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 돌아보면 교회에도 개인적으로도 여러 어려움과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악한 자의 공격이 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깨어 경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기도도 부족하고 영적 공격에 깨어 있지 못함으로
악한 자에게 헛점을 보이는 점은 아닌가 싶습니다.
공격하려는 적이 있는데도 경계하지 않고 초소를 비워두면 누가 이길 수 있습니까?
적의 정체를 모르거나 경히 여기면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더욱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경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동행하심을 더욱 붙들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래서 한편 경계하고 한편 주님을 바라보면서 지내면
그 광야의 42달 시간, 우리의 신앙여정, 그 기간은 어떻게 될까요?
고난은 있지만 결코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쓰러지지만 완전히 엎드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있으니 더욱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도록 합시다.
가정에서나 개인적인 일이나 교회 일에서 더욱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 개인적 예배를 통해서 주일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눈을 들어 더욱 간절히
더욱 자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분과 늘 연결되어 있도록 힘씁시다.
2021년 12월19일 주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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