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말씀의 단 맛을 알아야 고난의 쓴맛을 이긴다(계시록8)

왕언니 2022. 1. 1. 00:35

계시록 10:1~11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일곱우레가 말을 할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우레가 말한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두 가지 일

 

수많은 일들. 그러나 크게 보면 두 종류의 일들.

 

우리가 사는 시간에는 두 개의 일이 일어나는데 크게 분류해보면 ,

죄에 대한 심판과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가 만드는 결과들, 그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만드는 결과들이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보호하시는 것, 구원하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그 보호하심과 구원하심 때문에 우리는 이 죄의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안에는 구체적 인물이 거의 없고 ,

심판과 구원에 관한 대조적 두 원리의 상징과, 복잡한 세상의 본질을  추상화 하여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왕이냐?

 

요한계시록의 흐름을 다시 보면,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이 그곳에서 환상을 보는데, 하늘 보좌와 그곳에 앉으신 분을 보고

로마 황제가 숭배받는 황제의 땅에서  비로소  이땅을 통치하시는 참 왕을 본 것입니다.

 

누가 참 왕인가, 우리는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 

 요한은 로마 황제가 아닌,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예수님이 참 왕이며

그분이 통치하심을 알게 됩니다.

 

요한이 보니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 두루마리가 들려 있습니다.

봉인이 되어 있어 아무도 이것을 뗄 존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양이 그것을 받아 듭니다.

 

두루마리 책 속의 내용을 펼칠 존재는 누구인가?

역사의 주인이  로마 황제인가? 세상의 권력이고 물질인가? 어린 양 예수인가?

그들은 어린 양 예수님이 왕이시며 역사에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그 말씀으로 핍박의 상황을 이기며 삽니다.

우리도 혼돈의 세상을 살지만 우리의 눈이 열려 왕의 왕, 어린 양 예수님을 왕으로 알 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인과 기도

 

어린 양 예수님이 그 책을 들고 책의 인을 하나씩 떼자

한 마리의 말이 등장하고 차례로 네 마리 말들이 등장합니다.

각각은 세상에 일어나는 전쟁, 기근, 질병과 같은 재앙들입니다.

다섯째 인을 뗄 때 박해받고 고문당하는 이들의 장면이 나오고,

여섯째 인을 뗄 때 자연 재난이 일어납니다.

 

죄의 심판이 일어납니다. 왕들이 심판대 앉아서 심판하지만,

사실은 심판의 대상이요 심판자는 어린 양 예수님입니다.

 

또 일곱째 인을 떼면 그 다음 심판의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전에 다른 한 장면이 소개됩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 금향로에 담기는 장면입니다.

 

하늘로 올라간 기도가 마치 봉인을 뗀 편지처럼 하나님에게 전달되고,

그 기도의 응답이 불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봅니다.

죄의 심판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 살지만

죄로부터의 구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판의 나팔 소리와 구원의 외침 소리

 

드디어 일곱째 인을 뗍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차례로 나팔을 불기 시작합니다.

 

첫째 천사부터 넷째 천사가 나팔이 각각 불 때마다 땅, 바다, 강, 공기에 재앙이 임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에게 행한 죄가 다시 인간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자연 재앙들입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인간이 서로에게 고통이 되는 병든 사회의 모습,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인간이 서로 죽이는 거대한 전쟁의 모습,  인간이 만드는 인간 재앙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동시에 죄의 길을 갈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들로

죄의 길로 가면 결국 사망에 속한 현상들이 드러납니다.

그대로 두면 그 범위가 넓어지고 그 강도가 강화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계 9:20).

 

심판을 보면서도 그것이 죄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항합니다.

심판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강도가 더 강해져 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이 죄의 길로 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

그리고 회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의 우레 소리

 

일곱 인이 열리고,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차례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일곱 대접 심판의 전개됩니다. 더 넓고 강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이 불기 전에 다른 장면 하나를 보여줍니다.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성도의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 금향로에 담기는 장면을 보여준 것처럼,

일곱째 나팔을 불기 전에 또 다른 소리를 듣게 해주는데 

그 소리는 포효하는 사자의 소리와 같고 천둥 소리와 같습니다.

그 소리를 한 힘센 천사가 냅니다.

 

그 모습이 이렇습니다.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계 10:1-3).

 

그 모습은 계시록 1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주석과 같은데 이 모습을 닮은 큰 천사가 바다와 땅을 밟고 서서 외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온 초원에  울리는 사자의 포효소리처럼, 온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온 세상이 들어야 할 예수 구원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임하는 심판의 나팔소리만 들어서는 안되고

이와 다른 구원의 소리, 복음의 소리를 더 크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재앙과 인간재앙의 모습 속에서 심판의 나팔소리를  듣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보다 더 크게 구원의 우레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들리는 그 복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소리가 바로 천사의 손에 펴진 두루마리 책 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구원의 소리를 듣고 전하라

 

기록하지 말아야 할 것

계속되던 심판의 나팔 소리가 그치고, 바다와 땅을 밟고 선 큰 천사가 우레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가 그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 말의 내용을 기록하려고 하는데  기록하지 못하게 합니다.

들려줘야 할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말한 그 내용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알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은 내용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죽는데, 하지만 죽는 날짜를 아는 것이 유익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재림이 있지만, 재림 날짜를 아는 것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죽는 날과 재림의 날은 몰라야 오늘이 그 날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감으로 일생을 제대로 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알려줘도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명기 29:29).

사실 우리가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할 수 없습니다.

 

집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 동물들에게는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것들도 다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에 가깝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나님에 속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펴진 두루마리

 

대신 우리가 다 들어야 할 것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의 손에 펴진 채 들려 작은 두루마리 책으로 그것은 감춰진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과 나팔 심판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그 책의 복음을 반드시 속히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 내용이 다 이루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계 10:6).

그 책 속의 내용이 꼭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계 10:6).

천사가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온 세상이 다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 책 내용은 온 세상에게 전해야 합니다.

 

 

두루마리 책을 전하라 (10:8-11)

 

 

그래서 하늘에서 먹으라..이런 음성이 들립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은 두루마리를 가지라”(계 10:8)

그래서 요한이 그 책을 받으러 갔더니

천사가 그것을 손에 받아 갖지 말고, 그것을 입에 넣어주며 먹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계 10:9)

 

책의 내용을 그냥 듣지 밀고 책을 먹게 합니다.

귀로만,정보로만, 지식으로만 듣지 말고, 내게 주는 개인적 말씀으로 씹듯이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음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만이 살리듯이, 먹는 말씀만이 영혼을 살립니다.

먹지 않은 음식은 내 몸을 살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듯이 먹지 않은 말씀은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에는 로고스와 레마가 있습니다.

일반적 말씀 모두에게 한 말씀이 로고스라면, 내가 받아들인 말씀이 레마입니다.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듣고, 나에게 주신 개인적 편지처럼 읽어야,

그 말씀이 음식이 되고 영혼을 살립니다.

 

좋고 맛있는 음식은 그렇게 구하러 다니고 멀리까지 가지만

영혼의 말씀을 찾아 막으려고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사모합니까?

 

또 말씀을 모두에게 준 일반적인 말씀으로만  들으면 , 말씀하신 분과의 만남과 관계는 없습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로 듣고 예, 하고 나가면 만남이 생기고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교제도 생깁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나에게 주는 밀씀으로 받는 것이 먹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의 입을 크기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먹고 있는지, 보고만 있는지요?

이렇게 말씀을 먹은 사람은 말씀하신 분과의 관계를 갖습니다. 즉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먹고 살아난 사람은 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 일에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을 때 입에서는 달 것이고 그 먹은 말씀은 배에서는 쓸 것이라고 합니다.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10)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비슷한 말씀이 에스겔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1-3)

 

에스겔 선지자가 말씀을  들을 때 마치 꿀을 먹는 것 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마음이 굳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핍박합니다.

 

동시대 사람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처럼 받아서 그것을 시인의 언어로 은유를 사용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그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8).

 

예수님도 말씀을 전했지만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며 마음을 열고 들으라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아예 귀를 닫고 흠만 잡으려 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도 복음을 전했지만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단 맘으로 말씀의 씨를 뿌려도 길가 밭처럼 거부하는 이들을 계속 만나면 마음이 쓰립니다.

몇 번이나 전도를 위해 찾아가도 계속 거부당하면,

전화했는데 몇 번이나 싸늘한 반응을 보이면, 인사하려고 다가가도 몇 차례 얼굴을 돌리면 힘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전하기를 포기해야 합니까?

 

 

천사가 말합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 10:11)

다시 예언하라는 것입니다.  포기해서는 안되고 다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이고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은 거부를 당하지만, 그래도 전해야 하는 것은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 증거가 우리의 부름 받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유, 말씀을 먹은 목적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절을 당하지만 다시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까? 어떤 힘으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말씀을 꿀처럼 달게 먹는 것입니다.

전해야 하는 우리가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은혜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 119:103).

 

말씀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다시 잠기면서 말씀의 꿀 맛을 맛보는 것입니다.

 

말씀의 꿀 맛을 느끼는 것은 말씀을 계속 보면서,

등불만으로 보이는 세상을 밝은 태양 빛 가운데서 제대로 보는 것처럼,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깨닫는 기쁨을 누리면서 보는 것입니다.

아하, 이래서 예수님의 길이구나, 그 길이 보이는 것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꿀 맛을 느끼는 것은 말씀의 태양 빛으로 길이 보이는데,

그 길을 걸어가게 해주는 은혜와 힘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 용서의 길, 평화의 길이 맞지만, 내 힘으로는 가지 못하는데,

말씀의 은혜가 그 바른 길을 가게 해주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이렇게 복음의 단 맛을 알면, 복음을 증거할 때의 쓴 맛을 이기면서 다시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단 맛을 계속 체험할 때 선교시의 쓴 맛을 이기며 계속 사명을 감당합니다.

 

말씀의 단 맛으로 삶의 쓴 맛을 이기라

이런 것이 우리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시편 기자가 이 세상의 모순을 보고 너무 회의에 차서 괴롭고 삶의 모든 의욕을 상실합니다.

악이 흥행하고 선한 자가 빼앗기도 고통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마저 찾아옵니다.

삶의 쓴 맛을 느끼면서 살다가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가서 악인으로 사는 길의 종말을 다시 깨닫게 되면서,

다시 믿음의 길을 계속 가야 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편 73:28)

말씀의 단맛을 알면서 그는 모순에 가득 찬 현실세계의 쓴 맛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몸에 병이 들어 그 질병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 질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이런 응답을 받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그에게 주신 그 말씀을 단 마음으로 받자, 그 말씀의 단 맛이 육체의 질병이란 평생의 쓴 맛을 이기며 살게 합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땅끝으로 간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계속 쓴 맛을 맛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갑니까?

멀리 가려는 차는 기름을 가득 채워야 하듯이 땅 끝까지 가려면 말씀을 통해서 주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땅 끝은 저 멀리 있는 아프리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가장 가까운 곳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땅 끝은 가까운 일본이나 북한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땅 끝은 가까이 있지만 사실은 먼 남편과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가까지 지내지만 사실 가깝지 않은 그 누구일 수 있습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가면 땅 끝은 바로 이곳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 쓴 맛을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기 싫고 말하기 싫습니다.

 

삶에는 이런 쓴 맛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참 많지만... 그러나 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의 단 맛입니다.

말씀의 단 맛, 꿀 맛이 삶의 쓴 맛을 이기고 가야 할 길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록의 환상을 통해 들려진 요한의 말씀의 단 맛을 알 때에

핍박 받는 교회라는 쓴 맛의 힘든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각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삶의 쓴 맛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의 단 맛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우리 모두 말씀의 은혜를 새롭게 사모합시다.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 감격, 그 단 맛이 회복되도록 합시다.

그래서 삶의 쓴 맛을 이기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르셔서 주님 앞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 말씀의 빛을 켜시고, 성령의 능력을 채우시어 다시 삶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보냄을 받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2021년 12월12일 주일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