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7:1~17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유다지파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갓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아셀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납달리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므낫세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시므온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레위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잇사갈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스블론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요셉지파중에 일만이천이요
베냐민 지파중에 인침을 받은자가 일만이천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오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장로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하늘에서 볼 때 드러난 실상
나라의 요직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퇴직후에 권력 중심부의 실상을 폭로하는 책을 쓰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트럼프 참모 중에 그런 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책을 통해 숨겨진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역사도 대부분 강자와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많아 실상은 상당히 다를 수 있고,
또 세계사의 경우 서구 중심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역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땅의 관점에서만 보고 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을 갔다 온 후에 차라리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부자가 그가 살아간 삶의 끝을 미리 볼 수만 있었어도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을 것이고 실상을 본다면 매우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시 핍박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은 로마의 보좌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들이 말하는 평화가 참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열린 하늘 문을 통해서 보여진 실상은, 우주의 보좌는 다른 곳에 있고
통치자는 도리어 로마에 의해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이었습니다.
또 로마의 평화란 것도 사실은 평화란 이름 뒤에 온갖 종류의 폭력과 불의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은,
보좌에 관한 실상, 세상 통치의 중심은 어디이고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실상을 알 때 초대교회는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루마리
이어지는 환상은 두루마리 책을 펼치는 것으로 역사의 진실과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는데, 책은 봉인되어 있어서
누구도 그 책을 열 수 없었고, 누구도 그 책 내용을 바로 알고, 그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존재가 없었는데,
죽임당한 어린 양 예수님이 그 책을 받아 봉인을 하나씩 떼기 시작하면서, 숨겨진 실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첫째 봉인을 떼자 먼저 흰 말과 탄 자가 나왔습니다.
흰 색은 선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흰 말을 탄 자는 자기를 세상의 구세주 같이 보여주는 자이지만
그는 손에 활을 가지고 이기려는 하는 힘으로 지배하려는 가짜 메시아입니다.
겉으로는 흰 색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속은 다른 이들, 메시아의 패러디 모습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의 대부분 통치자들의 실상입니다.
둘째 봉인을 떼니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그릇된 통치로 인해 생긴 전쟁이며,
셋째 봉인을 뗄 때 나오는 검은 말은 불의한 통치와 경제구조로 인한 궁핍과 가난이고,
넷째 봉인을 뗄 때 나오는 데 이는 흉년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고,
다섯째 봉인을 뗄 때 보니 불의한 권력에 의한 고문 암살 핍박을 당하는 모습이 나오고,
여섯째 봉인을 떼니 타인과 동식물의 생명 경시를 통해 생겨난 거대한 자연 재해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두루마리 책을 펼치자 보인 이 세상의 감춰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마치 제품을 사용설명서와 달리 계속 사용하면 고장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과 달리 계속 살아감으로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이고 이것이 세상의 깊은 실상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죄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모두가 심판 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길을 걸어왔고
또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지내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상태가 이러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답게 된다는 뜻인데,
누구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 마땅한 길을 벗어난 채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루마리 책을 펼칠 때 보여진 그런 심판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능히 이 심판을 견디리오, 피하리오’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 질문으로 요한계시록 6장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두루마리의 일곱째 봉인이 떼어지려고 합니다.
그 7째 인이 떼어지면 일곱 나팔과 대접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죄로 인한 더 심한 결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구원 얻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이 계속 진행되지 않고 잠시 유예되고 그런 심판에서 구원을 얻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7장이 바로 심판에서 구원을 얻는 무리들이 나오고, 그들이 구원을 얻은 마지막 모습이 보여집니다.
요한계시록은 두 가지를 같이 보여줍니다.
세상이 이대로 죄의 길을 계속 갈 때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
그것을 일곱 인, 나팔, 대접 심판,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으로 보여주고,
또 그 죄의 길을 떠나 어린 양을 따를 때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
그것을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보여줍니다.
길의 끝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 수 있고 힘들어도 바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144,000
앞서 말한 것처럼 두루마리의 여섯 인을 떼어졌고, 이제 일곱째 인을 떼기 직전입니다.
네 천사가 땅의 사방을 향해 불 강한 바람을 붙잡고 있는데
이것을 놓으면 거센 심판의 태풍이 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담당한 네 천사가 그 바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계 7:1).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여러 악한 이들의 모습, 불의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며 마음 속으로 당장이라도 심판을 내려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죄인인 우리도 이 세상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데
죄를 조금도 용납할 수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에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잘 해서 이렇게 세상이 돌아간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심판의 바람을 붙잡고 계시고, 여전히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 애가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니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이 말씀이 실상입니다.
주님은 공의의 심판을 하실 수도 있지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한 천사가 바람을 붙들고 있는 네 천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계 7:3)
심판의 바람을 붙잡고 있게 하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은 사람을 구원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있는 세상 속에서 ,사탄의 통치 속에서 구원을 받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리시는데 그 때마다 계속해서 바로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아, 드디어 장자가 죽게 되는 열 번째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재앙을 잠시 멈추고 ,누구든지,애굽인이라도,
집 문설주에 피를 발라 표를 해두면 이 재앙을 면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처럼 일곱째 인을 떼면서 시작될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표를 받게 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표란 어린 양의 피를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는 것으로, 믿음의 세례를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죄로 인한 심판과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을 하시지만 그것을 지연시키는 것과 그 사이에 구원받을 백성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심판을 지연시키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 얻을 길을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방도로 죄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이마에 인을 받은 사람들,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은 과연 몇 명일까요?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계 7:4)
그 숫자는 십사만 사천명입니다.
신천지란 이단은 자기에게 와야 이 구원의 숫자에 들어온다고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먼저 144,000에 포함된 이들은 이스라엘 12 지파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지파들만이 이 구원 속에 포함된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12지파가 있습니다.
12명 아들 중에 르우벤이 장자인데, 12지파 중에 유다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또 12지파 중에 단 지파는 빠집니다.
유다 지파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유다지파에서 나셨기 때문이고,
단 지파가 빠진 것은 우상을 섬기는데 앞장 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구원은 출생서열이나 혈통을 따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사람들이 아니라 …. 하나님께로로부터 난 자들”(요한 1:13)이라고 했습니다.
또 십사만 사천이라면 정확히 그 숫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입니까?
이 숫자는 완전 숫자인 12를 제곱하고 거기에 많음을 상징하는 수인 "1,000"을 곱한 것입니다.
‘천군만마’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천명의 군사와 만 마리의 말"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군대를 말하듯
144,000은 구원받은 모든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이마에 인을 받았다는 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 심판을 받게 될 바벨탑의 세상 속에서 택함을 받은 한 사람,
즉 머리에 인을 받은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12지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12지파가 택함을 받았다, 머리에 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들만 복을 받고 그들만 보호를 받았다는 의미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세상에 흘러 보내야 할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심판을 받을 세상 속에서 택함을 받았으니 그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해야 하고,
또 심판이 임할 세상에 하나님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자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무리가 144,000명인데, 그가 바로 지상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지상의 교회로서, 한편 로마 황제를 신으로 우상을 신으로 물질을 신으로 숭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 또 한편 그런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을 보여주는 공동체로 택함을 받은 무리가 144,000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가나안의 주어진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던 것처럼,
교회도 각 나라 각 민족, 각 언어로 존재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 속에 빛으로 품고 하나님의 빛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교회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요, 144,000명입니다.
셀 수 없는 큰 무리
예수 믿는 우리는 144,000명에 속한 이들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하여 예배하는 교회요,
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한다는 것, 하나님을 온전히 증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못하게 결사적으로 막는 악한 용과 짐승과 사탄이 있어서 고통과 고난이 따르고 희생과 헌신이 따릅니다.
그래서 핍박에 쓰러질 수도 있고,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예배하고 온전히 증거하는 길, 즉 어린 양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계속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끝이, 참으로 구원이고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는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이런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
능히 셀 수 없는 무수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흰 옷은 하나님 백성임을 말하는 옷인데 이 옷을 어떻게 입게 되었을까요?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예수님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음으로 흰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또 손에 종려 가지가 들려 있습니다. 종려 가지는 승리한 장군의 개선을 환호할 때 흔드는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왕의 왕으로 믿고 따른 결과 마침내 승리의 환호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던 교회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미래 모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5-17)
그들은 지상에서 주리고 목말랐고 믿음 때문에 눈물도 흘렸겠지만,
지금은 그 믿음의 길을 걷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십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고 생명수 샘으로 인도됩니다.
이 모습은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주 짧은 묘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지상 교회의 미래 모습입니다.
요즘 예수를 믿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이도 많습니다.
예전에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썼지만, 요즘은 주일 예배조차 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믿는 것이 주변으로 밀려 나고 예수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이의 형통을 더 부러워하고 추구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길의 끝에 있는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의 길의 끝의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끝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의 경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전하고
사람들은 세상에서 여러 길들을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길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일을 하면서 세상을 섬기는 것, 두 가지만 있습니다.
겉으로 같은 일을 해도 속으로 따르는 대상이 다릅니다.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참 하나님을 따르거나,
아니면 세상의 여러 모습으로 위장한 용과 짐승을 따르거나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길이 더 넓고 더 화려하게 멋지게 보일 수 있지만,
그 길의 끝은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계시록은 어린 양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끝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있는 영광을 안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교회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첫째 어린 양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침을 받은 144,000 속에 들어가려면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누구도 지금 우리의 옷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묻은 옷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옷을 씻어서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죄인인지 아는가, 그래서 주님의 보혈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은혜를 확신합니까?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진노하심에서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인치심의 증거, 즉 믿음의 증거를 확인해애 합니다.
우리는 인치심을 받은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인데 그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이마에 새겨져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 이마를 만져 봐야 하겠죠.
하지만 그 증거는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인치심의 증거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라고 하십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침을 받은 144,000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교리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듣지만, 그것을 실제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의 소리, 내 감정의 소리는 크게 듣지만 성령님의 존재나 소리를 모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대화를 할 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어떤 감동을 주십니다.
어떤 때는 회개할 마음, 어떤 때는 감사할 마음, 먼저 사과할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으려고 해야 조금씩 더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순종하면 더 잘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됩니다.
셋째 어린 양 예수님의 길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은 죄의 결과를 온 몸으로 경험하는 부패하고 악한 세상을 삽니다.
권세자들이 행한 악 때문에 약한 자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 매우 매우 클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결과가 있지만, 동시에 구원의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거센 심판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을 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은 힘든 일이고 초대 교회 당시는 정말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증거할 열린 문을 찾아냈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힘듭니다. 하지만 열린 문이 어딘가 있습니다.
지금 이전보다 사람들이 더 분노하고 더 좌절하고 더 외롭습니다.
이런 시대에 열린 문을 찾아야 합니다.
2021년 12월5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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