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우리 안에 은혜의 새 노래가 있는가? 계시록 (11)

왕언니 2022. 1. 5. 15:50

요한 계시록 14:1~20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큰 포도송이를 거두라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 까지 닿았고 천육백스타디온에 퍼졌더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은 참 귀한 복이지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마치 지도가 있고 계속 연료를 주입해야  차가 가듯이

지속적인 영적 연료 공급이 있어야 하고 동행자가 있어야  가능함을 느낍니다.

이 땅은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죄인으로 유배되어있고 로마는 심판자와 집행자인데, 실상을 보면 누가 죄를 지은 것입니까?

로마의 죄를 죄라고 폭로한 것이 죄라면 ,진짜 죄는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왜 이런 세상이 되고 있습니까?

그 뒤에는 단순히 정치적 요인만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과,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짜 삼위일체입니다.

이것들은 위협하거나 속이면서,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짐승을 숭배하고 그의 길을 가게 합니다.

 

그렇게 용을 숭배하고 그 길을 가는 자들의 이마와 손에 표를 받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666의 인입니다. 참 목표와 길을 떠나서 살게 합니다.

 

 

고난

 

그런데 세상에서 그 짐승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고난을 수반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에 절하지 않는 이들은 고난을 받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어떻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고,  결국 두 길이 있습니다.

 

짐승을 따르는 이들과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류의 길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 마침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마에 이름을 새긴 자

 

그래서 일곱 대접 심판을 앞둔 상황 속에서 하늘 문으로 열린 모습을 보여주는데

14장에서는 세 장면을 보여줍니다.

첫째 장면은 666의 인을 받지 않은 자, 어린 양의 인을 받은 자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2).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어린 양의 이름을 이마에 새겼고, 또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 6:4-9)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진리로 듣고 머리에 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진리로 받고 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마와 손목에 말씀을 말아서 붙이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이마와 손목에 표를 새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말씀을 진리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요 인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마와 손목에 인을 새겼다, 표를 받았다는 의미는, 짐승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삶에 대한 거짓을 머리에 새겨 넣고

그것을 따라 살거나,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을 따라 살거나를 의미합니다.

결국 짐승의 표를 받고 살거나 어린 양의 이름을 새기고 살거나 두 길이 있음을 말합니다.

성도는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순결한 자

 

또 14장 4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는 순결한 자이라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니라”(계 14:4-5)

이들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음녀로 비유되는 바벨론 안에서 살지만,

바벨론에게 정신적으로 포로가 되지 않았고, 행실로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와 손목의 표시처럼 지냈다는 것입니다.

 

또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옳고, 흠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것을 삶으로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노래하는 자

 

이렇게 땅에서 어린 양의 표를 가지고 살려면 어려움이 없이 살 수 있었을까요?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종 모습입니까?

장례식에서 입관할 때의 모습이 최종 모습일까요?

이 땅에서 누리고 가지고 사는 모습이 하늘에서도 같은 모습일까요?

우리의 최종 모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심판 대 앞에서의 모습은 어떨까요?

 

14장 2절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거문고를 가지고 새 노래를 부르는 모습입니다.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 새 노래를 부르니...”(계 14:2).

15장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 모습도 역시 노래하는 모습입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노래를 불러 이르되”(계 15:2-3)

 

어린 양의 이름을 새긴 자, 이 땅에서 어린 양의 길을 간 자의 마지막 모습은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 찬송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속량함의 노래입니다.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속량함이란 값을 지불하고 산 존재가 된 것으로

죽을 생명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요즘 생존게임 형태의 대회가 많은데, 씽어게인 같은 노래 대회에서 정말 잘 하는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일차, 이차통과하면 너무 감동해서 울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기 실력이 있기에 등수에 든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떨어졌는데 구제해줘서 다시 기회를 주었다면  더 감동합니다.

 

하물며 죄 용서 받아 구원을 얻었다면 그 은혜의 감동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입니다.

새 노래가 새 노래가 되려면 가사 내용이  바뀐다고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그 가사를 부를 때 은혜와 감동이 늘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늘 새롭게 감격하게 하는 새로운 노래는

오직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진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런 감격만이 영원한 새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15장에 가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라고 나옵니다.

출애굽 노래, 즉 영적 출애굽에 관한 구원의 노래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 받은 교회의 미래 모습은 노래하는 자임을 알게 해줍니다.

 

 

 

 

 

 

복음 전파

 

둘째 장면은 세 천사의 모습으로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결국 짐승의 표, 어린 양의 이름, 둘 중의 하나로 삽니다.

그런데 어린 양을 따르도록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심판이 있기 전에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 14:7) 복음 전파의 일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

 

그리고 큰 성 바벨론이 반드시 무너진다는 말을 전합니다.

바벨론은 그 뒤에 용과 두 짐승이 지배하는 세상인데 이 세상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4:8)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무너진 것이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합니다.

지금 시기는 하나님이 심판을 유예하시고 계속 복음의 씨를 뿌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두 종류의 삶과 죽음

 

셋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계 14:9-10)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에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게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말씀했던 바로 그 심판의 잔입니다.

그 심판의 잔이 어떤 것인지 아셨던 주님은 그것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심판이 어떤 지를 잘 모르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1)이라고 했는데,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머리에 받고 사는 ,짐승의 말을 진리로 머리에 담고 사는 자, 손에 표를 받고 사는 자,

짐승의 말대로 행하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합니다.

그는 이 땅에서도 자기 혼자서 잠시의 쾌락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쉼이 없습니다.

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드는 자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짐승의 표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물질주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물질현상으로 보게 하는 것,

그리고 그런 본능적 동물로서 살게 하는 것을 별 문제 삼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도 참된 쉼이 없는 삶, 죽어서도 참 안식이 없는 삶이니 복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인내하고 박해를 받으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죽는 것 같지만 참된 쉼이 있습니다. 쉼을 얻는다는 말은 완성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넓은 문은 짐승의 표를 받고 사는 길이라면, 좁은 문은 어린 양의 표를 받고, 그분의 말씀을 머리에 담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인데,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고, 좁은 문은 하늘 나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두 가지 추수

 

그리고 14절에 셋째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구름 위에 인자 같은 이가 낫을 휘둘러 알곡을 추수하여 곡간에 넣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떤 천사가  휘두른 예리한  낫에 거두어져 ,포도주 틀에 버려지고 밟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노의 포도주, 하나님의 진노의 잔,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잔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잔이 임할 때,그 틀에서 피가 나와서 덮은 범위가 1600 스다디온입니다.

1,600은 4 x 4 x 10 x 10 으로 심판의 우주적 성격을 나타냅니다.

1,600 = 4(세상) * 4(세상) * 10(많음) * 10(많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범위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네 생물(5:6)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고, 네 모퉁이(7:10)는 땅 전 지역을 대표하고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란 사중 표현은 전 세계를 대표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이 두 가지 일, 구원하심으로 열매를 거두심과 진노의 심판.

이 두 가지를 현재형으로 오심으로 계속 행하시고  그리고 마침내 이루십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서 두 가지 표, 두 가지 길, 두 가지 결과를 봤습니다.

두 길의 결과가 너무 달랐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 결과가 어떤지를 모르고 하루 하루 삽니다.

 

어떻게 해야 어린 양의 표를 가진 자로서 어린 양의 길을 계속 갑니까?

유혹이 많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땅에서 하늘을 봅니다.

하늘 문이 열려서 하늘에서 땅을 봅니다.

우리는 땅에서 땅을 보고 삽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땅을 보면,

땅에서 본 땅과 하늘에서 본 땅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만약 하늘에서 본 땅을 본 사람은 이 땅을 이전과 같이 살까요? 다르게 살까요?

 

요한을 통해서 하늘에서 완성되었을 아주 일부를 조금 엿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땅의 깊은 실상을 하늘의 관점으로 보게 하십니다.

로마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초대교회,

시대 속에서 미혹을 받고 있는 현대 교회가 어린 양을 따르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노래를 부르자

 

또한 어떻게 이 길을 갑니까? 어린 양의 길을 간 이들은 마침내 노래를 부를 자입니다.

마침내 승리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부를 노래는 속량의 노래입니다.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계 15:3).라고 했습니다.

 

영적 출애굽, 구원하심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이 속량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이미 임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만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그 속량의 은혜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량의 은혜의 노래를 지금 부를 때 우리는 어린 양의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런 은혜의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면 마침내 영원한 속량의 새 노래를 부르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그 은혜의 노래가 우리를... 그 길을 계속 가게 합니다.

이 노래가 없으면 우리는 다른 노래에 홀립니다.

우리가 은혜의 노래를 계속 부르지 않으면, 세상 노래에 취해서 어린 양의 길을 계속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십자가 속량의 은혜의 노래를 계속 불러서, 세상의 노래 속에서 참 노래를 잊지 않도록,

그 노래를 따라 세상 바다 위의 배를 저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서 마지막 승리의 새 노래를 늘 부르는 은혜를 힘입기를 원힙니다.

 

 

 

 

                                                               2021 년 12월22 수요예배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