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왕언니 2021. 10. 27. 22:47

 

 

마태복음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는 모든 사람의 영혼의 모국어이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기도의 언어를 구사할 때 열리는 하늘의 세계는  참으로 놀랍지만

타락한 우리는 그 언어를 잊어버렸습니다.

 

각 종교들마다 기도하고 또 기도의 내용이 있지만

지금은 기도한다는 것이

누구에게 하는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른 채 기도합니다.

정말 우리는 누구에게 누구로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언어를 가르쳐 알려주시고

기도의 문법을 배워가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반드시 드려야 하고,

그것도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땅은 구체적으로 기도자가 기도하는 지금 이곳입니다.

그곳은

살라고 주신 빵이 서로를 죽이는 빵이 된 현실,

사랑하라고 주신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인간관계의 현실,

성숙하라고 주어진 삶이 넘어지는 악과 유혹의 장소가 된 타락한 세상이란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땅에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드린 후 어떻게 마쳐야 합니까?

보통 기도할 때 ‘아멘’으로 마칩니다.

‘아멘’은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됩니다,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는 뜻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그 아멘 앞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가 있습니다.

이전 개역성경에서는 그 앞에 ‘대개’란 접속사를 붙였습니다.

원어에는 그 앞에 ‘호티’란 접속사가 있습니다.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를 이렇게 끝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것은 먼저 ‘아멘’의 내용을 풀어쓰고 ‘아멘’으로 끝낸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고 기도를 마칩니다.

하지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직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를 마치는 이 구절은 다시 기도를 하게 만드는 구절이 됩니다.

 

 

마땅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먼저 이런 기도를 계속 드려야 한다면 그 기도 내용이 영원히 옳은 것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중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고 옳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주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원래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빵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위해 주신 그 축복들이

지금은 도리어 문제가 되고 고통과 유혹의 통로가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가 아버지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마땅한데,

그 마땅한 길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마땅한 일이 일어나야 , 문제는 근본에서 해결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바로 그것을 기도합니다.

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그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됩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란

왕이신 하나님을 닮은 작은 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자기를 희생하며 다스리는 왕을 닮아

리도 그렇게 각 영역을 다스리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갑니다.

주기도문은 바로 그것을 기도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마땅한 길을 걷지 않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크게 볼 때 두 종류의 왕과 나라가 있는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왕과 나라와 , 그렇지 않은 왕과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왕 헤롯은 로마에 충성함으로 왕위를 산 것이기에

그는 왕직이 하나님이 아닌 로마에서 온 것으로 여기고

성전도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한 정치적 계산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 왕위를 위해 자기 가족들도 죽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어떻습니까?

안정과 평화의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무력과 공포로 다스리고,

나중에는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두 왕의 모습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나라와 권세의 모습인데,

이것이 나라와 권세의 마땅한 모습으로 자리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로마 황제는 왕실의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여

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호적을 위해 걸어서 나귀를 타고 멀리 고향까지 대이동을 하게 합니다.

그 속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이런 황제가 지배하던 제국의 한 변방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한 어린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를 목자들이 찾아가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가서 왕으로 절하고 경배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헤롯 왕은 아기 예수의 목에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고,

또 또래의 많은 어린 아기를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백성들을 고생시킨 이유는 한 가지,

더 많은 세금 징수, 더 많은 왕으로서의 누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왕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자신을 동물의 먹이통 위에 누이고,

자신의 몸을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밥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더 손해 보고 백성을 더 유익하게 함입니다.

 

로마와 유대 왕은 화려한 궁궐과 높은 보좌에 있어 영광처럼 보였지만

그 영광에는 폭력과 잔인함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낮은 구유와 고통의 십자가 위에 있었지만

그곳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만약 사람들이 두 왕이 보여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살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은 두 종류의 왕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세상이 말하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패러디요 가짜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땅한지를 알게 합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왕과 권세가 존재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왕은 자기 자신이고 물질주의 시대에 왕은 맘몬입니다.

이런 존재가 왕 노릇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보는 오징어 게임과 같은 세상,

우리가 듣는 대장동 의혹 사건이 일어나는 세상,

우리가 경험하는 자살 지수 최고, 행복지수 최하위가 되는 세상이 됩니다.

 

 

톰 라이트란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제국은 밤에 불을 환하게 밝힌 방 같다.

램프들이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다. 램프는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램프가 바깥의 어둠을 몰아내지 못한다.

예수님의 나라는 떠오르는 샛별 같다.

이제 촛불을 끄고 커튼을 열어젖힌 채 밝아 오는 새 날을 맞을 때라고 신호한다.”(톰 라이트)

 

세상의 나라의 영광은 램프로 밝혀진 방과 같아서

그 모습이 약간 멋지게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바깥의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의 영광은 태양 빛과 같아서

어둠을 물리치는 근본적인 답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고,

그것만이 살 길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주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 두 번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데,

만약 그 기도의 내용이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계속 기도할 수 있을까요? 기

또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계속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마침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려워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정권과 그들의 권력 사용에 대해 너무 실망해 왔고,

다음 정권은 좀 다를까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어김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권력의 모습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세상을 고치려는 시도를 하겠습니까?

그래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란 기대가 있기에 관심을 갖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춘원 이광수는 처음에 독립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조선 청년 독립단에 가입해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이후 상해로 가서 김구가 관여한 신한 청년당에도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에도 참여하고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구성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입장을 바꾸어

조선 민족은 일제에 의해 개조되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면서 친일로 돌아섭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을까를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가 갑자기 일본을 좋아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친일로 돌아섰던 이유는 일제의 협박도 원인이었겠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이란 나라가 계속 강해지고

그 나라가 오래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이기면서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무릎을 꿇는 이들이 많았고

교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그 이후 만주사변, 중일전쟁, 미일 전쟁까지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일본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았다면,

이광수는 친일로 입장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친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런 모습이 이대로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뒤틀린 방식이 영원할까요?

일세기 대부분 사람들도 로마의 권세와 영광은 영원할 것으로 믿었고

그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할 것을 믿었기에

핍박도 참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종말에 임할 최종적인 실체가 무엇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결국 누구의 것이며 누구에게로 다시 돌아갑니까?

성경은 종말을 어떻게 말합니까?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영어로는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for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Rom 11:36 NIV)

 

가까운 미래는 지금과 같은 형태가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단지 소망이나 대안적 비전으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됩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계속 기도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데, 그 기도가 기도의 내용 성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가 기도자를 통해서 임하고,

그 뜻이 기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만드는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일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결정적으로 이루셨지만,

그 나라가 그 나라를 구하며 사는 자를 통해서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그 기도문을  외워 하나님의 나라를 입으로 구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삶을 포함합니다.

 

그 기도와 삶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실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아버지의 나라와 다스림을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빵과 용서와 유혹의 현실 속에서 쓰러지지만 일어서고 또 이기며 삽니다.

 

빵이 문제가 된 땅 위에서,

깨어진 인간관계의 현실에서 용서하며,

넘어지게 하는 세상에서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기도는

먼저 기도자를 바꾸고, 그 바뀐 기도자를 통해서 주변을 바꾸고,

또 세상을 바꾸는 거룩한 나비효과를 만들면서, 하늘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 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 7:27).

 

 

그 나라가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었다는 말씀은

이 땅에서 기도하며 사는 우리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8-30)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눅 16:19).

 

이 세 구절도 역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실 때

성도들의 기도와 삶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심을 알려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시지만, 우리의 기도와 삶을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배려요 은혜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삶을 허무한데 낭비하지 않고,

도리어 빛나고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예화 가운데 ,

한 아버지와 딸의, 마당에 허물어진 돌계단 보수공사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딸이 한사코 곁에서 돕겠다고 나서서,

너무 어린 딸의 도움이 오히려 아버지의 일에 방해가 되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는 그런 딸과 함께 한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기에 식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이번 계단 공사는 우리 공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빠가 결코 할 수 없었을 거야!”

 

사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부족 때문에,교회의 실수와 잘못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했지만, 사실 열심히 주님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더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실패하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영광을 주시고 계속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과 아볼로를 감히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

우리가 기도하면서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작은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빵의 전쟁터 현실 속에서, 빵 한 조각을 두고 깊이 감사하는 것을 사용하시고

그 빵을 두 쪽으로 갈라 나누는 것을 사용하시고

깨어진 인간관계에 작은 화해의 다리 하나를 놓기 위해

먼저 찾아가는 것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수많은 유혹들 속에서 이룬 아주 작은 승리의 트로피를 크게 사용하십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봉사하고,

주중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사용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위로의 전화를 하는 것까지도 다 사용하십니다.

아빠가 이것은 다 우리 예쁜 딸 때문이었다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라고 부르시며 다 너희들 때문에 가능했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아주 작은 일과 , 작은 섬김과, 봉사와 희생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행진곡

 

군인들은 전쟁터로 나갈 때 군가를 부르고 행진곡을 부릅니다.

그 내용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전쟁터로 나갑니다. 이럴 때 우리가 부를 행진곡이 무엇일까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 영원히."

이것이 우리가 매일 부를 행진곡입니다.

 

 

사실 이 행진곡은 ‘아멘’을 풀어쓴 것입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이름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죄악을 이기신 승리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악을 이긴 승리의 깃발이요 노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인감도장이 찍힌 서류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공증문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승리가 완성될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에게 영원히 돌아가게 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하며 아멘, 아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공동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주님 오실 때까지 주기도문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의 것이 결국 영원히 될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기도를 아버지가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도록 입으로 기도합시다.

기도문의 내용처럼 아버지의 다스림을 매일 받읍시다.

아버지, 왕으로 내 마음과 삶을 다스려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분의 통치를 통해 주어지는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매일 받읍시다.

 

그래서 그 힘으로 내 삶의 땅의 현실이 힘들지만,

도피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고 계속 다스리면서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통해서 주변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24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