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시험에 들게하지 마시옵고

왕언니 2021. 10. 8. 22:47

 

마 6장 13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유혹이 있는 세상

 

세상에는 시험이 참 많습니다 .

유치원 때부터  대학 졸업때까지 얼마나 시험을 많이 치는지 모릅니다.

여러 실험도 있고 다양한 훈련들도 있습니다 .

이런 시험 , 실험 , 훈련들은 과정이 힘들기는 해도 실력을 계속 향상하게 하고 ,

그 덕에 멋진 경기도 훌륭한 연주도 보고 놀라운 기술을 누립니다 .

이런 것들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듭니다 .

 

하지만 그 반대의 것들도 있습니다.

벗어나는 탈선, 넘어지는 실족, 악에 빠지는 유혹들은

실험과 훈련으로 힘들게 만들어진 좋은 것들이 망가지고 깨어집니다.

그대로 두면 사람은 더 악해지고 지역은 점점 우범지역처럼 바뀝니다.

 

그런데 이런 유혹 때문에 정도가 심해진 무리와 지역이 있지만,

그 유혹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과 지역은 없습니다. 

신성하다고 하는 교육과 종교의 영역에도 유혹의 그림자는 있습니다.

 

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이란 단어는 상반된 두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훈련이란 긍정적 의미유혹이란 부정적 의미입니다.

한 단어가 반대되는 두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깊은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좋은 의미의 훈련 속에 나쁜 의미의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디딤돌이 ,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뉴스의 중심에 있는 한 지역의 거대 개발계획도

계획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력과 실력을 높이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탈선하게 하는 걸림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삶의 모든 곳에서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는 권력의 유혹이, 경제에는 탐욕의 유혹이, 문화는 방탕의 유혹이 늘 숨어 있습니다.

일터와 가정에서도 같은 일들이 훈련도 되지만 넘어지는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유혹에 빠져서 오랫동안 쌓았던 업적이 무너지기도 하고, 소중한 가정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인간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의 돌멩이들이 삶의 길에 놓여 있기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더 많습니다.

악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지만, 없는 곳은 없고, 내 밖에도 있지만 내 속에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타락한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악에 구함을 받지 않고서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자연스레 ‘악에서 구해주소서’란 기도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악에서 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에서 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은 악

 

먼저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악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악들이 악이란 태그를 달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뉴스에 보는 여러 범죄들도 조사해야 겨우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숨어 있는 악의 정체를 드러내고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자주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는지 모릅니다.

 

잘 보이지 않는 악 중의 하나는 우리들이 선이라고 추구하는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추구의 대상들이 다양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돈, 권력, 쾌락 등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기에 열정을 바쳐 추구합니다.

그런데 열망을 담아 추구하는 대상은 점점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힘이 되어 갑니다.

 

“ 탐심은 우상숭배 ”(골로새서 3: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탐심이란 무엇을 정도 이상으로 추구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상대적인 것을 절대인 것으로 구하는 탐심은

대상을 추구하는 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신으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돈과 물질을 맘몬이란 신의 이름으로 불렀던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물질은 단지 물질일 뿐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숭배함으로 신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할 높은 가치와 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더욱더 우상 속에 있는 악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붙잡으려는 그 대상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악한 구조

 

또 보이지 않은 악은 구조악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은 삶을 이루는 필수적인 구조요,

우리는 그 안에서 살다 있다 보니 구조 자체는 잘 보지 못합니다.

만약 그 구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사람들은 그 구조 속에서 자기는 바른길로 간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기울어진 길로 가게 됩니다.

 

정치는 삶의 필수적 구조이지만,

그 속에 계파주의, 정치적 부족주의, 패거리 정치, 포퓰리즘이라고 불리는 악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한 채 스스로 열심히 나라 일을 바른 자리에 갖다 둔다고 하면서

어긋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경제 또한 삶의 필수 구조인데

그 속의 승자독식, 불공정, 기득권과 같은 악들이 구조를 변형시키고 있어서

경제활동이 불공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 정보와 미디어는 현대 삶의 필수조건인데

가짜 뉴스, 인지 편향, 편향된 보도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가정의 경우, 과거에는 유교의 가부장적 구조가,

최근에는 현대 풍조란 문화가 건강한 가족관계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 안의 문제를 보지 못하면,

그 구조 안에서 열심히 삶을 세워간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열심히 삶을 허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처럼 구조악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악들을 바울 사도는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 6:12)

“통치자,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바로 우상들이고 구조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세상을 움직이는 여러 종류의 힘들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힘의 지배 아래서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하면 그 힘은 삶을 건강하게 돌리게 하지만,

그 힘들이 변질되고 타락되면 삶의 모든 영역을 병든 유혹의 장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자

 

이런 보이지 않는 악들을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악들 뒤에 있는 더 은밀한 악이 있다는 점입니다.

‘ 하늘의 악의 영들 ’입니다.

이들을 성경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세상 임금,’ ‘거짓의 아비,’ ‘사탄’이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함으로 더 은밀히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의 악은

중성 명사로서 보이는 악과 보이지 않은 악의 총합체로서의 악을 말하면서,

동시에 남성 명사로서 그 모든 악 뒤에서 활동하는 “악한 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보이지 않은 악들 뿐 아니라, 그 뒤에서 작용하는 악한 영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악은 우리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밖에 있는 악을 보면 피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악으로 다가가는 그런 성향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욕심, 탐욕, 죄성이라고 부릅니다.

“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 ”(야고보서 1:14)는 말씀처럼

우리 밖의 악에 대해서 우리 안의 욕심이 반응함으로 길을 잃고 유혹에 빠지는 미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깨어라

 

이처럼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 악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보이는 형태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소위 선이라고 부르는 일 속에도 악이 숨어 있습니다.

경건하다고 하는 일 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의 전략에 관해서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란 책이 있는데,

 

악한 자가 우리를 넘어뜨리는 최고의 전략은 자기의 존재를 감추면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때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위하는 것처럼 접근합니다.

게다가 그런 악들에 은근히 반응하는 성향이 내 속에 꿈틀거립니다.

 

악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악의 존재에 대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숨겨진 의도와 실상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깨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의 정체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악을 이기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그것을 이길 수가 없고, 우리 안의 악이 밖의 악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의 정체를 보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피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악을 싸워 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보이는 곳에서 떠나야 했고,

삼손은 들릴라 뒤에 있는 적국 블레셋을 보고 피해야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고”(고린도전서 10:14)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디도서 3:9)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러나 피하는 것만이 악을 통한 유혹을 이기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과 싸울 수 있는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을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결국 넘어질 위험이 많습니다.

설령 악을 피했다고 해도 혼자 순결하게 살 수는 있지만, 악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누군가가 숨어 있는 악을 들춰내고, 그 악과 싸워 이기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고, 어두운 세상을 좀 더 밝히는 일을 누군가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건져주소서”란 기도는 우리를 건져 달라는 기도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악을 드러내고,

악과 싸움으로 악에 빠진 이들을 건지는 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악에서 보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악을 드러내고 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과 싸울 수 있는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영적 무기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런 영적 무기들은 다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히고, 십자가를 통해 의롭게 된 확신을 가져야 하고,

참된 평화를 가져오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베푸심을 믿고 성령과 말씀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이 무기들은 다 용도가 다 다르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사랑, 은혜, 권능, 믿음, 말씀과 연결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능력을 힘입어 악과 싸우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남에게 양식을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를 받아야 남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악의 통치를 이기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먹이심, 하나님의 용서하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그 힘으로 우리는 남을 먹이고 남을 용서하고 악한 세상을 선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악한 자의 다스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동네와 지역으로 칠십 인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보냈는데

그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제자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누가복음 10:17)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누가복음 10:18)

제자들이 갔던 당시 동네 사람들도 보이는 악과 보이지 않는 악 때문에 넘어지며 살았을 것이고,

그 뒤에 악의 영들이 작용이 있었습니다.

그 악의 영들을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요한복음 12:31, 14:30, 16:11)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새 임금으로 모실 때 세상 임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하늘의 자리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우리가 말씀이란 하나님의 무기를 사용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사탄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세 번을 시험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임으로 구원을 이루는 길을 가라고 유혹했습니다.

사람들의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켜 줌으로 구원을 이루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입니까?

하지만 육체적 욕구만 채우는 것만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사탄의 그럴듯한 제안 속에 있는 악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초자연적 기적으로 이루는 구원의 길을 가라는 유혹에 대해서도

죄를 해결하는 진짜 기적이 있어야 함을 아시고 거절하고,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을 주겠다는 유혹에 대해서도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과 무력의 방식으로 평화의 나라를 가져올 수는 없음을 아신 예수님은

사탄의 그럴듯한 제안 속에 담긴 유혹을 분별하셨고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말씀이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악을 이겨낼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매일 다양한 방식의 문제들이 닥쳐옵니다.

그때마다 어려움이 생기면 염려하고

남이 나를 힘들게 하면 나도 힘들게 하는 조건 반사적 행동을 보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집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우리를 다르게 대응하게 합니다.

더 이해하고, 더 사랑하고 더 기도하게 함으로

믿음의 대응이 문제 상황을 바꾸게 하고 상황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할 유혹의 목적으로 온 악의 걸림돌을

오히려 우리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훈련의 목적을 이루는 선의 디딤돌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다면,

이런 식으로 상황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고 그 결과 세상을 다스리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무엇보다 선이란 하나님의 무기가 악을 이깁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악한 유대인들과 포악한 로마 군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악 뒤에는 유대교와 유대 왕실과 로마 군인이 함께 엮어진 악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악한 자 사탄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악이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누가 그 엄청난 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악이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흘 뒤에 부활하십니다.

이 부활은 악에 의한 패배처럼 보이는 십자가가 사실은 악에 대한 승리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이 그 악을 이겼습니까? 십자가는 선이 악을 이겼음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미움을 이겼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바울 사도도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고 하십니다.

악을 다른 악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악의 힘만 더 키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선과 사랑임을 알고 그 무기를 사용하게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희생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유혹에 빠지게 하는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작은 영적 승리를 얻게 됩니다.

사랑함으로 미움을 이긴 삶의 간증, 선을 통해서 악을 이긴 영적 전리품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하면서 걸려 넘어지려고 했던 유혹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훈련하고

더 강하고 성숙한 주님의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인과 교회의 승리를 통해서 악과 싸우신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가 지금 이곳에서 드러나는 것이고,

주님의 승리는 점점 더 퍼져가게 됩니다.

이리하여 성도와 교회는 악이 만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 어둠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전히 악이 만드는 유혹이 길에 널린 삶의 길을 걷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을 때 남을 양식을 먹이는 자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받을 때 남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유혹의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일용할 용서를 구하듯, 일용할 다스림을 구합시다.

세상이란 무대 위에 악이 아닌 선이 이기는 것이 아닌

선이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스토리가 공연되는 곳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3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