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태 6:9-11)

왕언니 2021. 9. 23. 20:45

 

 

 

 

어제 한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는 “취업 안되고 폐업 늘고 끝이 없는 청년의 고통”이었습니다. 

최근 다른 뉴스의 헤드라인은,

세계 10위 경제대국 한국, 국민 삶의 만족도는 OECD 최하위권이었습니다.

 

또 다른 신문은 한국 하루 평균 38명 자살, OECD 국가 중 1위.

남성이 여성보다 2.4배 높음, 40대 이상 자살률이 높음이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또 어떤 뉴스는 한국이 일본을 곧 따라잡는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경제지수는 전체적으로 높아지고 양식과 물건은 더 넘친다고 하는데,

왜 절망하고 죽는 일이 많아지는 것일까요?

더 많은 양식과 물건을 만들면 될까요?

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더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이 주제는 여러 분야  전문가의 안목이 필요합니다만,

어쩌면 그런 자세한 학문적 분석보다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 더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겪는 땅의 현실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문제는 빵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데 그 갈등과 충돌이 그치지 않고,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문제의 중심에 빵의 문제가 있고, 우리 삶에도 역시 빵의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현실 속의 우리들과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합니다.

 

신앙은 이런 빵의 현실을 초월해서 오로지 정신으로만 살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더 많은 빵을 얻는 축복을 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물질을 떠나는 길이나, 물질에 지배되는 길이 아닌 물질을 다스리는 길을 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우리에게 먹을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빵의 문제를 다스리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이 기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먼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란 의미입니다.

이 기도에 담긴 의미를 알려면 구약의 한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시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 광야를 통과할 때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었고 당연히 농사할 수도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혹시 내일  만나를 안 주실까 봐 이틀 치를 거둔 사람이 많았고

건강한 사람은 사흘 치도 거두지만 약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며 경쟁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더 거둔 것이 그 다음날 썩게 하시고 더 거둔 것이 소용이 없게 하십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그날 치만 거두게 되었고, 서로 더 많이 거두려고 하는 대신에

약한 사람이 그날 치를 거두도록 도와주게 되었고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광야인데 아무도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일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대신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매일 배웠고

필요한 양식을 구하니 광야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광야도 살 수 있는 곳임을 매일 배웁니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살 때의 경험과 전혀 다른 것으로

애굽은 비옥한 나일강 곡창지역인데도, 매년 추수하고 창고에 쌓아 놓았던 것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왜 창고에 쌓아 두었을까요?

혹시 내년에는 흉년이 날까 봐 쌓아 두었고, 그 불안이 더 큰 창고를 만들고 더 많이 쌓아두게 했습니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런 축적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축적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축적을 목표로 삼다 보니 더 많이 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일강의 비옥한 땅인데, 어떤 사람은 남아서 버리고,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팠습니다.

 

광야에서는 아무도 굶주리지 않았지만, 비옥한 땅에서는 굶는 사람이 생기는 역설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달리 살아가는 삶을 경험하게 하셨고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불안해서 계속 축적하려고 하고,

축적이 삶의 목적이 되고, 축적한 것이 나를 지켜준다고 여기고, 그것이 신이 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도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양식의 축적이 목표가 아니라,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삶이 목표가 됩니다.

그렇게 삶이 목표가 되면 양식을 먹게 되지만,

양식 자체가 목표가 되면 삶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삶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은 ,필요한 것이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면 광야에서도 살지만 욕망을 구하면 비옥한 애굽에서도 살 수 없게 됩니다.

모두가 욕망을 쫓으며 산다면,

아무리 많아도 그도 행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만나 경험을 통해 이 두 가지를 배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의 두 교훈은 ,글로 기록된 율법의 체험적 훈련이었습니다.

 

십계명 전반부가 하나님을 믿으라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입니다.

후반부는 탐하지 말라, 욕망이 주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또 율법을 만나 체험을 통해서 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갑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를 세워야 하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애굽과는 다른 빵의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만나체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나안에서 축적을 목표로 하면서 빵의 전쟁이 일어나는 정글과 같은 애굽을 만들 것입니다.

축적을 삶의 목표라고 여기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며, 욕망을 추구하며 살라고 충동하는 종교가 바알 종교인데

가나안에서 그것과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대부분의 백성들은 일용할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많은 세금 때문입니다.

세금을 과중하게 거둔 것은

유대 왕실과 로마 왕실, 그리고 귀족들이 필요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적을 위해서, 또 그들의 욕망을 위해서입니다.

그 결과 농사를 짓는 비옥한 땅에서도 굶주리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살아가면서 사람들 중에는 현실을 비관하고 포기하고 자살하거나,

사는 길은 축적뿐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갔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광야에서의 만나의 체험을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 필요한 것을 구하라,

그러면 광야가 젖과 꿀이 흐르게 되고 먼저 그의 나라와 통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

삶이 전쟁터가 아닌 서로가 살면서 서로를 살리는 참 행복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처럼 지금 우리 시대도 빵의 문제에 관한 본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더 많은 축적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면서 그것을 우리를 지켜줄 신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서 오는지에 대한 눈이 닫히게 됩니다.

영적 눈이 멀게 된 것입니다.

 

여기 밥 한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먹고사는데, 이것은 누가 준 것입니까?

음식은 식당 주인이 만들었지만, 식당 주인은 

식재료를 생산하고 사육한 사람과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을 통해서  재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를 통해서 그것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땅과 씨앗과 비와 햇빛에서 얻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면 밥 한 톨 속에 여러 사람들과 온 우주가 들어 있고, 그 뒤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고

오늘을 살게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상력은 상점 진열대 앞에서, 차려진 식탁 앞에서 멈춰 있고, 그 너머를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식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까?

 

김동호 목사님이 2019년 폐암을 선고받고 20퍼센트의 폐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고

수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가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이런 말을 책에 썼습니다.

 

"돈 있으면 뭘 해요. 먹지를 못하는데. 돈, 암만 모으면 뭐해요. 잠도 못 자는데.

제가 하나님 앞에 하도 못 먹어서 픽픽 쓰러지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좀 먹게 좀 해 주십시오’라고. 정말 기도했어요.

 

먹을 양식만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소화력과 건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우리가 모두 집단적으로 학습한 것이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먹고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필수조건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축적을 신으로 여기며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에서부터 빵의 문제는 풀려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필요한 것이 아닌 욕망하는 것을 추구함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것을 맘껏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가치나 뜻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이끌리는데

욕망은 점점 커지고 만족하지 못하고, 일용할 양식의 범위만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냉장고, 에어컨 기본, 휴대폰, 자동차 기본도 모자라

수준은 계속 높아져서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이렇게 높아집니다.

내 한 목숨을 살게 하는데 드는 양식과 에너지와 자원이 점점 커집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추구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결국 다 살게 될까요, 아니면 그 반대가 될까요?

 

 

 

유엔이 기후변화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세계 탄소배출이 2030년에는 , 2010년 대비 최소 45% 감축해야 되어야 하지만,

예상은 오히려 16% 증가하여 1.5도 상승이란 마지노선을 곧 넘어

“세계는 온도가 2.7도 상승하는 재앙의 길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욕망이 구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다 보니 그것을 채울 자원이 제한되었습니다.

선진국의 경우,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난한  나라의 수 십배 수 백배의 에너지를 쓰는데

우리나라도 그에 포함됩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을 살리면 좋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빵의 문제는 너무 복잡하고 또 근본적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달라져야 합니까? 더 많이 생산하면 됩니까? 더 많이 분배하면 됩니까?

더 많이 생산해도 나누지 않거나, 더 분배해도 공정하지 않거나,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빵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축적한 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과 일과 열매를 우상화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유한한 존재에 의지해서 사는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데, 축적이 목표가 아니다, 욕망보다 필요가 더 우선이다,

이런 질서를 따라 산다면, 광야 같은 상황도 살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먹고, 입고, 거주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이며 예배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게 하옵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의 두 번째 의미는, 일용할 양식을 주게 하소서, 이런 것입니다.

이 기도의 뜻을 알려 준 것이 구약의 만나 사건인데,

더 깊은 뜻은 신약의 만나 사건인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어떻게 먹이셨습니까?

광야에서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고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들이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누가 9:13)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좀 이상하지 않으신가? 어떻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시지?

그런데 성경은 이것은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빵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 나라 질서를 훈련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말을, 제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여겼지만,

어떤 한 소년이 그것을 듣고, 엄마가 싸준 저녁 도시락인 오병이어를 내어 놓았습니다.

빵조각 5개, 작은 생선 두 마리 이것이 오천 명을 먹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주님이 광야의 오천 명을 먹이시려면 그냥 기적을 베푸시면 되지, 왜 그런 오병이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그 오병이어를 손에 드시고 기도하시자

그 무리들이 다 먹게 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광야의 오병이어 사건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광야 만나 사건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은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신약의 광야 오병이어 사건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앞서 빵의 문제를 왜곡시키는 핵심 문제는 축적이 목표가 되는 삶이라고 했는데

적절한 저축은 필요하지만, 축적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빵을 주시는 통로를 막는 순환장애입니다.

 

우리가 가진 각각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을 먹이십니다.

다양한 직업, 은사, 재물, 재화 등이 하나님이 모두를 먹이는 오병이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흐름이 막히면 빵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시 5천 명의 사람들이 굶주린 것을 두고 왕과 귀족들은 그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빵을 주시는 통로를 차단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주된 이유입니까?

지금 승자독식의 세상이라고 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말합니다.

오천 명 분을 혼자서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통로가 차단된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의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이는 통로가 된다면,

빵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사랑이 유통되는 공동체가 됩니다.

모두가 승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하려고 주신 나의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재산이거나 직업이거나 은사이거나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평생 자기 한 몸 잘 먹이고 꾸미는 일에만 사용하다가 가는 사람이 있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며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전자를 사는 길이라고 부르지만, 예수님은 후자를 참 사는 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내가 너에게 준 양식으로 누구를 먹였느냐? 몇 명을 먹였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어떻게 임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양식으로 내가 살뿐 아니라,

그것으로 남을 살리는 이들을 통해서 임합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교회가 ,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빵의 현실에 임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거룩한 빵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보여주신 후에, 그 기적의 더 깊은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키면서

양식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줄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하시며

자신을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행함으로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기억할 때, 기억할 것이 많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해야 하는데

십자가는 자신을 거룩한 빵으로 주심으로 우리를 살린 생명의 사건입니다.

성만찬을 행하면서 우리는 거룩한 빵을 먹고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식물을 먹고 공기를 마시고 재화를 사용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빵을 먹고 삽니다.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하는 빵을 먹으면서,

또 일용할 필수품으로 살면서 그것들을 통해 나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빵을 먹여 살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양식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처럼 우리도 거룩한 빵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살면서 서로를 살린다면 우리는 서로 거룩한 빵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살림의 삶이 곧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는 빵의 전쟁터 속에 살면서, 매주 성만찬을 행함으로

빵의 현실에 은혜가 흐르고 사랑이 흐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해야 하는데, 이것이 너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비정상이 정상이 될 정도로 왜곡된 세상입니다.

앞으로 그 왜곡은 더 심해질 것이고, 더욱 양극화되고 축적을 더 목적으로 삼을 것이고

그것을 신으로 모실 것이며, 그를 승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기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고, 진보와 보수를 초월하게 하고

빵의 참 질서로 빵 문제를 해결하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마음의 위안만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 특히 빵의 현실을 바꾸는 종교입니다.

이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것으로 산다는 성경의 중심사상인 청지기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유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맡아 있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의 첫째정신은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라는 것, 주인의 주신 양식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삽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고

그것 자체를 숭배하지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보고 예배합시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일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둘째는

모든 것을 주인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은 ,내게 맡긴 양식으로 나도 먹지만, 남도 먹이는 것입니다.

나도 살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남을 먹여 살리자는 마음으로 삽시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양식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정신적이든 육적이든 심리적이든 양식을 먹이는 것인지를 찾아봅시다.

나의 작은 실천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다음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데

이 기도도 아버지가 나를 먹이신 것 같이 우리도 남을 먹이게 하소서란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면서 산다면, 빵으로 인한 수많은 문제 속에서 빵의 참 질서와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빵의 왜곡된 질서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2021년 9월19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