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왕언니 2021. 9. 29. 19:53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 6:12)

 

 

우리 시대의 모습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습은 너무 복잡합니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은 하늘과 동떨어진 땅인데,

이 땅의 복잡한 현실 문제를 만드는 핵심 원인은

 

첫째 원인은 빵입니다.

수많은 문제들 속에 결국 빵 문제가 있습니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땅의 문제를 만드는

둘째 원인은 사람입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삽니다.

빵의 문제, 사람 문제가 핵심원인입니다.

 

빵 문제는 배고픔과 배부름이 있다면

관계로 엮어 사는 인간 문제에는 묶임과 풀림이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관계와 마음의 매듭들을 만들기도 하고 그것을 풀기도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한번 매듭이 묶이면 풀기가 힘들고, 풀지 못하면 묶인 매듭들이 마음의 흐름을 막아 버립니다.

관계를 단절시키고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그대로 두면 언젠가 폭발하고 나라 간에는 전쟁도 일어납니다.

이 매듭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아 버립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매듭을 묶지 않을 수도  없지만  또 매듭을 풀지 않고도 살 수 없습니다.

용서를 구한 경험, 용서를 베푼 경험, 용서를 받은 경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가 만드는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용서 외에는 그 매듭을 푸는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용서는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지만

용서만이 인간관계 문제의 매듭을 푸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무나 중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이 용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첫째 우리는 이 기도문이 우리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연결되어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며”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같이’란 접속부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태 18:21).

베드로는 일곱 번을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최고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 18:22).

일곱 번도 아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당연히 그런 용서, 우린 못합니다, 고개를 저었을 겁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인이 결산을 하려고 종들을 불렀는데, 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왔으나

(한 달란트가 15년 노동자 품삯이니 만 달란트면 15만 년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그 돈은 자기 몸과 아내와 자식과 소유를 다 팔아도 평생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다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탕감을 받은 종이 나가 집으로 가다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그것을 갚지 않았다고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으로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먼지도 안되는데)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그 소식을 주인에게 알리자 주인이 크게 노하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 18:33)하고 그를 옥에 넘깁니다.

이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 18:35)

 

이 이야기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지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것을 생각하면,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고, 어떤 빚 탕감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용서가 시작될 수 있고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의 비유

 

그러면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는 어떤 것이며, 우리는 어떤 빚을 탕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둘째 아들은 좋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 나 좋은 집에서 살고 있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의 아들로서의 존재와 삶은 아버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를 거역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그것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의 재산뿐 아니라 마을에서의 아버지의 명예까지도 짓밟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오는데, 이 아들을 향하여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그를 품에 안고 다시 아들로 맞아 주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진 경제적 도덕적 빚을 다 탕감해주어 다시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것,

살아 있음이 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으로 살아갑니다.

공기며 물이며 땅이며 살고 있음이 매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그 빚은 더 커지기만 하지 줄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인데, 빚을 다 갚았다, 완전히 청산했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한 도덕적 빚을 예수님이 다 갚아 주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존재함으로 또 구원을 받음으로 빚을 졌는데,

이 빚은 영원히 되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런 용서, 이런 빚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은혜의 다스림

 

내가 하나님에 진 도덕적 빚을 탕감받은 것을 안다면,

나도 내게 도덕적 빚을 진 상대를 용서할 힘을 얻게 됩니다.

용서할 때도 나 역시 죄인임을 알고 시혜를 베풀 듯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용서합니다.

또 이 용서는 나의 특별한 공로가 아니라,

너무나 큰 용서를 받은 내가 마땅히 할 바임을 알고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받은 용서가 어떠한지를 모르면, 남을 용서하기 어렵고,

용서를 한다고 해도 용서에 매우 인색합니다.

용서할 때도 자기는 용서를 베풀 정도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또 용서를 구해야 할 때도 매우 자존심 상해하면서 용서를 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찬송 속에 담긴 내용이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하게 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놀라운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 속에 있는 나의 죄

 

둘째 이 기도문은 죄를 말할 때 ‘우리의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 그의 죄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란 말 그대로 너의 죄 속에 우리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용서가 힘든 이유는 그 죄는 오직 그 사람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죄 속에 우리의 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마음에서 좀 자유롭게 됩니다.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경우 한 사람의 죄 속에는 그 사람만의 죄만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죄들이 있고,

내 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나쁜 행동을 했을 때 일차적 책임은 바로 그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직접적 간접적 무수한 사람들과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친구일 수도 부모일 수도 있고 거래처 사람일 수도,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 뒤에는 이런 무수한 사람들의 잘못 , 냉대 , 거짓, 폭력 등의 죄들이 있고

그 사람의 우리에 대한 행동 뒤에는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하나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아

그러므로 그의 죄를 우리의 죄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틀리지는 않고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죄들은 우리들도 공범이라고 말하는데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기후재앙을 만드는 환경오염의 죄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환경오염의 죄를 탓하는 손가락이 나도 역시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 죄도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회의 여러 범죄들, 사기와 절도와 부패와 독식과 같은 것들은

그런 것이 일어나는 사회를 만드는데 내가 전혀 일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도 어느 정도 죄라고 말하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 수 있고,

사회가 그렇게 되도록 방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는 우리들의 죄입니다.

 

이렇게 그의 죄 속에 우리의 죄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가해자에 대해서 냉정하고 잔인하게 대하지 않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상대가 용서를 구할 때, 그를 향하여 나는 잘못이 전혀 없는 것처럼 용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잘못한 점이 있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해자 속에 용서를 통한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피해자 속에 엄청난 영적 성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용서는 이전보다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용서는 순종을 통해서만 온다.

 

셋째, 우리가 이 기도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죄 용서가 우리의 용서 받음의 조건처럼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 6:12)라는 구절은

우리의 죄 사함이 하나님의 죄 용서의 조건처럼 되어 있기에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중에서 유독 용서의 부분은 주기도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반복될 때는 더 강한 톤으로 우리의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 6:14-15)

 

정말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일까요?

실제 우리의 용서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표현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용서의 성격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빵을 주시듯 주실 수 있는 어떤 물체가 아닙니다.

용서는 가해자 피해자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가해자와 피해자 당사자를 패싱 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실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가해자 피해자 당사자 간에 일어난 것이고, 쌍방이 풀어야 하는 관계의 문제이기에

당사자의 어떤 행동이 없이는 용서란 응답이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밀양>이란 영화에서 본 것처럼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간의 풀어야 할 문제를 대신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묶인 매듭을 직접 푸시지 않고 매듭을 풀 수 있게 하십니다.

용서가 일어나려면 용서를 구하는 행동, 용서를 베푸는 행동이 있어야만 용서가 일어나기에,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처럼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우리의 순종을 요청하기 때문에 용서의 기도는 다른 기도보다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용서의 길이 아닌 유사 용서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냥 잊어버리지 뭐, 그리고 망각의 길을 택합니다.

다시 얼굴 안 보면 되지 뭐, 그러면서 연락도 다 끊어버리는 무관심의 길을 택합니다.

만나면 얼굴을 돌리는 냉담의 길을 가기도 하고 자기를 자책하는 우울의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심리적 도피 메커니즘의 길은 답이 아닙니다.

 

주기도문만이 용서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것을 말합니다.

용서 외의 다른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용서의 스토리를 써가고 계시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일까요?

사탄은 용서의 길이 길을 가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용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이유는

용서만이 죄를 이기고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힘들지만 이처럼 용서만이 묶인 매듭을 푸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용서를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의 길

 

이처럼 용서는 용서하는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러면 용서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로 피해자 편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피해자가 참아주고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용서는 쌍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가해자도 함께 용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가해자라면 용서를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서 매듭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매듭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음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다가

수시로 떠올라 피해자를 오랫동안 계속 고통스럽게 합니다.

 

또 가해자라면 용서를 구할 때 약간의 보상을 하고는 할 것을 다했다고 하거나,

법적으로 자기를 변호하면서 형량을 낮추려고만 한다거나,

형을 받았지만 그것은 과한 형이라며 피해자 의식만 갖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용서가 될 수 없습니다.

 

 

피해자라면 용서를 구할 때 진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를 가해자가 알아야 필요도 있고,

때로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할 수 있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고 은혜를 베푸는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만약 피해자가 용서를 단단히 본 때를 주리라고 하면서 속으로 보복의 마음을 가진다거나,

적절한 보상 그 이상을 계속 요구함으로 가해자를 계속 힘들게 한다거나,

용서를 구해도 계속 냉담하게 반응하면서 가해자의 죄책감을 가중시킨다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면서 다른 종류의 죄와 보복이 시작됩니다.

용서, 힘든 그러나 위대한 순종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용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용서는 일용한 빵처럼 반드시 먹어야 사는 정신과 관계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용서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용서는 비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순종할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가해자가 그렇게 기도하고 먼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그 순종이 상황을 바꿉니다.

만약 피해자가 기도함으로 용서를 베풀기로 순종한다면,

그 순종은 상황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듭니다.

가해자도 회복되고 피해자도 치유되면서 관계가 이전보다 더 낫게 회복됩니다.

둘은 더 성숙하게 됩니다. 문제는 누군가가 용서의 시작 단추를 눌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어린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

무려 19년 동안이나 징역을 살았는데

만약 빵 집주인이 장발장의 상황을 이해하고, 용서했다면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가석방으로 풀려난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계속 냉대를 받으면서

용서를 받지 못한 자로 지냅니다.

그러다가 성당에 들어가 하룻밤을 잤고 은잔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다시 잡힙니다.

이때 성당 주교가 그 은잔은 장발장이 훔친 것이 아니라 선물로 준 것이라고 말함으로

장발장을 용서합니다. 주교가 누른 용서의 첫 단추가 장발장을 바꿉니다.

그는 평생 용서를 모르며 살았던 형사 자베르의 삶과 대조를 이루면서,

용서만이 사람을 살리는 참된 길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용서를 해줘도 잘 달라지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용서가 아니면 달라지는 일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용서했기에 그래도 달라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의 무리들이고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런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는 용서받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정체성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고,

마치 자기가 앉은 가지를 자기가 잘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9)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용서 베푸심으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이들인데,

그렇다면 그는 은혜의 힘으로 용서를 통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힘을 얻어 용서함으로 매듭을 풀어가는 사람,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라

 

 

이렇게 용서를 통해 임하는 평화와 화해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줍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란 다스림이 세상 속에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을 받았고 그 일로 세상 속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그 내용입니다.

이때 주님은 세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며 평화를 비는 인사말을 전합니다.

둘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받으라(22절)고 하시며

주님의 사람으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 20:23절, 새번역)

 

성령을 받은 이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해야 할 사명의 핵심이 바로 용서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용서가 이 땅의 문제를 만드는 핵심 원인을 푸는 근본적 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는 말은 원어적으로 '풀다'라는 뜻입니다.

묶인 관계의 매듭, 마음의 매듭을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립니다.

세상은 매듭을 만들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교회는

묶인 매듭을 푸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곳곳에 마음의 매듭들이 많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교인들 사이에 ,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부나 가족 사이에도 있습니다.

어떤 매듭은 쉽게 풀리지만, 어떤 매듭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많은 문제들이 풀지 못한 매듭들에서 옵니다.

결국 매듭을 풀어야 하는데, 그 매듭은 하나님이 직접 푸시지 않고 우리가 풀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이들을 통해서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 프랜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가 한 사람을 용서한다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풀어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

그 은혜에 힘입어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베풀며 살기를,

가장 힘들지만 가장 위대한 순종, 그 용서를 통해 삶을 묶고 있는 매듭들을 풀어가기를,

리하여 우리가 인간관계의 땅에 하늘이 임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창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9월 26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