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나라가 임하시오며

왕언니 2021. 9. 10. 12:02

마태복음 6장 10절.....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세 가지 질문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기도할 필요를 가진 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의 12제자들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아버지에 나아갈 자녀됨의 특권을 가졌고, 또 자녀 됨의 사명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그 내용이 주기도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기도 제목을 보면 우리는 이런 질문이 듭니다.

왜 많은 기도 제목 중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기도를 먼저 하게 하시는가?

그렇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또 언제 어떻게 임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면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가깝게 다가가게 됩니다.

 

바퀴의 살과 중심

 

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게 하셨을까요?

수레바퀴의 비유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레바퀴 살은 중심축의 힘으로 굴러갑니다.

여기서 바큇살은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고

중심축은 그것을 움직이는 동기나 목적 혹은 힘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들, 가정, 자녀, 직장, 건강, 관계 등등은

주로 바퀴의 살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바퀴의 살에 문제가 생기면 고친후  삶의 바퀴는 또 굴러갈 수있지만

만약 바퀴의 축에 문제가 생기면

바퀴가 굴러갈 수 없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가게 됩니다.

 

한 나라에도 바퀴의 살에 해당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들이 있는데,

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중심축인, 이념이나 정권이 달라지면 삶의 여러 영역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바퀴의 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심축이기에 ,중심축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삶의 바퀴 중심축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그 중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누구를 예배하는가?’ ‘누가 다스리느냐.’

즉 우리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느냐,

또 무엇이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이거나 자아이거나 욕망이거나 돈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 중심축이 어떠한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삼고 추구하는 것이 예배의 대상인데

사실상 무엇을 예배하는지,

무엇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필시 하나님 아닌 것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의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를 구하는 것은, 중심축을 원래대로 바로 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바뀌면 주변이 달라지고 뿌리가 달라지면 열매도 달라지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는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생각한 나라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하는데

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

 

당시 유대인들도 그 나라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들의 갈구는 어느 때보다 간절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그들을 다스렸던 헤롯 왕과 로마 황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스렸던 유대의 현실은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나타나 나라를 다시 세워주기를 대망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그런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로마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정치적 출애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제2의 모세와 같은 존재로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이후 메시아가 유대 왕국을 온 세상 위에 우뚝 선 나라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했기에

다윗 왕과 같은 존재이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누가 들어갑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이 더 의로워서가 아니라 유대 민족이란 이유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로마와 이방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입니다.

결국 자기 민족 중심의 나라요,

힘을 가지고 지배한다는 세상의 틀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이런 나라는 예수님이 구하라고 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유대민족만이 아닌,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가진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나라입니다 .

세리 마태도 열심당원 시몬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사자와 같이 강하고 위엄이 있을 뿐 아니라 ,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린 죽임 당하는 어린 양 같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

그 나라는 힘과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이 삶의 중심축에서 있는 나라 ,

강자만이 영광을 받는 나라가 아닌 소자와 약자들이 귀히 여김을 받는 나라 ,

더 많은 이를 섬기는 자가 큰 자인 나라요 ,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이 명예가 되는 나라요 ,

포도원에 늦게 들어간 일군도 하루 품삯을 받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왕도 하나님의 종임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나라요 ,

특권은 책임임을 깊이 인식하는 나라요 ,

살아 있음이 빚진 것임을 알고 ,서로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이 남을 살리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 나라와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큰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작은 자가 되고 ,

세상에서 먼저 된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중 된 자가 됩니다.

 

이런 나라를 창세기는 에덴동산으로,

구약의 이사야는 이리 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이사야 11:6-9),

신약의 사도 요한은 흙과 같은 존재인 인간들이 보석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룬 공동체

즉 12 보석과 12진주문의 새 예루살렘 성이란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심판자 메시아에 의해서

 

이것이 예언자들이 말씀한 하나님 나라요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개인이 각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요

나라의 제도까지도 하나님의 법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그 나라를 전파하셨고 ,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떻게 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악인과 이방인을 심판하는 심판을 통해서 그 나라가 오면,

이전의 옛 시대는 끝나고 미래의 새 시대가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와 이방 나라들은 망하고 하나님의 선민은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한 번의 결정적 심판사건을 통해서 순식간에 옛 세상이 사라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다고 봤는데,

이것을 두고 묵시록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이런 심판이 와야 하는데, 그 심판을 메시아가 해주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가 오려면 그들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 정결례 법, 할례 법과 같은 유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그런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믿고 율법을 잘 지키려고 했고,

 

엣세네파는

소수라도 참 선민의 삶을 살면 메시아가 온다고 믿고

사막에 은둔해서 철저한 금욕의 삶을 살려고 했고,

 

열심당원들은

이곳에서 로마와 싸우는 행동이 있을 때 메시아가 온다고 여기고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메시아를 심판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심판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심판이 아닌 회복, 정죄가 아닌 용서를 베풀고 죄인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이를 본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누가복음 7:19)

당시 유대인들과 요한은 메시아를 칼을 든 심판자의 모습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기 생각에 매여 있다 보니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 생각과 방식에 매여서

주님이 말씀하신 그 나라를 잘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저 하늘나라로 본다든지 그저 지상의 세상을 본다든지 말입니다.

 

 

 

농부 메시아에 의해서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누가복음 7:22) 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는 심판자의 존재가 아니며 ,

하나님 나라는 심판의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이방인을 심판함으로 오는 것이라면,

세상의 문제는 유대 민족밖에 있는 저 이방인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니

그 원인만 제거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됩니다.

자기 나라를 싫어하고 힘들게 하는 민족들을 심판하면

은 세상이 온다고 여기는 자기 민족 중심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속에는 이방인의 죄는 크게 보지만,

자기 민족 속의 죄와 악은 덮어버리는 자기기만이 있습니다.

또 이방 민족을 향하여 빛이 되어야 할

선민의 책임을 망각한 자기들의 죄를 간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들을 배제하고 심판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도 우리 속에도 있는 진짜 적인, 죄를 심판함으로 오는 것입니다.

로마와 이방인 속에도, 유대인들 속에서 우리들 속에도 있는 죄를 해결함으로 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유대인이나 우리들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로마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모든 족속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한 하나님 나라요 그 일을 메시아가 해야 합니다.

 

만약 이방인을 제거하는 일을 하려면 메시아는 군대를 거느린 강력한 장수가 되면 되지만,

우리 모두 속에 있는 죄를 해결하려면 메시아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유월절 어린양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메시아는 모두의 죄를 심판하심이 아닌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이처럼 메시아의 모습은 칼을 들고 강한 군대를 거느린 장수처럼

세상 잡초를 다 뽑아 버리는 심판을 하시는 심판자가 아니라,

잡초들이 자라는 밭에다 용서와 구원의 씨를 뿌리시는 농부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를 사용하신 중에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당시 죄인들, 이방 군인들, 세리들을 만나시고

그들 마음의 땅에 용서와 회복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릇된 기준으로 사람을 가르고 판단하는 사회의 땅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세상 속에 씨를 뿌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져오신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왔고 오고 있고 올 하나님 나라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면,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파국적 대심판을 통해

일시에 옛 시대가 사라지고 새 시대가 임하는 방식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심판 이후에 옵니다.

그 나라는 미래에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심판이 아닌 씨를 뿌리고 알곡이 자라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면

언제 옵니까?

하나님 나라의 씨가 이미 뿌려졌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한 것이고,

뿌려진 씨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현재 임하고 있는 것이고,

그 씨가 자라 추수할 때가 있기에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온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오고 있고, 또 올 것입니다.

씨는 뿌려졌고 자라고 있고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심판을 시점으로 단번에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둘로 구분되지만,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 속에 씨앗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있지만, 아직 완전히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씨앗처럼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수동태 명령형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오게 하신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구태여 있을까요?

개역 개정에는 이 기도문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되어 있지만,

이전 개역 성경에는 ‘나라이 임하시오며’로 되어 있었습니다.

수동태 문장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수동태 문장의 경우, 나라가 문법상 주어이지만, 행위의 주체는 아닙니다.

나라가 스스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 혹은 무엇을 통해서 임하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임합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 의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적 출애굽을 가져오신 어린양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그랬다면 그 나라는 저절로 임합니까? 단순히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임한 그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 임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통해서 온 땅에 임하는 것처럼,

하나님 구원의 복이 아브라함과 후손들을 통해서 온 땅에 흘러가는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통로가 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가진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소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에 의해서 임했고, 우리를 통해서 임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예수님이 농부가 되어 뿌린 씨가 우리에게도 뿌려질 때,

우리는 그 씨를 받는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밭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존재를 열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운전대를 잡으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님의 집>이란 소책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거실에만 있게 하지 말고,

안방, 다락방, 주방, 침실 모든 영역에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전도 소책자에 있는 그림처럼 내 마음의 왕좌에 주님이 앉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의 마음을 세상 욕심, 세상의 염려, 불안, 두려움이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들이 내 삶의 운전대를 잡고 내 삶을 이상한 곳으로 몰고 가고,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짜 왕들을 내치고 하나님을 내 마음의 왕좌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씨앗이 내 마음에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또 도시가 발전소와 저수지와 연결되어야 유지되듯,

내가 계속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연결되어 있도록

늘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한 그 다스림이 교회에 임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갈수록 험해지고 구조적으로 더 악해지며

청년들의 미래, 환경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악의 잡초가 너무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을 탓하고 비관하며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탓하지만 원래 타락 이후부터 어두웠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이 어두운가 탓할 것이 아니라, 빛이 없음을 탓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빛을 잘 받아들임으로 그 빛을 반사하는 빛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가 자라고 결실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더 사랑하고, 더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있음을 보여준다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들에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렇게 씨가 우리의 마음에 떨어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보게 되면 그 씨앗들이 주변으로 퍼집니다.

우리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농부처럼 우리들 안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농부처럼 씨를 뿌리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핍박하고 비난해도

우리는 그저 조용히 진리와 평화의 씨를 계속 뿌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씨 뿌리는 농부가 되는 것이

우리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는 방식이고 해야 할 선교의 방법입니다.

 

톰 라이트란 학자는 이것을 곡을 연주하는 것에도 비유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이 좋다고 여기는 악보를 가지고 자신이란 악기로 연주합니다.

진보와 보수가 각각 자기의 이념의 악보를 가지고

자기주장과 직업이란 악기로 행동하면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란 완벽한 곡을 작곡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악보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와 직업과 일이란 악기로 그 악보를 지금 여기서 연주하면 그들이 듣습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의 악보를 연주하는 연주자로서

우리라는 악기를 계속 재조 율하고, 서로 화음을 맞추어 가면서 연주한다면

세상이 그 노래를 듣고

하나님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해 주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연주가 그렇게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삶이 세상이나 자아나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왕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 다스리도록,

교회가 사랑과 섬김과 공의가 다스리는 공동체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복음의 열매가 맺히고

세상이 교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2021년 9월 5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