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기도를 각각 반면교사로 삼아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은밀히 계신 중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광장에 있는 보이는 사람을 향하여 기도했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은 기도자를 아시고 그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인지를 모르고
주문을 외듯 중언부언했습니다.
당시는 그런 두 부류가 있었다면,
지금은 아주 틀에 박힌 습관적 문장으로 기도하는 이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기를 향하여 긍정적 암시를 주는 명상을 기도라고 여기는 이들,
아니면 아예 기도를 하지 않는 이들, 이런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기도하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교회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고, 우리들입니다.
기도의 기둥이 세워지지 않으면 음부의 권세에 흔들리고,
세상 속에서 천국 열쇠로 천국을 여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늘과 접속이 끊어지고
유한한 내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기도의 대상을 모르면 기도는 남에게 하는 위선이 되거나,
자기에게 하는 자기 암시가 되거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중얼거리는 주문이 됩니다.
기도의 내용을 바로 알지 못하면
기도가 기복이거나 자기 목적 성취이거나
자기 이기심 충족이거나
심지어 어떤 나라, 어떤 사람에 대한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에 따라
기도하는 자들의 색깔이 달라지고 목적도 정체성도 다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즉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하는 것인데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늘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늘은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우리는 저 높은 곳 어디, 이런 생각이 금방 떠오릅니다.
맞습니다. 하늘은 저 높은 곳입니다. 이 땅과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의미를 그렇게만 생각하면 그 뜻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 금식,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세번 동일하게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란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숨어 계신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편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히 계신다는 뜻입니다.
전파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잘 모르나 우리 곁에 분명히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뜻을 저 높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은밀한 중에 계시다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늘은 창공 Sky가 아니라 영어로 헤븐입니다.
그 헤븐은 창조된 우주의 어느 곳에 있는 물리적 장소는 아니라,
설명을 한다면, 아마 땅의 삼차원과 구별되는 높은 차원,
세상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어떤 높은 지점,
과거 현재 미래란 삼 시제의 시간을 하나의 시제처럼 볼 수 있는 곳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땅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입니다..
이런 하늘이 없다는 것이 무신론이라면,
이런 하늘은 있지만 땅과는 연결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이신론이고,
하늘이 있는데 그 하늘은 땅의 모든 곳 속에 있다고 하면 범신론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늘은 땅과 분리되어 있지만 땅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땅을 초월해 있지만, 땅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다고 하신 것입니다.
땅과 연결된 곳
땅과 분리되어 있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발전소와 저수지가 도시와 분리된 곳에 있지만, 전선과 관을 통해 도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와 분리되어 있지만 전파를 통해 지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헤리 포터나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판타지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법의 세계와 현실세계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헤리 포터, 나니아 연대기의 피터와 수잔과 에드먼드가 두 세계를 넘나 듭니다.
물론 이것은 동화의 세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십시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계의 경계를 매일 넘나들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은 땅과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땅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늘은 은밀한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고,
하늘이 땅에 보일 정도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방해전파로 수신이 제약을 받는 것처럼,
땅은 죄와 사탄의 방해전파로 하늘과의 연결이 심한 제약을 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잘 연결된 곳은 일부 장소로 제한됩니다.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은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임시거처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지만, 성막과 성전을 통해서 땅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전쟁터의 전투 지휘소처럼 다른 나라의 대사관처럼, 그곳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물론 그곳만이 하늘과 땅이 유일한 연결지점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돌배게를 베고 자고 있던 광야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모세가 발견했던 불타는 떨기 나무, 엘리야가 깊은 좌절 속에 머문 동굴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곳이 하늘과 연결된 땅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그런데 그 하늘이 어떤 곳인지 신약에 가면 더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죄와 악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올라간 하늘이 어디입니까?
저 창공입니까?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경)
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인데, 그 보좌 우편에는 십자가의 승리를 거두신 어린 양 예수님도 앉아 계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사자와 같은 왕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도 하늘이 열리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있을 때 하늘이 열렸는데, 보니 그 하늘,
즉 그 하나님의 보좌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어린 양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에게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한 14:13)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예수님이 우편에 함께 계시는 하늘 보좌인데, 그 보좌가 땅 위에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자 하나님의 지상 보좌였습니다.
신약 시대는 그 곳이 어디일까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그곳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교회입니다.
교회가 땅 위에 거하는 하늘, 하나님의 지상 보좌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하는데, 그 하늘은 땅과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땅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 보좌입니다. 그곳은 여기서 멀지만 동시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여기에 계시다는 말도 됩니다.
여기서 기도의 안테나를 높이면, 이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과의 접속이 일어나고,
기도하는 곳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골방이 됩니다.
지금 우리들이 선 땅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땅의 상황이 너무 힘들고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하늘과 연결된 곳이니 어떤 아픔 고통 음부의 권세가 넘실대더라도 그곳에서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우리 아버지
자녀와 아버지
둘째,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아버지란 말이 산상수훈에서만 12번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5장 45절, 48절, 6장 1절, 7장 11절),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7장 21절)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6장 4절, 6절, 18절),
‘너희 아버지’(6장 8절), ‘너희 하늘 아버지”(6장 14절, 26절, 32절)
이렇게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이기 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지켜야 할 계명이고
주기도문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한다면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녀의 특권
먼저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부르는 놀라운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가 매우 높은 분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접근도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 부탁을 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자녀는 언제든지 아버지에게 갈 수 있고, 개인적인 요청도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큰 특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의 요구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녀보다 자녀를 더 잘 알고 더 필요한 것,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장 9-11).
나쁜 사람도 아버지라면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우리는 우리에게 무관심한 어떤 신이나, 우리의 기도를 귀찮아 하는 신에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기도를 하되 신뢰하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최선을 주실 것을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주어진 특권이고 태도입니다.
자녀의 소명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한다는 의미가 그것이 전부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언제든지 아버지에게 나아가 원하는 것을 쉽고 구하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자녀로 기도한다는 의미 전부일까요? 우리는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한복음 1:12)를 얻었는데,
그 권세는 부잣집 아들이 원하는 것을 다 얻고, 맘대로 쓸 수 있게 된 그런 권세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에게는 특권만이 아닌 소명이 있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자녀됨의 권세를 잘 사용하여 자녀가 가진 소명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소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버지의 일과 자녀의 일이 다른 경우가 많지만,
고대사회는 아버지의 일에 이어 받는 것이 소명이고 영광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는 중요한 이유는
자녀에게 주어진 소명을 잘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녀가 감당해야 할 하늘 아버지의 일이 무엇입니까?
아담을 생각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도 얻었지만
동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 다스리는 책임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권세를 받아 자기가 처한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흘러 나가도록 하는 책임을 가졌다면
그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소명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출애굽시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출 4:22 -23).
노예된 그들을 아들로 삼으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장자로서 다른 열방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고하나님을 친밀히 알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로 입양된 의미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온 땅에 보여주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 가는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
열방 중에 제사장 나라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그 일을 계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아들로 선택된 의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와 교회도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우리를 죄라는 영적 애굽에서 출애굽을 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요 1:12)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이후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한 20:17)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었으니,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하는 특권을 누리라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은혜를 받는 자녀됨의 특권이 큽니다.
그러나 동시에 음부의 권세가 넘실대는 세상에서 천국 열쇠를 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회복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은,
독생자를 보내면서까지 세상을 회복하려는 아버지의 일에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러 세상에 온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러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무리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며,
그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통로가 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 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땅의 더 많은 곳이 하늘과 연결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좌와 연결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에 흔들리지 않고 이 땅에서 천국 열쇠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땅에도 계시고, 하늘에 계시기에 지금 이곳에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과 내 땅은 접속되기에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십시오.
세계 곳곳이 고통과 눈물이 넘치고 있고,
아프카니스탄과 미얀마가 어려운 가운데 있고 지구는 회색지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기에 기도합니다.
내게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에게 기도합니다.
환자가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아는 의사를 신뢰하듯,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을 신뢰하고 다 맡기고 내려 놓으면서 기도합시다.
동시에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들로서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이 땅에서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맡은 직분을 통해서 내가 행하는 역할을 통해서
아버지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 나라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이곳에 가정에 상황 속에 일터 속에 임하도록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시기에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에게,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와 미래와 소명과 역할과 강함을 더 잘 아시는 아버지에게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합시다.
2021 년 8월22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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