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13일 (수)
2월13일 아침.
성지순례의 마지막날이자 암만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이틀밤을 묵었던 호텔에서 짐을 꾸려 차에 올라 마지막 일정, 첫코스 마다바로 향했다.
가는길에서 본 코닥필림간판, 내가 10년동안 코닥17분현상소를 했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컷 찍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런 필름판매간판을 볼 수없다.
요르단이란 나라가 적어도 우리나라보다 15년이상 뒤져있는 나라라는 증거다.
마다바
마다바는 인구가 약 6만 명의 요르단 왕국 마다바주의 행정 수도이고,
요르단에서 다섯 번째의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며
약 92%가 무슬림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약 6%가 되는데,
이곳 마다바는 그리스도신자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도시이다.
마다바는 요르단 중서부 해발 760m가 넘는 마다바 평원의 옥토 위에 있는 도시로 수도 암만에서 약 30km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도시 마다바는 구약성경에서 ‘메드바’(Medeba)로 언급되고 있는데
요르단 동쪽 고지대에 있는 헤스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고대 통상로인 ‘왕의 도로’가 지나는 중요한 성읍이었다.
고대도시 마다바는 〈구약성서〉에 모세가 이끄는 유대인들에게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아모리족의 땅(민수 21)으로서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에게 할당한 지역(여호 13:16)으로 기록되어 있다.
BC 9세기 유대 왕국이 분열된 후에는 모압의 왕 메샤(메사)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요새로 활용하기도 했다.
랍비 전승문헌에는 마다바의 주민 가운데 유대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 후 106년 마다바는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되면서 기독교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의 박해 때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 당하기도 하였고,
기원 후 451년의 칼케톤 회의록에 근거하여 마다바는 보스트라의 대주교 밑에 주교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기원 후 614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공에 의해 마다바의 비잔틴 도시는 파괴되었고,
8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1880년 초에 이르러, '키락'(Kerak)에서 그 곳에 사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이 종교 문제로 충돌하게 되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크리스천은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카락의 크리스천들은 황급히 당시 통치자 오토만 터키 당국에
그들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땅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청원에 따라, 오토만 제국은 카락에서 북쪽으로 약 85㎞떨어진 곳에 있는 마다바의 땅을 지정해 주었다.
오토만 제국이 오갈 데 없는 카락의 크리스천들에게 과거 크리스천 도시로 명성을 떨쳤던 마다바 지역을 배정해 줌으로서
이곳은 다시 기독교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터어키 당국은 이주자들로 하여금 집은 자유롭게 짓되,
교회만은 과거 비잔틴 시대 교회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만 지을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마다바로 이주한 2천여 크리스천들은 무너진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위에 새 교회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1887년 마다바에 머물던 라틴 선교사 슈마허(G.Schumacher)가 처음으로 도시의 주요 흔적을 찾아냈으며,
1897년에 마다바 지도가 클레오파스 키킬리디스(Cleopas Kikilidis) 신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곳은 역사지도 제작에 있어 가장 오래된 성지(聖地) 지도로 알려진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하다.
폐허가 된 수많은 고대교회들 가운데 한 교회의 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로 1884년 발견된 이 지도는
6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크기는 원래 22×7m였으며,
고대 비블로스(오늘날 레바논의 주바일)에서 이집트의 테베에 걸친 지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지형은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260경~340경)의 〈용어집 onomasticon〉을 따르고 있다.
특히 마다바 지도는 상세한 예루살렘의 도면과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네게브의 수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1896년 학자들이 이 지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네아폴리스(지금의 나불루스)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부분만이 남아 있었다.
1965~66년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원상태로 복원하여 컬러 사진으로 촬영해두었다.
.
마다바에서 제일 먼저 간곳은,
세계적 고대 문화 유산의 하나로 손꼽히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된
마다바의 성죠지교회
교회 간판도 모자이크로 되어있다.
교회간판역시 모자이크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는 542년 11월 20일에 성모 마리아께 봉헌한 예루살렘의 네아 성당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527-565)때 마다바 그리스도 공동체의 익명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 문화를 꽃피우던 마다바는 614년 페르시아인들의 침략을 받았고
635년 이슬람 군에 함락된 후 무슬림 우마야드 왕조(Umayyad)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8세기 중반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파괴된 후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후 1880년 초에 케락(Kerak)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의 박해를 피해 2000여명이 마다바로 이주해 오게 되면서
마다바는 다시 그리스도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는 1894년 9월 30일 마다바에 성당을 지을 수 있는 허가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로부터 받게 된다.
이어 10월 23일 새 성당을 짓기 위해 폐허가 된 비잔틴 성당의 터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하면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가 발견되었다.
성 조지 성당은 1896년에 완공되었다. 이어서 10여 년 동안 모자이크는 화재와 자연적인 노출과 습기 등으로 훼손되다가
1964년 12월 독일의 폭스바겐 재단의 후원으로 1965년 고고학자 Heinz Cüppers와 Herbert Donner에 의해 복원이 되었다.
원래는 21 x 7m 의 크기로 약 200만개의 모자이크 조각으로 이루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실제 크기는 15.7 m x 5.6 m이다.
원래 면적은 94㎡(28.4평)로 성당 남쪽 벽에서 북쪽 벽까지 약간의 테두리를 남겨두고 전체 면적을 포함하는 구조였지만 현재는 25㎡(7.6평)만 남아있다.
원근법과 항공관찰 기법으로 만들어진 마다바 지도에서 학자들은 156개의 성경 유적지들을 확인하였는데
서로 다른 돌 조각 등을 이용하여 성지의 언덕과 계곡, 마을과 도시들을 묘사 한 후 희랍어로 설명을 첨가하였다.
마다바 지도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의도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성지의 장소들을 순례자들이 순례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장소에는 희랍어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260/264경~340경)가 쓴 「지명사전」(Onomastikon)에 나오는 명칭과 일치하고 있다.
지명사전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목록으로써
성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것은 후에 예로니모 성인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성당안은 성화로 가득차고 특히 벽화는 거의 모자이크성화여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별로 훼손되지 않았다.
성당을 나와 느보산으로 갔다.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당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가지 보이시고
여호와게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모압땅에 있는 골짜기 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신명기34:1~6)
느보산은 모세가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땅을 눈으로만 보고 120세에 마지막 숨을 거둔곳인데
날이 좋으면 정말 멀리 사해와 가나안(이스라엘)을 다 볼 수있을것 같았다. 저 장로님처럼 망원경을 가지고 가면 좋을듯.
느보산에서 갈수 있는 이스라엘의 지명과 거리를 표시한 방위판.
여리고는 27km 올리브산과 예루살렘이 불과 46km
우리집에서 교회 가는거리보다 조금 더 멀다.
모세 기념바위
수리중인 모세 기념교회
모세기념교회가 수리중이라 교회안의 기물들을 염소털로 짠 천막에 보관 전시중
옛교회 터에서 출토된 기물들
이태리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작 십자가형상을 한 구리뱀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왕의 대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게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백성중에 죽은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의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아라 물린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4~9)
모세 기념비. 바람불고 추워 둘다 오리털파카에 머플러를 감았는데 지금보니 60년대 늙은 간첩부부같다.^^
밀레니엄에 다녀간 요한 바오로 교황 기념비.
그다음에 간곳은 로마극장 근처의 요르단 민속박물관.
우리집 근처의 민속촌같은곳이라 생각하면 되겠는데 바벨탑과 노아의 홍수등 성경의 이야기들을 ,전설로 ?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형상화한것이 감명깊었다
요르단의 기독교인 숫자가 이스라엘보다 훨씬 많으니 (10%)그럴만도 하지만 이번 성지순례중 요르단을 안 봤으면 어쩔뻔 했나 싶도록 나는 요르단이 좋았다.
가난하지만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훨씬 친절하고 순박한 베두인들도 그렇고 도처에 널린 기독교 유적도 그렇고....
바벨탑
노아가 방주 안으로 짐승들을 들이고 있다.
나일강에서 모세를 건진 에집트 공주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는 모세.
동방박사 세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고 보물을 드리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심.
감옥에서 목이 잘리는 세례요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구석에 서있는사람이 갸롯유다?
그리고는 요르단의 민속의상들과 생활모습들을 재현한것이 수없이 많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랍비
무교병을 굽는 여인들
버스를 타고 도하로 가기위해 중형비행기로 갈아탈 퀸알리아 국제공항으로 갔다.
제주공항보다도 작은 퀸알리아 공항에서 줄을 서서 오래 기다린 끝에 출국수속을 하고 짐을 부치면 도하를 거쳐 인천공항에서 짐을 찾게 된다.
QR401을 타고 16:45분에 암만 출발 19시 20분에 도하 도착
QR882 로 01:50분 도하 출발 오후 4시 45분 인천국제공항도착.
10박 11일의 성지순례가 무사히 끝났다.
다른 사람들은 서둘러 떠나고 우리 교회팀만 남아 감사 기도하고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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