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토) 오후
아얄론 국립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오늘의 최종목적지 갈릴리로 향해 떠났는데
가는길에 가이사랴빌립보가 아니라 가이사랴항구에 들렀다.
가이사랴빌립보
http://blog.naver.com/hesed414/150151661366
는 이곳의 글을 참조.
.
가이사랴
가이사(씨저)의 성읍 이라는 의미
팔레스틴의 지중해안의 항도로,
본래는 베니게에 속한 요새 도시로서
이라고 불리우고 마카베아 시대에 알렉산더 얀나예우스에게 점령되었다가
후에 로마 영이 되었는데, 황제 아구스도는 이것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다.
가이사랴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
당시까지 가나안을 지배했던 건축광,헤롯왕(주전 37- 주전4)에 의해서였다.
헤롯왕이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 지역에 있는 항구로는 이스라엘의 명군이었던 솔로몬왕 시절에 세워진 욥바라는 곳이 유일한 항구였는지라...
(욥바 항구는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위해 북쪽 레바논으로부터 금과 백향목 등을 수입하기 위해 세웠던 항구)
가나안 북쪽 지방에 있는 도르 항구와 남쪽 지방에 위치한 욥바 항구 사이에는
배들이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가나안 해안지역으로 자주 불어닥치는 폭풍을 만날 때 피항할 마땅한 다른 항구가 없었기 때문에
헤롯은 아테네에 있는 피레쿰 항구보다 더 크게 가이사랴에 항구를 건설함으로
그곳을 통해 로마의 선진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는 한편
사마리아의 비옥한 농토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로마로 수출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증대시키는데 크게 활용함으로
자기가 가나안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알리고자하는 야망의 있었기에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며 12년의 대 역사로 인공적인 항구를 건설한후,
주전 13년경 항구의 이름을 자기에게 이땅을 준 로마황제를 위하여 가이사랴라고 고치고 훌륭한 항구 도시로 일변시켰 시켰다
가이사랴 항구는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돌로 메워서 건설했는데
바다를 메우는 데 사용된 돌들 중에는 가장 큰 것은 가로 15m, 세로 3m, 높이가 2.7m나 되는 것이 있었다고 하며
이렇게 지중해 연안에 건설된 가이사랴 항구의 총 너비는 61m에 달하여 당시로는 아주 큰 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가이사랴 항구에는 큰 항구에 걸맞는 부대시설들도 많이 세워졌는데
지중해를 왕래하는 선원들이 거주하는 수많은 아치들과 가나안 쪽으로 약간 높은 언덕에는 신전이 세윘는데
이곳에서 항구를 향해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져서 항구에 오고가는 배들을 지켜 볼 수 있었고
하역시설도 아주 특별하게 건설되어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물건을 하역하면 곧 바로 지하통로를 통해 지하 저장실까지 운반하기 쉽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헤롯왕이 세운 가이사랴의 치밀한 설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항구 총 너비의 절반은 지중해로부터 가이사랴 해안으로 부닥쳐 오는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로 건설되어
파도의 첫 차단장치로 축조되었고, 나머지 절반 가량은 그 위에 성벽과 여러 망대들을 세워
외부로부터 침입해 올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을 얻기가 몹시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헤롯왕은 가이사랴에서 필요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멀리 갈멜산으로부터 식수로 사용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9km에 달하는 도수교를 건설했다.
물은 다리 위로 흐르도록 되어 있고, 먼지와 모래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뚜껑을 설치해 놓아
오늘날까지 도수교의 모습은 로마시대에 한 쌍의 다리를 추가시킨 형태로 일부가 남아 있다.
헤롯의 원형 경기장
AD 2세기 무렵에 마차 경주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 길이 450m, 폭 90m, 3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 중간에 이어져 있던 기둥들은 발굴되지 않았고 27m 높이의 반암 오벨리스크가 지금도 경기장 안쪽으로 세워져 있다
거대한 ‘U’자 형으로 헤롯 시대에 만들어 졌으며 전차 경주나 운동 경기, 검투사와 맹수와의 싸움, 오락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12줄의 좌석이 있었고, 약 10,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관중석에 앉으면 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오며 시원한 바다 바람과 아름다운 지중해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으므로 전망이 아주 좋다.
경기장 북쪽에는 철로 만든 전차와 말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원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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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발견된 모든 극장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헤롯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그 후 수백 년간 사용되었고 약 4,000석 가량의 관중석을 가지고 있다.
이 야외극장 무대에서 연극이나 노래를 부르면 지중해 바다 바람이 불어서 뒤쪽까지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현재도 좌석 번호가 있고 사용되는 야외극장이다.
헤롯왕은 이와 같이 웅장한 가이사랴 항구를 약 13년동안에 완성하고BC 10년 개막을 기념하여 축제를 벌렸다.
헤롯왕이 벌린 축제에는 음악회를 비롯하여 짐승과 사람과의 격투기 경기와 경마쇼 등이 화려하게 개최되었으며,
그 후로 로마 황제 카이사르를 위한 축제로 매 5년마다 동일한 축제를 벌렸다고 한다.
이렇게 가이사랴는 경기장, 수로, 황제 예배의 대신전 등을 갖춘 전형적인 헬레니즘 도시가되었고
팔레스틴 전체에 대한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제압하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AD 6년왕위를 빼앗긴 후는 로마 총독과 그의 군대가 여기 주둔했다.
AD 3-4세기에는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섞여서 살았고, 그 중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오리겐과 유세비우스가 살았다.
초대 교부였던 오리겐(AD 185-254)은 AD 231-250년 까지 머물면서 이곳에서 수많은 기독교 서적을 수집해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AD 260-340)는
‘교회사(Ecclesiatical History)’등 많은 책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AD 640년 아랍의 정복과 파괴로 폐허만 남게 되었고,
AD 1101년 5월 17일 프랑스 십자군인 루이 9세 왕에 의해서 가이사랴 성벽이 다시 건축되었고
성벽 밖의 주위로는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를 파서 바닷물을 채워 넣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비하였다.
현재 가이사랴에 남아있는 성벽은 십자군 시대의 성벽이 남아있으며,
헤롯 시대의 가이사랴는 십자군 시대의 가이사랴보다 3배가 더 컸고, 비잔틴 시대의 가이사랴는 무려 8배가 더 컸다고 한다.
가이사랴는 AD 1265년에 회교도인 이집트의 맘룩 왕조에 의해서 정복되고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AD 1873년 PEF(The Palestine Exploration Fund)에서 처음으로 과학적인 조사를 하였고,
1959년-1964년 사이에 이탈리아 조사단이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벌였다.
현재 가이사랴는 국립공원이며 거대한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현재도 발굴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있다.
신약성경을 보면 .
스데반의 순교후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 이디오피아의 내시에 대한 전도와 세례 등을 거쳐
가이사랴에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고 거기서 살았으며
베드로가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회심시켰고.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향 다소로 돌아갈 때, 제 2차,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늘 이 성읍을 지나갔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유대인의 암살을 피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
총독의 소재지로서 치안이 잘 되어 있고, 또 본래 이방인의 도시여서 유대인의 제멋대로 난동 부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2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총독 벨릭스, 베스도, 헤롯 아그립바 등의 앞에서변론했고, 여기서 다시 로마로 압송되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사형당했으니 바울의 마지막 방문지가 되었다.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가이사랴에서 백성들에게 공적인 말을 할 때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라고 높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주의 천사가 치므로 곧 벌레가 먹어서 죽임을 당했다(행12:20-23)
이도시를 건설한 헤롯 아그립바는 AD 44년에 여기서 죽었다.
( 백과사전과 인터넷에서 옮겨온 지식.)
옛날의 화려함은 폐허로 남고 바닥의 모자이크흔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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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화려한 항구도시가 ,날씨가 좀 흐렸음에도....오늘날에는 신혼부부들의인기있는 야외촬영장소가 되어있다.
날시가 흐려 빨리 어두워진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가이드의 시간 안배가 잘못된듯,
깜깜해져서야 선상예배가 예정되어있는 갈릴리에 도착했다 그래도 성찬포도주와 빵?이 미리 준비되어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나가 한밤중의 성찬식을 치렀다.
대표기도
성찬식에 사용된 납작한 커다란 건빵모양의 빵? 마치 두거운 마분지로 만든것처럼 보였지만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담백한 맛,
남아서 가지고 와 버스속 간식으로 썼다.
두분의 장로님이 분잔과 분병을 하셨다.
올리브나무로 깎아만든 포도주잔. 성찬식이 끝난후 모두 기념으로 가지고 가라 하셨다.
전직 양수리 카페촌 가수였다는 히브리대학출신 키큰 가이드의 부드러운 팝송도 듣고
선주의 환영사도 듣고 다시 부두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는데 바로 들려오는,
대한민국!! 그리고 강남스타일 !!
한국의 인기가 과연 짱이었다.
성찬식을 마치고 숙소인 마간홀리데이빌리지로 갔다.
(이것은 아침에 찍은 마간빌리지)
우리 일행은 갈릴 호숫가 마간 빌리지에서 묵었다. 이곳은 마간 키브츠(Kibbutz)에서 운영하는 수익사업의 한 모델이라고 한다. 한국인 순례객들이 얼마나 많은지 키와 함께 한국어로 된 안내서를 받았다.
마간 키부츠는 갈릴리 호수의 남쪽 해안 지역에 위치하며,40만 평방㎡의 농장에 바나나와 대추야자, 아보카도, 망고, 포도 등을 재배합니다이들 중 일부만이 기브츠 거주자들이 소비하며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판매되거나 외국으로 수출합니다.
다른 하나의 중요 수입원은 관광사업입니다1969년 캠핑촌으로 시작된 마간 홀리데이 빌리지(MA'AGAN Holiday Village)는 현재 148개의 방과 방갈로를 갖춘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휴양시설입니다. 260여개의 다른 기브츠들과 마찬가지로 마간 기브츠 역시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이해 설립되었습니다
토지와 주택의 공유제도 각 가정에 대한 동일한 급여 장애자와 노인들에 대한 완전한 보조 집접 민주제- 의사결정과정에 멤버들 참여
기브츠내의 다른 시설들; 식당 보육원 세탁소 박물관을 겸한 문화센터
오늘날 마간 기브츠는 젊은 세대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보다 가족적이고 개인적인 공동체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저희 마간 기브츠에 대하여 알려주시길 바랍니다우리 마간은 여러분의 즐겁고 편안한 여행을 기원합니다.마간에서 다시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밤에 도착했기에 키를 받고 짐만 옮긴후 바로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일출이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잔뜩 기대를 하였는데 구름이 끼어 우물 쭈물 하는 사이에 해가 떠버려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갈릴리 호수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참 깨끗하고 아름다운 휴양시설이었다.
대추야자열매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은행처럼 보이는 대추야자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101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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