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건너 구름에 달 가듯이

성지순례7일째(10).....마가의 다락방교회,다윗성문,베들레햄 예수탄생교회,

왕언니 2013. 4. 16. 03:04

 

예수무덤교회를 나와 마가 다락방교회로 갔습니다.

 

 

마가다락방교회(최후의 만찬, 성령강림)

무교절의 첫날,곧 유월절 양잡는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음식을 잡수시게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매

예수께서 제자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가는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게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막14:12~16)

 

 

 

 

 

 

 

 

   

 

복음의 내용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그 장소와 위치를 정확하알아낼 수는 없지만

이미 비잔틴 시대에 시온산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장소(마르 14,12-31)여기고 성역화 되었다.

4세기에 최후의 만찬 장소 근처에 요한 (vescovo Giovanni, 386-415) 주교에 의하여 새로운 대성당지어졌고,

그때부터 그 지역의 명칭이 '시온산', '그리스도인 시온'이 되었다.

그 후 이 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 군에 파괴되고 폐허로 남아 있다가 십자군 시대에 다시 최후의 기념성전(Coenaculum)을 지었지만

그 후 이슬람에 의해 파괴 되었고  폐허가 된 이곳을 1333년 나폴리 왕 로베르또와 왕비 산치아가

이집트 술탄 말렉 알 나시르 호멧으로부터 매입하여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 봉헌 하였고,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서는 이 부지에 수도원과 고딕식 양식의 2층 기념 성전을 지어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Coenaculum)이라고 불렀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1517년에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대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과 수도원은 이곳이 다윗 왕이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오스만 터키 관들이 빼앗았고,

최후의 만찬 기념 성전 자리에는 1552년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

이슬람들도 다윗을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 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수도원 건물은 다시 이스라엘 정부 손으로 넘어갔고,

1층은 다무덤과 시나고가와 탈무드 학교를 만들었고, 2층의 성령강림 경당은 폐쇄시키고 최후 만찬 기념 성당만 개방 하면서

성목요일과 성령강림 대축일만 말씀의 전례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작은형제회에서는 1936년 원래의 기념 성전터 바로 옆에 부지를 구입하여 오늘날의 최후만찬 기

성전수도원을 지었고,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최후의 만찬 기념 및 성령강림 기념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나무조형물

 

 

이슬람교도들의 성지방향을 알려주는 미랍

 

 

빛이 들어오는 방향이  마가의 다락방교회입구,   아래는 다윗왕의 가묘로 내려가는 계단(폐쇄됨)

 

 

 

마가다락방교회(최후의 만찬기념성당)의 기둥에 있는 펠리칸조형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새인 ‘펠리칸’(Pelican)의  어미는 모성애가 매우 강하여

 먹을 것이 떨어져 새끼가 굶게되면 자기 가슴을 부리로 쪼아 피를 내어 먹인다는 전설이 있다.( 예수님이 살과 피를 다 내어주신것을 상징. )

 

 

 

유리로 내려다본 다윗왕가묘

다윗묘로 내려가는 외부계단

 

광장에 있는 다윗동상.

 

 

 

 

 

 

 

 

 

 

 

최후의 만찬기념교회와 마가다락방교회 사이로 보이는 마리아 영면교회

 

 

 

마리아영면교회

 

시온문(다윗문)위,아래.

여러번의 탈환전쟁으로 총알자국이 선명한 성문

 

 

예루살렘순례를 마치고 베들레햄으로 가는길

 

 

 

팔레스타인지역이라 검문을 통과해야한다.

 

 

 

 

예수탄생교회

 

 

 

베들레헴은 미가 예언서와 마태오 복음에서 이야기 하듯이 보잘것 없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다윗 왕의 고향이라는 사실 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스럽고 자랑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장차 태평성대를 구가할 이상적인 왕,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 예언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이 인구조사를 위해

나자렛에서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하는 다윗 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게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곳이 없음이러라 (눅 2:,4~7)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자유와 그리스도교를 로마 국교로 선언한 후

325년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마카리오가 황제에게 성지에 성당을 세워주기를 청했고,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성지를 방문한 후 3개의 성당을 세웠다.

첫 번째 성당은 예루살렘의 예수 무덤 위에 세웠고,

두 번째는 예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에,

그리고 올리브 산에 세 번째 성당을 세웠다.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성당도 예수님 무덤 성당과 올리브 동산 위의 엘레오나 성당과 함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례나 성녀의 청에 의하여 예수님 탄생 동굴 위에 339년 5월 31일에 세워진 성당이다.

이 첫 번째 성당을 콘스탄티누스 성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당은 510-529년 사이에 불타버렸다.

성당 중앙통로 바닥에 보존되어 있는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누스 성당의 중요한 유물이다.

지금의 성탄 성당은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재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 으로 유명함)가

완공한 것인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성당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회 중의 하나이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점령했을때 거의 모든 성당들과 수도원들이 파괴 되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탄생 성당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의 모자이크가 그들 조상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경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638년 이스라엘을 점령한 회교 군주 오마르 역시 이 성당을 허물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드렸는데,

코란에 보면 동정녀 마리아가 하느님이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님을 종려나무 아래서 낳았다고 하는데,

이 종려나무가 바로 베들레헴에 있었다는 회교 전설 때문이다.


예수님 성탄성당도 가톨릭을 대표하는 프란치스코회와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간의 STATU QUO(현상유지법)이 적용되는 곳이다.

세 종파간 성당의 소유권과 사용권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예수님 탄생성당 대부분은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이다.

단 예수님 탄생 동굴 위의 제대에서 왼쪽 부분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소유이고,

구유 동굴 부분인 구유 제단과 구유는 가톨릭 소유이다.

그리고 1881년 예수님 탄생성당 옆에 지어 카타리나 성녀에게 봉헌한 성당과

예수님 성탄 동굴 옆에 있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경당과

성 요셉에게 봉헌된 경당, 그리고 예로니모 성인 경당과 ,성녀 파울라와 에우스토키오 경당은 가톨릭 소유이다.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예수탄생교회

 

 

 

 

 겸손의문

 

탄생교회 출입문은 아주 낮은데요...높이 140cm, 폭 100cm 정도...예수님 성탄 교회에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위쪽을 자세히 보면 출입문을 막은 흔적이 보이죠?...이슬람이 지배할때 이슬람군들이 말을 타고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문이랍니다.

그래서 누구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요...과정이야 어떻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눅 13:2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처음성당인 콘스탄티누스성당의 바닥모자이크흔적

 

 교회내부에는 붉은색 대리석기둥이 10줄식4,모두 40 개가 있는데 기둥마다 성인들의 그림이 그려있습니다

 

 

 

 

탄생동굴바닥예수탄생자리를 나타내는 14각 별모양.

 

 

 카타리나성당으로 들어 가는문

 

 

 

히에로니무스 동상: Eusebius Hieronymus, 영어: Jerome. 우리말: 예로니모,

 

성 히에로니무스는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고, 베들레헴에서 히브리어로 된〈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 하였다.

이것은 히에로니무스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과 함께 공인된 '불가타(Vulgata) 성서'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로 사용되고 있다. 성서와 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히에로니무스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다.

히에로니무스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중의 하나이다.

 

 

 

불가타 성서 :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라틴어 editio vulgata에서 유래

성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을 펴냈으나,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카타리나성당출입문

 

그리스정교회 제대.

 

 

 

 

 베들레햄 거리풍경...팔레스타인지역이라 좀 촌티가나는듯

 가이사랴로 이동하기 위해 주차장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칼레이터를 타야한다.

 

 

 

 

 

 

점심먹을 시간이 없어 도시락을 들고 아얄론파크 캠핑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