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8일 (금)
어제 오후 타바국경(이집트쪽) 앞에서 이집트 가이드에게 컵라면과 약간의 성금들을 거두어 주고 작별을 한후 2시간여의 입국심사를 거쳐
이스라엘 가이드와 이스라엘 관광버스를 타고 90번 도로를 달려 여리고 에 도착했다.
여리고 인터넨탈호텔에 짐을 풀고 먼지많은 이집트의 여독을 말끔히 풀 만큼 깨끗하고 편안한 잠을 잘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을 통해 제일 마음에 드는 호텔이었다.
여리고
여리고(Jericho)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 서안, 사해(死海)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아 세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성서 이름은 예리고(여리고)이며,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한다.
본래 요르단 영토인 예리코는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관장하고 있다.
현재의 예리코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예리코는 텔 에스술탄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어 BC 5000년경의 집터[住居地] 유적을 볼 수 있다.
텔 여리고는 1952-58년 영국 케논 여사에 의해 발굴된 고고 유적지인데
기원전 8천년 중석기 시대부터의 유적이 발견된 곳으로 세계 역사상 최고의 도시형태 주거지이며,
기원전 3천년에 모세를 따라 출애굽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시나이 사막을 방황하다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와 맨 처음 공격한 도시가 바로 여리고이며,
(구약성서에 의하면 BC 14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성이 함락되었다 여호수아 6:26).
신약시대의 여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인데
예수님께서 이따금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록도 있다
(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누가 19장,선한사마리아사람의 비유(눅10:30) 무대이기도 하다 )
또한 이 곳은 건축광 헤로데스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인데,헤롯은 결국 기원전 4년자기가 건축한 이곳에서 죽었다고한다.
(헤롯왕의 무덤 으로 추측되는곳)
여리고는 아열대성 기후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여름에는 매우 더운 반면 겨울은 포근한 날씨를 형성하고 있어서
열대 과일들이 많은데 망고, 파파야, 바나나, 종려 열매, 오렌지 등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아열대성 식물인 ‘종려나무’를 많이 길러
성경에서는 여리고를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신 34:3, 삿 3:13) 불렀으며,
종려나무의 열매인 대추야자로도 유명해 옛날에는 대추야자의 도시라 불리기도했 다.
관광?지로는 1만년 전의 주거지를 볼 수 있는 텔 에술탄과
예언자 엘리사가 나쁜 물을 소금으로 맑게 하여 좋은 물로 만든 샘이라고 하는 예언자의 샘(엘리사의 샘)이 있고
세례받으신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유혹의 산(Mountain of Temptaton)과
마싸다 ,와
( 헤롯이 죽은 지 60년 후에 로마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인 독립군들이 피신해 저항했던 곳.
마사다 요새를 포위한 로마군은 육중한 흙 진입로(앞부분)를 만들어 언덕 정상에 올라선 AD 67년에야 이곳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요새에 진입했을 때 저항군들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다고 1세기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헤롯궁전
8세기에 세워졌고, 모자이크가 매우 아름다운 옴미아드 왕조의 궁전유적인 히샴궁전(Caliph Hisham's Palace)등이 있다.
여리고에는 과거 유대인과 사나고그인이산 흔적들은 있으나
현재는 요르단 국적을 지닌 아랍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이며 팔레스타인의 정치 중심지이다 (인구 1만명(1990)
(백과사전에서 옮겨옴)
호텔을 떠나자마자 내가 그렇게 마음을 졸이던 R씨가 소천했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내 스마트폰은 공항에서부터 이미 맛이 가서 전도사님과 이권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서울은 지금 세밑이 되어 부산 할텐데 발인이 주일이고 설날이다.
구역식구들에게 부탁을 하고 왔으니 어떻게든 장례가 치러지겠지만,아직 초신자인 미망인이
뭘 잘 몰라 ,아님 시집식구들의 입김때문에 주일임에도 발인하겠다고 하는게 아닌가 하는 염려때문에
이권사님 전화로 계속 통화를 시도해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도사님이 샘물에서 성모병원 영안실로 옮긴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것 같으니
모든것 교회와 구역식구들께 맡기고 기도하고 여행마치고 가보자하셨다.
온달과 나는 이미 예견된 일이기는 하지만 1년반동안 내 피붙이보다 더 가깝게 돌봐온 그인지라
서로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유대광야.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유혹의 산을 자세히 보시려면 이 싸이트를 클릭해보세요
호텔을 떠나 제일 먼저 도착한곳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시험산.
저 산 중턱에 폐허가 된 기도원이 있고 예수님이 40일 동안 기도하신 동굴?이 있다는데...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도 있다는데.....( 우리는 시험산 케이블카 대신 조금 더 가서 마싸다의 케이블카를 탔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험산이보이는곳 상점앞까지 가서 설명을 들었다고 표현해야한다.
나중에 일정표를 보니 <시험산조망>이라고 되어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렇게 건너뛰고 설명만 들은곳이 몇군데 된다.
특히 이스라엘쪽에서 많이 그랬던것 같다.
시험산 앞의 기념품가게 한국관광객들에게 익숙해서 우리가 도착하자
아랍 점원들이 말린과일들을 들고 와서 시식을 시키며 쇼핑을 유도했다.
가이드가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곳곳에 말린과일장사들이 많은데 노점보다는 여기서 사는게 그래도 좀 깨끗할거라는 소리에
여리고의 특산물? 말린대추야자 800G짜리 3상자에 20불하는것을 아이들에게 주려고 3상자를 샀다.
온달이 워낙 쇼핑을 꺼려해서 아마 여행팀에서 우리가 제일 쇼핑을 적게 한편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 간곳은 그 유명한
삭개오의 뽕나무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게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게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근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것은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10)
둘레가 3M,높이10ㅡ, 가지 폭이 10M나 되는 거대한 나무인데 ,예전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되어 있엇는데 개역개정판에는 돌무화과라고 고쳐졌다.
중국성경에서의 번역상의 오류?라고나 할가?
이것은 그 근처의 벤자민인데 우리나라 아파트 거실이나 베란다에 우아하게 놓인 그 벤자민이 이렇게 큰 나무도 있다니 놀랍기만하다.
그다음에 간곳은 엘리사의 샘물 (왕하 2:19~22)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개로 가져오라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물이 얼마나 맑은지 다슬기가 살고 있다 실제로 이물로 여리고의 농작물을 키우는 근원지가 된다한다.
다음에 우리가 간곳은 마사다
유대 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이다.
오늘날 ‘에스-세베(ES-Sebbe)'라고 부르는 곳으로, 엔-게디 남쪽으로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사해 서쪽 해안에 있고,
키르벳 쿰란으로부터는 약 80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가 450m이고 거대한 원기둥을 잘라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밑에서 위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지형을 갖추고 있어,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 그 자체이다.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라가 보면 길이 600m, 폭 250m의 평평한 지형에,
많은 사람이 은신 할 수 있는 장소와 건물들이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마카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카비 일가에 의해 요새화 되었지만
이곳을 더욱 완벽한 요새로 만든 사람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BC 37-4년)이다.
그는 건축의 대가로서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 가이사랴의 건설, 헤브론 막벨라 굴 기념 건축물 등 수많은 건축물을 우리에게 남겼다.
하지만 그는 늘 피해망상에 시달렸던 사람으로 유대인들이 자기를 언제든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디에서 반란을 만난다 할지라도 1시간 안에 피할 수 있는 요새 도시를 함께 만들었는데,
베들레헴 근처의 헤로디움, 요단강 건너편의 마케루스 요새, 그리고 바로 마사다였다.
헤롯 대왕은 마사다의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그곳에 큰 저수장과 3층으로 이루어진 왕궁, 목욕실, 곡식 저장고, 군영, 파수대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헤롯 대왕의 치세 기간 동안에는 마사다를 이용 할 만한 큰 사건이 없었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지게 됨으로써
BC 515년 건축하였던 제2 성전은 서쪽 벽인 통곡의 벽만을 남겨 놓고는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 때, 최후까지 성전에 남아 저항하던 약 960명의 유대인 열심당(Zealot)들은
엘르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의 지휘 아래 마사다 요새로 피신해 로마항쟁을 계속하였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저항의 불씨를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마사다를 함락시키려 하였고,
이를 위해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장군이 이끄는 최정예 제 10군단을 파견하여 마사다를 조기에 함락시키려 했다.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좁은 통로는 로마군이라 하더라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군은 유대인 포로를 동원해 절벽의 경사로를 완만하게 하는 토담을 쌓는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로마군은 3년 만에 성벽에 접근하여 유대인들의 저항을 뚫고 성벽을 허물었고,
날이 밝자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싸늘한 주검 뿐이었다.
당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 전쟁사에서 당시의 장면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도자 엘르아살은 마지막 연설을 통해서 로마인들에게 항복하지 말고 자유인으로 죽자고 말했다.
그 후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한 군데 모으고 불살라 버렸다.
먼저 약자들을 가족들의 손으로 죽이고 열 사람을 제비 뽑아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기들의 부인과 아이들을 끌어안고 목을 내밀었다.
마지막 열사람 가운데 다시 한 사람을 제비 뽑아 아홉 명을 죽이고 최후의 1인도 자살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진 와중에도 단 하나 불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식량 창고였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결코 식량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최후의 증언은 집단 자살을 피해 살아남은 두 여인과 다섯 명의 어린이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노파 1명, 어린이 5명, 엘리아젤의 친척노인 1명 모두 7명이 생존하여 이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로마는 마사다를 방치할 경우 유대 저항의 상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사다를 철저히 파괴하였고
마사다는 그 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1842년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 야딘(Y. Yadin)과 그 발굴단들에 의해
마사다는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거의 2000년 동안 이 요새가 사람의 손에 닿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이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험난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마사다는 국립공원으로 잘 정돈되어 관광객의 트래킹을 위한 샛길이 나 있으며 따로 케이블카도 설치되었다
또한 헤롯 대왕의 두 개의 궁전과 빗물을 저장했던 거대한 수조,
로마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창고 등이 발굴되어 복원되어 있고
로마군이 요새를 둘러서 쌓았던 성채와 그 외곽에 로마군 막사의 유적도 발굴되어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훈련의 최종 코스로
마사다에 올라가 “마사다의 비극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를 외치며 조상들의 저항 의식을 배우고 있다.
로마에 항거하던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
헤롯이 만든 사우나탕의 흔적, 그러나 그는 한번도 사용해보지 못하고 죽었다.
검은선이 원래 있던것과 복원된 부분을 표시하고 있다.
유대인 포로들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망루는 마사다의 성벽보다 높은 위치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저항에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사다 발굴이야기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
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
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
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백과사전에서)
마사다에서 내려 온 다음 사해성경사본이 발견된 쿰란으로 갔다.
쿰란은 주전(BC) 150년 전 부터 주후(AD) 68년 사이에 기도와 명상에 적합한 광야로 나온 에세네파 공동체가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성경해석을 따라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던 곳이라고 한다.
티투스와 로마군단이 여리고에 도착하자 에세네파 공동체는 성경사본들을 항아리에 넣어 주변 굴 속에 숨겨두고 도망했다고 한다.
쿰란 동굴은 길에서 우리가 보기엔 나무도 없는 낮은 바위산 중턱에 아이들이 기어서 들락거릴만한 구멍들로 보이는데 그 안은 아주 넓다고 한다.
1947년 한 베두인(유목민)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다가 이 동굴에 돌을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서 들어가 보니 항아리 속에 두루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필사본을 고물상에 갖다 팔려고 하다 고고학자들과 연결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5개의 성경사본이 있었고
그 근방 11개의 동굴에서 800여개에 달하는 사본을 발견했다고 한다.
에스더서만 빼놓고 모든 성경이 있었다고 한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은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현재 사해사본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쿰란(Qumran)공동체
에세네파(Essenes)는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뻬레 롤랑 드 뽀(Pere Roland de Vaux)가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서 한 묶음의 두루마리(사해사본)를 발견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쿰란(Qumran)공동체라고도 불린다.
고대 기록에 에세네파에 대한 언급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는 달리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떠나 나름의 영역을 다져나갔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원적 삶과 금욕적 삶을 지향하면서 유대광야에 은둔하였다.
그들은 재산을 헌납하여 함께 공유하고 학습과 예배와 일을 함께 했고,
정결의식으로서 침례를 행하였고 공동식사를 실행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Chapter 1)
당시에 결혼한 여성과 노예들을 제외하고도 이들의 숫자는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옥수수와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에세네파는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겼다.
영혼의 불멸과 의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의로운(rightoussness)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존재들로 여기며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노동하며 자급하며 살았다.
최초의 사해필사본이 발견되었다는 동굴입구가 보인다.
쿰란을 나와서 사해체험을 하러 사해로 갔다.
마사다와 쿰란에서도 엄청 더워 땀을 많이 흘렸는데 사해로 갈 수록 햇볓은 점점 강하게 비취고
길가의 종려나무의 푸르름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날씨도 덥고 몸이 비록 안녕치 못해도 바다에 발이라도 담궈보고 싶었지만
우리 부부는 작년 다녀온 사람들말만 믿고, 아니 몸이 부실해서 수영복은 커녕
아예반팔옷조차 가져오지 않았으니 그저 눈으로만....
하긴 이번 여행팀들이 다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라 감히 수영복을 입고 덤비는 사람은 없었지만
머드 체험을 한다고 입은채 들어가는 사람은 몇 있었다.
겁을 주는 경고문
근처에 호텔 스파가 많다는데 우린 그저 지나가는 과객인고로... 먼저 야외 폭포에서 진흙을 씻을 수 밖에
사해(死海)
호면(사해는 바다가 아니고 호수다)이 해면보다 400m 가량 낮아 지구에서 가장 낮은 수역(水域)을 형성한다
북반부는 요르단령, 남반부는 요르단령과 이스라엘령으로 나누어지나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이스라엘군이 서쪽 기슭 전체를 계속 점령하고 있다.
사해는 서쪽의 유대 구릉지대와 동쪽의 트란스요르단 고원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요르단 강이 흘러든다. 길이 80㎞, 너비 18㎞, 면적 1,020㎢, 최대수심은 396m에 이른다.
동안(東岸)의 알리산('혀'라는 뜻) 반도를 경계로 크기가 다른 2개 수역으로 나뉜다.
북쪽의 수역이 보다 커서 호수 전체 표면적의 약 3/4을 차지하고, 수심도 396m에 달하는 반면
남쪽 수역은 수심이 평균 3m 미만이다. 성서시대와 그후 8세기까지는 북쪽 수역 주변지역에만 사람이 살았으며,
호면은 현재보다 35m 정도 낮았다. 호면은 1896년에 해수면하(海水面下) 약 389m로 높아져 최고 수위에 달했으나 1935년 이후 다시 낮아졌다.
사해라는 이름은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BC 323~30)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사해는 히브리인의 조상 아브라함 시대 및 고대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후의 성서사와 관련되어 있다.
〈구약성서〉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주민들의 부도덕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린 불로 멸망했다고 전하는데,
이 두 도시 터는 현재 사해의 남쪽 수역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해는 길이 560㎞의 요르단-사해 지구(地溝) 최하부를 차지한다.
이 지구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북쪽 연장 부분으로, 사해는 이 가운데 지반이 함몰하면서 생긴 거의 평행한 두 단층 사이의 요지(凹地)에 자리잡고 있다.
사해 쪽에서는 모압 고원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동쪽 단층이 유대 지방의 보다 완만한 융기 습곡을 알려주는 서쪽 단층보다 더 잘 보인다.
지구가 생기기 전인 백악기와 쥐라기(6,500만~1억 9,000만 년 전)에는 지중해의 물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뒤덮고 있었으나,
마이오세(700만~2,600만 년 전)에 해저의 융기로 트란스요르단 고지대의 습곡구조와 팔레스타인 중앙부의 산맥이 형성되면서
지각 파열이 일어나 사해 지역이 침강했다. 그당시 사해의 크기는 오늘날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해는 그후 플라이오세(약 1만~250만 년 전)에 현재의 호면보다 약 215m 높은 고도까지 융기해
북쪽의 훌레 계곡지대로부터 현재의 남쪽 경계 너머 64㎞ 지점까지 320㎞에 걸치는 광대한 내륙해를 이루었다.
사해지역의 융기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물이 아카바 만으로 넘쳐 흐르지 않았던 것은,
네게브 중부 고지의 동쪽 연장부를 따라 흐르는 계절천인 와디 알아라바의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0m 정도 융기하여 사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대략 250만 년 전쯤 사해로 유입된 대량의 하천수가 혈암(頁岩)·점토·사암·암염·석고 등 두꺼운 퇴적층들을 쌓았고
나중에 점토·이회토(泥灰土)·연질백악(軟質白堊)·석고 등의 퇴적층이 모래와 자갈층 위로 내려 쌓였다.
사해는 지난 1만 년 동안 물이 강수에 의해 보충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증발함으로써 점차 현재의 크기로 줄어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해 골짜기를 덮고 있는 퇴적층이 1.6~6.4㎞ 두께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알리산 반도와 세돔 산(옛 이름은 소돔 산)은 지각변동으로 이루어진 지형들이다.
세돔 산의 가파른 절벽들이 사해의 남서쪽 연안에서부터 치솟아 있다.
알리산 반도는 점토·이회토·연질백악·석고 등의 퇴적층에 모래와 자갈층이 사이사이에 끼어서 이루어졌다.
알리산 반도와 사해 골짜기 서쪽의 비슷한 물질로 형성된 지층 모두 동쪽으로 경사져 있다.
사해의 남쪽 단애는 세돔 산과 알리산 반도의 융기작용으로 인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바닷물이 이 단애의 서반부를 뚫고 현재의 수심이 얕은 사해 남단으로 넘쳐흘렀다.
사해는 사막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강우량이 적고 불규칙하다.
알리산에는 연간 65㎜ 정도, 세돔(고대 도시 소돔 근처)에는 50㎜ 정도의 비가 내린다.
한편 고도가 낮고 움푹 패어 있어 주변지역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때문에 겨울에는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하다.
1월평균기온은 세돔이 있는 남단이 17℃, 북단이 14℃ 정도이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여름은 매우 무더워 세돔의 8월평균기온이 34℃에 달하며, 최고 51℃까지 올라갈 때도 있다.
연평균 140㎝ 정도의 호수의 물이 증발하며 호면 위에 짙은 안개가 자주 생긴다.
유입 하천들 위의 대기 습도는 5월의 45%에서 10월의 62% 정도로 분포한다.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호풍(湖風)과 육풍은 낮에는 호수 바깥쪽을 향해 불어대지만 야간에는 반대로 호수의 중심쪽을 향해 분다.
요르단 강으로부터 유입되는 수량은 겨울과 봄에 최고를 기록하며, 매년 평균 5억 4,000만㎥에 달한다.
동쪽의 요르단으로부터는 알우자이미·자르카마인·알마우지브·알하사 등 크지는 않지만 연중 물이 흐르는 4개의 하천이 깊은 협곡들을 통해 흘러내린다.
그밖에도 수많은 와디들이 인접 고지대로부터 단기간 단속적으로 유입되며 와디 알아라바의 함몰지로부터도 물이 들어온다.
유황 온천들도 흘러든다.
여름철에는 증발량이 많고 겨울과 봄철에는 하천수의 유입량이 많기 때문에 호수의 수위는 30~61㎝ 사이에서 계절적 변화를 나타낸다.
사해의 물은 매우 많은 염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염분 농도는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높아진다.
사실상 사해에는 성질이 다른 두 수괴(水塊)가 있다. 40m 깊이까지는 표층수로 분류되는 수괴가 존재하는데
이 수역에서는 수온이 19~37℃로 변화하고 염도는 300‰이 채 안 되며, 수중에는 황산염과 중탄산염이 특히 풍부하다.
수심 40~100m의 천이지대를 지나 그 아래에 존재하는 저층수는 대략 섭씨 22℃의 일정한 수온과 약 332‰의 높은 염분농도를 유지한다.
황화수소와 고농도 마그네슘·칼륨·염소·브롬 등이 함유되어 있으며 보다 깊은 곳에서는 염화나트륨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바닥으로 침전된다.
저층수는 염분의 농도가 너무 높아 영구히 바닥에만 머물러 화석화되고 있다. 표층수는 성서시대로부터 2,3세기가 지나면서부터 이루어졌다.
사해의 짠물은 밀도가 높아 사람의 몸이 위로 쉽게 떠오른다.
요르단 강에서 흘러든 담수는 호면에 머무르는데
봄철에는 요르단 강물이 사해로 흘러드는 지점에서부터 48㎞ 남쪽까지 강물의 진흙 빛깔이 호수 수면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농도의 염분 때문에 세균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한다.
홍수가 일어났을 때 요르단 강이나 작은 하천을 통해 유입된 물고기들도 이곳에서는 금방 죽고 만다.
유입 하천 주변에 있는 식물들 외에 사해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이라고는 수명이 짧은 것들뿐이며, 주로 염생식물에 국한되어 있다.
사해는 거대한 소금 매장지로도 유명하다. 소금 광상들이 남서쪽 기슭의 세돔 산 구조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소규모로 채취되던 소금을 개발하기 위해 1929년 요르단 강 어귀에서 가까운 칼리야에 칼륨 공장이 하나 세워졌고,
나중에 세돔에 부속 시설들이 들어섰다.
칼리야의 공장은 1948~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중 파괴되었으나
1955년 사해조업회사(Dead Sea Works Ltd.)가 세돔에 공장을 세운 후 칼륨·마그네슘·염화칼슘 등이 생산되고 있다.
또다른 공장에서는 브롬과 기타 화학제품들을 생산한다.
사해는 분쟁지역인 요르단-이스라엘 국경지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항행에는 크게 이용되지 못했다.
연안지대는 방치되어 있어 영구적인 시설물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세돔의 공장, 칼리야에 있는 2~3개의 호텔과 온천장, 그리고 서쪽으로 엔게디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 정도가 들어서 있을 뿐이다.
이따금 호안(湖岸)에서 소규모의 경작지가 발견되기도 한다.
|
' 강나루 건너 구름에 달 가듯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지순례(9).......베데스타,통곡의 벽,비아돌로로사 (0) | 2013.04.10 |
---|---|
성지순례(8).... 감람산, 겟세마네, 만국교회,주기도문교회,눈물교회,성안나교회 (0) | 2013.03.20 |
성지순례5일째 (6).....시내산,캐더린수도원,누웨이바,타바국경,여리고 (0) | 2013.03.05 |
성지순례 (5)...수에즈운하 마라의 샘,신광야 (0) | 2013.03.02 |
성지순례(3).... 카이로(첫날)..모세기념교회,예수피난교회,카이로 박물관,나일강 (0) | 2013.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