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유황불로 멸망하는 소돔고모라에서 탈출한 롯과 두딸 이 만들어낸? 나라 암만(요르단의 수도)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창세기 19:31,32)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 창세기 19:37,38)
요르단은 중동에 있는 유일한 입헌군주국으로 , 정식 국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이다.
요르단(Jordan)은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정착이 이뤄진 곳으로
6c BC에는 페르시아인의 침략, 4c BC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1c BC부터는 로마의 지배하에 성장.
동로마 지배 후반쯤 7c AD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모슬렘의 침략으로 비잔틴의 기독교 문명을 모슬렘으로 개종.
16c부터 1차세계대전 까진 터키의 지배하, 그 후 영국의 보호하에 있다가 1946년에 독립됨.
1. 요르단의 지리와 기후
요르단은 북쪽으로 시리아, 북동쪽으로 이라크, 동쪽과 남쪽에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서쪽으로 이스라엘과 접해 있다.
요르단은 세 곳의 다른 지역으로 나뉜다.
비옥한 요르단 계곡은 국토의 서부를 지나며
동부 고원은 대부분의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고
동부 제방(East Bank)은 동쪽으로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어진 사막이다.
요르단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나라이다.
전해 오는 얘기에 따르면 동부의 울퉁불퉁한 국경은 처칠이 질퍽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정했다고 한다.
북부의 소나무 숲은 요르단 계곡의 경작된 경사면으로 이어져 삼나무와 올리브, 유칼립투스 나무로 덮여 있다.
사해를 향해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식물들이 살수 없는 곳으로 풍경은 진흙과 염전으로 덮여 있다.
사막 지역은 보통 사막에 사는 동물들, 낙타나 사막 여유, 모래쥐, 토끼, 날쥐 등이 살며
사해 북동쪽의 고원은 멧돼지와 오소리, 거위 등을 볼 수 있다.
요르단은 특히 해양 생물로 유명하여 아카바(Aqaba) 만은 다양한 열대어나 산호가 산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보호구역은 동쪽에 있는 샤우마리(Shaumari)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한때 요르단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영양과 오릭스 영양이 다시 불어나고 있다.
기후는 국토의 끝과 끝에서 극심하게 변한다.
요르단 계곡은 여름에 엄청나게 더우며(보통 40도) 암만과 페트라는 종종 겨울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고원 지역은 보통 따뜻하고 건조하여 20도에서 30도 사이를 오르내리고
사막은 극단적인 기후 변화를 겪어서 낮 동안은 타는 듯이 덥고 건조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차가운 바람이 가끔 불어온다
2. 요르단의 역사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요르단 강 서안의 고고학적 유물은 BC 9000년 전의 것들까지 있다.
BC 3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는 가나안 인들과 아모리트인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그들 다음에는 수메르(Sumer)와 아카드(Akkad)의 왕인 사르곤의 군대가 들어왔다.
BC 1800년경에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목민들을 이끌고 가나안 산맥에 정착했다(이 지역은 현재의 이스라엘과 대충 일치한다).
BC 1023년 이스라엘인들은 사울과 다윗이 이끈 왕국을 형성했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수도로 정했다.
거칠 것 없이 영토를 확장하던 로마는 BC 63년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헤롯왕이나 빌라도 총독을 비롯한 여러 집정관의 지배하에 두었다.
이 지역에서 예수가 태어나 설교하던 것은 이 당시로 믿어지고 있다.
칼리귤라 밑에서 점점 미쳐가던 로마는 일련의 유태인 반란을 촉발하였으며
몇 년간 지속된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팔레스티아 주가 선포되었다.
이 패배는 유태인 국가의 종말을 고했으며 세계 각지로 유태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AD 33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예전에 불법적이던 이 종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갑자기 모두가 성지와 예수의 무덤이나 탄생지 등을 포함한 많은 건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나라를 지배한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638년 예루살렘은 오마르(Omar) 왕에게 함락당하여 모하메드가 성전의 꼭대기에서 천국에 오른 이슬람의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되었다.
기독교 세계는 이러한 것에 반대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였고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닥치는 대로 살육하며 거의 100여 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기독교/이슬람교의 다툼 끝에 1187년 이슬람의 손으로 다시 넘어갔고
이슬람의 맘룩 왕조는 1291년 마지막 십자군 성채를 함락시켰다.
이후 500년 간 팔레스타인은 매우 조용했다.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이 나라의 지배권은 단조롭고 규칙적으로 옮겨갔지만 결국은 오토만 제국의 지배로 결말을 맞게 되었다.
많은 사막의 요르단인들은 이런 변화를 피해 베두인의 성채에 남았다.
오토만 제국이 1차 대전 이후 무너지면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압둘라 왕의 지배하에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을 만들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아랍인과 유태인은 서로 전쟁을 시작했다 -
모든 사람들이 이 전쟁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동안 트란스요르단은 강 서안과 예루살렘 일부를 점령하고 국가명을 요르단으로 고쳤다.
1953년 후세인 왕이 즉위하면서 요르단은 관광산업과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은 이스라엘이 강 서안과 거대한 구경거리인 예루살렘의 반을 다시 차지함으로써
요르단에서 싹트기 시작한 관광산업을 망쳤다.
6일 전쟁 동안 요르단은 돈벌이가 될만한 땅들과 농지를 잃고
대신에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도망친 수천 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난민 인구의 PLO세력은 후세인 왕의 권력을 위협하였으며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되어 급진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레바논으로 넘어갔다.
1995년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경제 장벽을 없애고 안전과 수자원을 공유하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팔레스티나인들로 하여금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자기들끼리 이권을 챙김으로써
자신들은 지역에서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낳게 하였다.
동시에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국가 평의회 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연계도 강화하며 협정을 맺으려 노력했다.
최근 요르단은 1991년 걸프 전쟁으로 중단된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후세인 왕은 민주주의로 요르단을 이끌기 시작했으며
이슬람행동 노선(무슬림 브라더후드와도 연계를 맺고 있으며 상당히 원리주의적인 정책을 가진)은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정당이 되었지만
1999년 후세인 왕의 죽음으로 앞날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왕은죽기 바로 몇 주전 장남인 압둘라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꼭 가보아야 할 곳
이곳은 대략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한때 중동전역에 걸쳐 열 개 도시의 상업 동맹이던 폼페이 황제의 데카폴리스(Decapolis)에 속해 있던 곳이다.
제라쉬는 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의 계속되는 침입과 747년의 지진으로 쇠퇴해갔다.
1920년대에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이 도시의 10%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제라쉬의 입구는 한때 개선문이었지만 현재는 남문이 되어있다.
성벽 안에는 제우스 신전과 특이하게 타원형 모양을 한 공공 광장이 있다.
신전 뒤에는 남쪽 극장이 있는데 1세기에 세워졌으며 한때 5000명의 관객을 수용하고 북쪽까지 600m 길이의 주랑을 갖춘 길이 있다.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은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바로 중앙에 있다.
페트라는 더 이상 높게 평가할 수 없는 곳이다.
요르단, 아니면 전 중동에서 이곳처럼 매혹적인 곳은 없을 것이며 페트라의 주민들도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만한 값을 요구할 것이다.
BC 3세기경의 아랍 왕조인 나바테 왕조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절벽을 깎아만든 놀라운 도시이다.
1000년이 넘게 잊혀져 있다가 겨우 1812년 발견된 페트라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와 마지막 십자군에서 등장했다.
발견 후부터 1980년대까지 이곳은 여러 베두인인들이 살았으나 이들에게 불만스럽게도 이주하도록 조치가 내려졌다.
매일같이 3000명의 사람들이 찾아오므로 조용하고 명상적인 관광은 바라기 힘들다.
이곳을 제대로 보려면 2,3일은 있어야 하며 이것은 입장료 JD20을 한번 이상 내야한다는 말이 된다.
깊은 협곡에 위치해 오직 좁고 구불구불한 바위 틈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페트라는
회색과 황색 띠가 둘러진 오래된 빛깔의 사암을 파서 만들어졌다.
가장 유명한 유적은 카즈네(Khazneh)로 바위틈을 지나 들어가면 처음 보게 되는 아름답게 조각된 정면이다.
수도원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며 정상으로 올라가면 아주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다른 유적으로는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아직도 발굴 중인 날개달린 사자의 신전 등이 있다.
페트라를 둘러싼 지역은 급격하게 개발 중에 있다.
페트라 자체와 주위 마을인 와디 무사(Wadi Musa)는 호텔들로 넘쳐흐르며 더 많은 호텔들이 건설 중에 있다.
식당들도 많으며 길거리 노점상들이 모인 시장에서 비싼 레스토랑까지 다양하다.
숙소에 묵지 않을 경우에는 암만에서 150km 거리를 당일치기로 여행할 수 있지만 이 방법은 시간이 정말 없는 경우에만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 편안한 작은 마을은 암만에서 30km 남쪽에 있으며
6세기의 팔레스티나를 그린 모자이크 지도인 '마다바 지도'를 포함해 아름다운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로 유명하다.
2백만 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마다바 지도는 나일강과 사해, 예루살렘, 예수의 무덤에 세워진 교회 등을 그리고 있다.
마다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 모자이크는 그리스 정교회 교회인 세인트 조지(St George)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마다바는 7세기의 성모와 예언자 엘리아스의 교회,
더 오래된 히폴리투스(Hippolytus)홀 등을 포함해 현재 조심스럽게 복구 중인 고고학 공원에 있다.
고대 암몬의 수도인 랍바(Rabbah)는 오늘날 요르단 수도인 암만
요단강에서는 동쪽으로 약35㎞ 지점의 요르단 고원지대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대 랍바성은 오늘날 암만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산 언덕에 위치에 있다.
랍바는 왕성과 물들의 성(삼하12:26∼27)으로 불리며 완전한 이름은 암몬 족속의 랍바(신3:11)이고,
랍바는 그 단축형이다(삼하11:11, 렘49:3).
이 도시의 이름은 헬레니즘 시대에 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 BC285∼246)에 의해 재건된 후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불리게 되었으며
후에는 이 명칭이 사라지고 암만이라 불리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부 페트라 유적을 남긴 나바테아 왕국이 발전하였으나,
1세기~2세기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7세기에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아라비아와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아랍화,이슬람화되었으나,
다마스쿠스에 자리잡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여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시리아 지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어 그 변경으로서 도시문명도 차츰 쇠퇴하였다.
19세기 이 지방을 지배하였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로부터 도망하여 온 체르케스인을 시리아의 인구가 적은 지역에 살게하여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에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놓였다.
1923년 히쟈즈 왕국의 왕족 압둘라-빈 후세인을 영입하여 트란스 요르단 왕국을 세웠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46년 이스라엘과 1차전쟁후 West Banks(현 팔레스타인) 과 East Banks(요르단)를 단일국으로 선포하였으나
1967년 2차 이스라엘과의 전쟁후 West Banks를 이스라엘에 양도하고 적대관계를 청산,
1994년 평화협정을 인준하였음.
주민의 대부분이 아랍인 회교도들로, 유대인과 영국인도 존재하지만
주민 중 70만명이 팔레스타인 피난민으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관의 원조로 생활하고 있다
국토의 서단에 레바논, 안티레바논 두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그 사이 폭 10-20km의 대지구대가 있다.
이것이 갈리리 호수, 사해, 아카바인 등을 거쳐 아프리카로 이어진다.
헤르몬산에서 발원한 요르단 강이 남쪽으로 흘러 사해로 들어간다.
면적 91,900제곱km(한반도의 약 42% ), 인구 약520만, 수니파 모슬렘이 90%.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성 기후가 공존함으로 밤낮의 기온차가 매우 큼
2013년 2월12일 (화)
성지순례일정도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오늘 일정표에는 카락성,아르논골짜기 십자군성채답사와 모세의샘, 페트라 라고 되어있었는데
암만시타델과 모세의샘, 페트라 를 보는것으로 끝이 났다.
비가 잘 오지 않는 요르단인데 어젯밤 호텔에 들어올때 부터 조금씩 내린 비가 아침까지 계속되어
여행가방속에 챙겨넣은 우산과 우비를 써먹을 기회가 생겼다.
아침식사후 버스를 타고 제일먼저 간곳은 암만시타델
시타델(Citadel)은 로마극장 반대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옛성터로, 암만의 전경이 멋있게 펼쳐지는 곳.
현재는 폐허로 잔재들만 남아 있지만 계속 복구공사가 진행중이라고한다.
2세기에 지어진 헤라클레스 신전(The temple of Hercules)은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입구부터 도시까지 계단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나 지금 계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 외에도청동기시대의 성채부터 로마시대의 방어성벽,
우마야드 왕조의 왕궁(8세기) 및 주거지, 6세기의 비잔틴 교회 등 현재 활발하게 복원작업이 진행중이거나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고한다.
시타델에서 내려다본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왕국 어디서나 볼수있게 걸린 커다란 요르단국기
요르단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이 되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 가톨릭과 기독교, 이집트 정교회 그리고 그리스 정교회 등이 포함).
실제로 암만 시내의 야경에는 십자가를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고한다.
암만 시내 중심가에는 요르단 왕이 예배를 드리는 커다란 화려한 모스크 바로 앞에
가톨릭 성당과 그리스 교회가 있어 대조를 이루는 묘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또한 인근의 매드바라는 도시는 기독교인들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매드바 출신이다."라고 하면 바로 기독교인으로 인식이 될 만큼 나름대로 기독교인들도 활동을 하는 곳이 요르단 지역이라고한다.
(우리교회에서 파송한 서안나전도사도 암만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다만 전도는 금지되어 있어서 선교활동 시에는 조심을 해야 한다고...
또하나 다윗에게 아내를 뺏기고 죽임까지 당한 우리야의 슬픈 이야기가 있는 암몬성
해발 850m로 암만의 중심부에서 제일 높은 산에 수도 랍바 암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성의 동, 서, 북편은 또다른 산들로 감싸여 오늘날의 예루살렘 성보다 더 견고한 요새, 진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군대는 이곳에 진을 치고 난공 불락의 요새 랍바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전장에 나가지 않고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신하를 보내 불러다가 정을 통하였는데 곧바로 밧세바는 임신을 하고
밧세바가 임신한것을 고하자 우리야를 휴가로 불러들이나 충신 우리야가 밧세바와 동침을 하지 않자
밧세바와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두려워한 다윗은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야의 손에 당시 총사령관으로 암만에 머물고 있는 요압에게 비밀편지를 보낸다.
4, 5일 길을 나라를 생각하고 부하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달려왔을 우리야의 마음은 늘 전쟁터에 머물러 있었다.
그 비밀 편지에 자신을 죽이라는 내용이 있었는 줄도 모른 채 우리야는 다윗과 요압의 모략으로 희생당하고 만다.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긴급히 후퇴하라. 우리야로 맞아 죽게하라...
" 전쟁에 능했던 장군 출신으로 암몬성의 지리적 위치에 능했던 다윗의 기막힌 전략이었다.
지시는 충성스런 요압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고, 힛타이트 출신 우리야는 영문도 모른 채 전사하고 만다.
우마야드궁전 BC720 우마이야드 아랍왕조의 궁 터 로마건축물을 증축 행정담당 통치자가 거주한곳이라고....
왕궁의 물저장고
구약시대에는 요단강 동편지역에 모압족속과 암몬 족속이 살고 있었다.
암몬 족속은 지금의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중심으로 요르단 중북부 지대를 점해서 살았고,
모압족속은 지금의 요르단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살았다.
암몬 족속이 살던 북쪽은 지금의 시리아 땅이다. 지금도 고대 아랍어가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 남아있다.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성경상의 다메섹 북쪽지역으로 가면 마룰라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하다.
모압족속은 남쪽에 성경상의 세렛강과 북쪽의 아르논강을 경계로 삼고 살았다. 아르논강은 암몬족속의 남쪽 경계가 되기도 한다.
출애굽의 경로가 구체적이고 자세하거나 완벽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근거해 보면,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바로 모압족속의 남쪽 경계인 세렛강에 이른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족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우리가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자 하니 길을 열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모압족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 그럴 것이 생각을 해보면 당시의 인구는 어마어마했다
장정만 60만명에 총 인구 약200만명이 남의 나라 경계에 이르러서
너희 나라를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면 어느 나라가 허락을 하겠는가?
그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전쟁을 하여 이겨서 이 땅을 통과할 것인지 아님 우회하여 갈 것인지 기로에 서는데
결국은 우회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회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이 모압족속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이 모압족은 다윗 왕의 외가가 되는 나오미가 (룻기)속해 있던 민족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왕이 사울 왕의 박해를 피해 사해를 건너 모압 땅에 피신했을 때 다윗왕을 환영하고 받아주는 일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모압족속을 쳐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드는 역사가 이어지게 된다.
아르논 강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시 암몬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역시 우리가 너희 나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이르기를 원하므로 너희 나라를 통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한다.
하지만 역시 이들도 거절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암몬 땅을 통과하여 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암몬 땅으로 들어가 이들과 전쟁을 하면서 느보산에 이르게 된다.
후에 이 암몬 땅 역시 다윗왕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바뀌는 역사가 이어진다.
여행사제공정보
그다음에 간곳은 암만고고학박물관
암만 고고학 박물관(National Archaological Museum)
암만의 유물이 선사시대부터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시타델 중앙에 위치하고 규모는 작지만 융성했던 암만의 역사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곳.
' 강나루 건너 구름에 달 가듯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흥호수둘레길완주 (0) | 2018.04.17 |
---|---|
성지순례 끝(16)...마다바,느보산 ,민속박물관. (0) | 2013.07.02 |
성지순례(13) 나자렛 수태고지교회~ 벳샨국경~ 요르단으로 (0) | 2013.05.18 |
성지순례(12)제 8일째....팔복교회,오병이어교회,베드로수위권교회,가버나움. 가나혼인잔치교회 (0) | 2013.05.16 |
성지순례(11)......가이사랴항구와 갈릴리 선상예배, 마간 기브츠홀리데이 (0) | 2013.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