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더 낮게, 더 낫게 " 다시 시작하게하시는 예수님

왕언니 2022. 7. 8. 23:31

요한복음 21:15~19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더 낮게 더 낫게”

 

–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예수님 –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서 방문을 잠근 채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첫 번째는 제자 도마가 없었을 때였고, 두 번째는 도마가 있었을 때입니다.

그때  그들은 주님의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만져 보면서  감격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참 메시아임을 비로소 알게 된 감격의 순간이었지만

곧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웬일인지, 베드로는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했고,

다른 제자들도 동의하고 같이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는데,  예수님은 다시  이들을 찾아가십니다.

이것이 제자들과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왜 세 번째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일까요?

 

갈릴리 바다

 

두 번이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은 제자들에게 너무 특별한 경험이었기에

그 부활의 현현 사건을 두고 놀랍고 신기해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러나  다시 나타나셨던 주님은 이전처럼 늘 그들 곁에 계시지 않았기에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잘 몰랐고

 

그때 이전 같으면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주님의 뒤를 다시 따르자고 했을 법한데,

풀이 죽은 베드로가 자신은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고 말하였다”(요한복음 21:3, 새번역)

 

이리하여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 마디로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먼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누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라고 소리치자

그들은 아마 경험 많은 어른 어부라고 생각하고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는데,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혀

다들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데, 베드로에게 불현듯 한 기억이 스쳐갑니다.

 

 

 

기억의 소환

 

그때도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그때 자기의 배를 빌려서 말씀을 전하셨던 한 분이, 말씀을 마친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라고 하여 그 말을 따랐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엄청난 고기들을 보고 놀라다가

대체 갈릴리 바닷속을 훤히 보듯 하시는 이분이 누구시길래

바닷속을 이렇게 본다면 내 마음의 바다 속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갑자기 자기 속의 죄들이 생각나서 그분 앞에 무릎에 꿇고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8)

그러자 그분은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누가 5:10)라고....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대신,

인생 바다에서 사람을 낚는 일을 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그 기억이 났는데

곁에 있었던 요한이 ‘주님이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텀벙 뛰어내립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가 아닌

주님을 처음 만났던 기억의 바닷속으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만남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한 상황에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신 것은

베드로에게 회복시키려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필 그때 잡힌 고기 숫자가 153마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를 기록한 것은 그 숫자가 어떤 의미를 지녔기 때문인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각 알파벳은 숫자 값이 있습니다.

“시몬”과 “물고기”란 헬라어 단어 숫자 값을 합하면 153이 되고

고대 교부 제롬은

당시 선원들은 온 세상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로 알고 있었기에

153마리는 세상의 바다에서 건져야 할 사람들을 상징하게 됩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에스겔 47:10).

 

여기 엔게디의 알파벳 숫자 값이 17이고 에네글라임은 153이고,

신기한 것은 1부터 17까지를 더하면 153이 됩니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익투스’인데

익투스의 철자가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의미하는 문장의 첫 글자입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153마리 물고기는,

예수의 복음으로 세상의 바다에서 건져야 할

온 세상 사람들이란 의미라고  보아도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이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던 그때의 소명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배반의 새벽과 모닥불

 

그 소명은 그다음 장면에서도 확인되는데...

물로 뛰어들어 옷이 흠뻑 젖어 새벽 추위에 떨며 올라온 베드로 앞에

주님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 모닥불 곁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모닥불은 베드로에게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소환시켰는데

예수님이 대제사장 집 뜰 안으로 끌려 가신 그 새벽,

모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모인 이들은 뜰에 피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지만,

예수님만 새벽의 차가운 이슬을 맞으면서 홀로 서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당신은 저 예수와 한 무리라"라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베드로는 ‘아니라’고 시침을 뚝 뗐지만.

다른 이가 또 묻자 부인하였고,

또 세 번째 묻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가복음 14:71)

 

내 말이 거짓이면 내게 저주가 내려도 좋다는 식으로...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그가

‘그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 자리를 떠나,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말씀이 생각나서

한 구석에 가서 울었습니다.

 

이랬던 그 과거의 사건을 다시 해석하는 어떤 계기가 없었으면,

베드로는 계속 이 기억에 끌려 다니다가 내적으로 더 움츠러들게 될 터인데

새벽 공기처럼 쌀쌀해진 이 관계를

모닥불 같은 온기로 따뜻하게 녹일 계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느냐?

모닥불 곁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지만,

그때의 죄책감에 젖은 마음은 아직 녹지 못하고 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베드로의 이름을 부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한글 번역에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남성도 중성도 되는 단어로서 영어의 these에 해당됩니다.

‘이 사람들’도 되지만, ‘이것들’도 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같이 조반을 먹는 다른 제자들을 옆에 두고,

그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비교하는 질문이었다면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로서,

예, 사랑합니다라고 답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했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고 하면서

갈릴리 바다에 와 있는데,

그런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것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즉 “물고기 잡는 일이 더 좋아서 갈릴리 바다로 왔니?”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갈릴리에 고기 잡으러 온 것은

그것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주님에 대한 죄송함 때문에 온 것을 주님은 다 아시기에,

주님을 사랑한다는 답을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사람을 낚는 일을 다시 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와 주님과의 대화는 내용으로 보자면 이 한 번으로 족한데

예수님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사실상 동일한 내용을 두 번을 더 물으십니다.

 

이렇게 질문하실 때 예수님은 두 번은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묻고

한 번은 필레오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 다 , 필레오 친구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에 다른 단어에 의미를 두지만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헬라 말이 아닌 아람 말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런 단어 구분이 없었지만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대화의 뉘앙스를 고려해,

헬라어의 두 다른 단어를 번갈아 쓴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이 큰 근심이 되어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7)

 

 

그러면 왜 한 번이면 될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것일까요?

베드로의 말을 믿지 못해서일까요? 베드로의 진실성을 의심해서일까요?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입으로, 세 번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여

마음의 쓴 뿌리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미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는 말은

곧 사람 낚는 어부의 자리로 돌아오라, 곧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이런 침묵은 부름을 거부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응답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이전처럼

물론입니다. 제가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라는 식의

응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자신에 찬 답 대신에

눈가에 맺힌 눈물로 답하며,

저는 따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그런 응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 21:18)

 

이것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를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한복음 21:19)

 

이제 진짜 따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해도 저는 부인하지 않겠다’는

이전의 자신감 넘치는 패기가 있었을 때,

베드로는 그 자신감으로 어린 여종의 질문 앞에

세 번이나 부인하면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기에,

이제는 제가 어떻게 주님의 양을 돌보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겠는가 싶어

그래서 감히 내 양을 치라는 말씀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할 때,

주님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게 하는 힘은 우리의 자신감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빠진,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하고 낮아진 자세입니다.

 

세상은 힘이 세면 모든 문은 다 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문입니다.

힘으로 그를 꺾을 수는 있어도 힘으로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고 주님의 양을 치게 하는 힘은

자기의 부족을 알고 매일 주님을 의지하는 겸손의 힘이고,

자아의 힘을 뺀 사랑의 힘입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이전과 달리 더 낮아져,

더 나은 제자가 되어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너로서 나를  따르라

 

이제 베드로는 다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양을 먹이는 목자란 소명을 다시 회복합니다.

그런데 그 소명을 어떻게 이룹니까?

 

예수님과 말씀을 나눌 때 요한이 곁에 있었는데,

베드로가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그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한복음 21:22)

 

요한과 베드로가 받은 소명은 다 사람을 낚는 것이고 양 떼를 치는 것이지만,

그 소명을 이루는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낚다가 부름을 받았던 베드로는 많은 이들을 전도함으로 그 소명을 이루었고,

그물을 깁다가 부름 받은 요한은

교회가 핍박을 받아 힘들 때 교회를 지키는 일을 함으로 그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자기 길을 감으로 그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릴리

 

우리는 부활의 주님이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실망하여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들 각각의 이유로 갈릴리 바다에 와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처음에는 너무 안타까워하다가

부득불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상황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편리함이란 갈릴리 바다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럴 수 있지만,

그 시간 속에서 주님에 대한 마음이 더 간절해야 하는데

반대로 더 식어지는 냉랭함의 갈릴리 바다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최근 더 고도화된 인터넷 세상을 살면서,

복음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 정치적 관심, 연예계 흥미와 같은 물고기들을

인터넷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경제적 상황이 힘들어지면 삶의 유일한 관심이 되는 인생의 갈릴리 바다에서

소득과 이익이란 물고기를 잡는 것에 올인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점점 예수님을 만났던 기억, 그분의 십자가 사랑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교회가 창립된 지 많은 햇수가 흘렀는데,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의 비전과 꿈이 희미해지고

그동안 형성된 틀과 조직 안에서 안주하는 갈릴리 바다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를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 오늘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물으십니다.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한 질문 속에 모든 질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창립기념일을 맞은 오늘 행한 성만찬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런데 너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자신은 이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그 질문을 받을 때 ‘이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주께서 아신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인생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삽니다.

모두 인생 바다에서 직업이란 그물로 소득이란 물고기를 잡으며 삽니다.

이것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보다 더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

물고기를 잡고 사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낚지만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낚아야 한다는 소명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다시 소명으로 되돌아왔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직업과 상황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직업, 그 일, 그 삶이 가진 영적 차원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46번째 창립기념주일을 맞았는데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 교회가 여러 사역이 있고 조직이 있어

그런 조직을 운영하다 보니 이 모든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에

한 방향으로 얼라인먼트 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너무 분산되어 있지 않은지?

교회가 그 소명을 이룰 때 그 교회만의 길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우리의 교회에 주어진 길을 걸어왔습니다.

검소 절제, 외부 지원 확대, 분립개척, 작은 교회, 건물이 아닌 사람,

약자 우선, 영혼구원과 사회적 책임 등의 길을 갔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소명을 이루는 우리의 길이었지만,

이 중에서 바뀔 것도 있고 추가될 것도 있습니다.

이제 엄청나게 바뀔 미래 시대에서

우리의 소명을 이룰 우리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명을 감당하려면 교회가 가야 할 새 길을 찾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교회는 공동체이지만, 또 우리가 모두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개개인들이 각각 교회로서

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소명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각자의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이루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갈릴리 바다에서 그 직업을 통해 물고기도 잡지만,

그것을 통해서 사람을 낚는 일을 하는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도들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진 교회로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가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교인들이 안으로 신앙의 열심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바뀌어도 소명은 바뀔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데

포기할 수 없다면,

답은 오직 하나, 새롭게 시작할 것뿐,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소명을 붙들고 시작하려면,

언제나 출발점은 하나의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매일 ‘이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면서 살기를,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신 그 소명을 알고 살기를,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나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걷기를,

그래서 인생 바다에서 사람을 건지고 살리는

위대한 소명이 다시 회복되기를

그것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2년 7월 3일 설교 (정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