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7장 27~31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요 12장 31~33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것을 보이심이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왕으로 오셨다면, 그 구원은 어떠한 것이며,
또 어떻게 그 구원을 이루십니까?
이것이 성경과 예수님의 생애을 보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핵심 질문입니다.
겟세마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 중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가지시며
유월절을 배경으로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고,
십자가가 가져올 영적 출애굽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틀에 고착된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구원의 모습을 다시 알려주셨는데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고
다른 제자들은 필요한 것을 사러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요일 저녁은 깊어 갔습니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 깊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데려 가시며
지금은 깨어 기도할 때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흩어져 자고 있었고
예수님만 ‘기름 짜는 틀’이란 뜻을 가진 겟세마네 동산의 이름처럼
이마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존재의 진액을 짜듯 밤새워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제목은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란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피하려거나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유월절 식사에서 자신의 흘리는 피가 ‘많은 이를 위해 흘리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셨는데,
이는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와 관계가 있음을 알려주시는데
즉, 이 죽음은 언약을 파기한 자가 받게 되는 심판이고
그 심판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 영영 분리되는 영벌이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상의 육체적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가복음 14:34).
하지만 예수님이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결국 죄인들이 이 잔을 마시는 길 밖에 없고,
그러면 우리를 구원하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그 잔을 마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셨고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드리는 기도를 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때 저만치서 가룟 유다가 포졸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에게 허그하며 볼을 맞대었고
포졸들은 그 신호로 예수를 알아보고 바로 체포합니다.
단검을 휘두르는 베드로의 저항이 있었지만 ,칼을 쓰지 말라고 하시고 조용히 붙잡혀 가십니다.
유대와 로마의 재판석
그때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은 잡혀 오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깊은 밤,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신속히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재판정을 엽니다.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가 유죄가 될 말을 하도록 유도질문을 하였으나
실패하자 자기 사위 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보내고,
그곳에 모인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고 증거를 제시하지만,
죄목을 찾지 못하고 증거도 서로 모순이 됩니다.
격분한 대제사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고 답하시고,
이어 자신을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답합니다.
“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가 14:62)
그러자
“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마가복음 14:63-64)
더 이상 다른 증인과 증거가 필요 없다며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사형을 언도합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는 일만 남았고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이려면 돌로 쳐 죽이는 유대의 사형방식이어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어서,
도리어 그 돌이 자신들에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교활한 그들은 이미 알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깁니다.
하지만 신성모독죄는 로마법 아래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에게 반로마 반역과 선동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예수님이 로마에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으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고 고소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지만, 만약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준다면,
시이저를 반역하는 것이란 한 마디 말로 빌라도를 코너에 몰아세웁니다
급소가 찔린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죄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 줍니다.
이렇게 십자가 형을 받으신 예수님은 몇 시간만에 사형수 신세가 되어 버렸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노리갯감처럼 다루면서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관을 만들어 씌우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려서 조롱합니다.
“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태 27:28-30)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왕관을 씌우고
임금의 홀이라며 갈대를 손에 들리면서 조롱을 당하신 후
소름끼치는 사형장,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로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손목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를 붙입니다.
가시 왕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 27:42)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 홀을 들리고,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를 붙임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가짜 왕이라고 거듭해서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 백성을 구원하는 왕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어떤 적도 이기지 못하고, 어떤 백성도 구원하지 못함으로
자신이 왕이 아님을 입증하는 자리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 죽음을 두고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1-32)
악한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해당된다고 심판했지만,
그 십자가가 도리어 세상을 심판하고 있으며,
세상 임금인 사탄이 세상권력자들을 부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조종했지만,
그 십자가로 인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이 쫓겨나게 되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고 비방하고 사람들이 떠났지만,
마침내 그들이 예수님에게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체 죄수로서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십자가 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가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 임금을 이기고,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에게 온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을 심판함
세상을 심판함
첫째 십자가는 세상을 심판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을 받을 정도의 죄인이라고
유대 법정과 로마 법정에서 두 번이나 심판했고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사실 그 십자가는 도리어 예수님을 심판한 이들이 악임을 드러냄으로 심판한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예수님을 심판했습니까?
자기에게 거역하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을 내리면서
자신을 거의 신의 자리에 올려 놓는 교만한 로마 황제,
타락한 성전을 책망하는 선지자를 성전을 파괴한다며 도리여 죽이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
자신의 정치적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죄 없음을 알고도 사형 언도를 내리는 비겁한 빌라도,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죽여도 된다고 외치대는 이기적이고 무지한 군중들,
십자가 형에 처한 자를 물건 다루듯 하는 무자비한 로마 군병들,
스승도 팔아 버리는 배반의 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형으로 심판함에 함께 한 악들의 카르텔이었습니다.
이런 악들이 만든 십자가가 도리어 악의 실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이 저들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었던 그 교만, 위선, 비겁합, 이기심, 무자비함, 배반은 우리들 속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들도 그 중의 하나의 배역을 맡았을지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심판해서 십자가에 매달았던 이는 그들이면서 또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십자가에 매달려야 할 죄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그들을 심판한 것이고, 모든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죄인임을 알려줍니다.
세상 임금을 몰아냄
둘째 십자가는 악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악 뒤에 있는 세상 임금을 마침내 쫓아냈습니다.
십자가를 만든 악들 뒤에는 더 깊고 어두운 악이 있습니다.
교만한 왕, 위선적 종교인, 비겁한 정치꾼, 어리석은 군중들,
잔인한 군인, 배반하는 제자의 자유의지 뒤에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악한 힘인 타락한 인간의지를 부리는 유사 인격체 사탄이 있습니다.
인간은 상당부분 자유자인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죄의 본성에 끌려 다니는 죄의 종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가 전부가 아니며,
로마가 생각하는 반로마세력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적은 보이는 적들 뒤에 있습니다.
그 적은 그들 속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 속에도 있고,
그 적은 우리의 죄들 뒤에 우리를 원격조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속의 악을 자기가 잘 보지 못하고,
그 악이 구조화되면 그 구조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보지 못하고
특히 악한 자 사탄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짜 적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적을 이길 수 없고,
그 진짜 적을 이기지 못하면 참 승리는 없습니다.
로마가 반로마세력을 모두 십자가 형에 처함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무자비함과 폭력이란 악에 패배한 것이며,
계속 더 많은 복수의 폭탄을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가 로마를 이기고 강국을 이룸으로 로마란 악을 이겼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들은 곧 내부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두고서 서로 죽고 죽이는 암투를 벌이면서
다른 종류의 악에게 쓰러질 것입니다.
대선과 지선이 허리케인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두 차례의 선거는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지지하는 인물이나 정당이 다르면
말을 나누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황무지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정치가들이 표를 위해 편을 갈라 놓고,
험담과 음모로 상대를 천하에 죽일 죄인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겼다면 그것이 이긴 것입니까,
아니면 거짓과 술수란 보이지 않는 악에 패한 것입니까?
여전히 더럽고 추악한 정치의 틀과 방식을 그대로 붙잡고 있는 채로 싸우고 있다고 있다면,
진짜 적은 놓치고 있는 것이고
백성들에게 진짜 승리를 안겨다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의 악, 구조화된 악, 그 뒤의 세상 임금 사탄은 그 존재를 알아채는 것부터 힘듭니다.
하물며 그것을 이기는 것은 더 더욱 힘듭니다.
과연 누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깁니까?
그것을 이기려면 악의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그 악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악을 드러내는 것은 악에 의한 희생이 한 방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에 대한 무기는
로마보다 더 강한 무력이나 유대의 열심당원보다 더 강력한 증오와 복수나,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의인인체 하는 제사장들의 교활함이 아닙니다.
그런 무기로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악을 이기는 힘은 악에게 당하지만 악으로 대적하지 않는 힘,
그 고통을 감내하는 힘,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그 짐을 감당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자신에게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기적의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자기를 살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힘입니다.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힘입니다.
겉으로 보면 십자가는 모든 힘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악을 이기는 진짜 힘이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작용하고 있는 곳입니다.
희생과 사랑과 정의의 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했고,
그 힘이 타락 이래로 아담의 자손들을 결박시켜 왔던 악한 임금의 머리를 깨부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로 한 사랑의 힘이
여자의 후손의 사탄의 머리를 밟아 버린다는 창세기의 예언을 이루게 했습니다.
이것을 정치에 적용하자면 정치 속의 악을 이기는 길은
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 놓는 다른 힘이어야 하고,
교회에 적용하지만 세상의 악을 이기는 힘은
교인수나 헌금액수가 아닌 더 거룩함이란 힘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악에게 패한 것 같지만 사실 십자가는 악을 이긴 위대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적을 싸워 이기신 참 왕이 되였습니다.
죄 용서와 언약 갱신
셋째 십자가는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회복과 구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이란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다는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파기하고, 피조물이 가져야 할 마땅한 순종의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심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심판을 포함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왕이 백성을 대표하듯,
예수님이 심판을 기다리는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는‘대표자’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죄 짐을 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이 죄인의 죄를 대신함으로
그 죄인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심판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고멜이 다시 호세아의 아내가 되듯이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자녀가 되는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러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졌기에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해 감격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자신은 전투장에 나가지 않고 종들을 시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고통은 전혀 모른채 왕궁에 앉아서 명령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아니고,
자신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과 악을
가장 극심한 형태로 친히 다 당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모함과 배신과 무정함과 버림받음과 오해받음과 찔리심과 매맞음과 죽임 당하심을 다 겪으셨습니다.
지도자가 된다고 하지만 백성들의 고통의 현실을 한번도 겪은 적이 없고,
경제적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것을 겪은 적도 없으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
백성의 아픔은 가슴에 전혀 느낌이 없는 추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모든 고통을 대신하여 당하셨기고 그 길을 직접 걸어가셨기에
예수님은 내 모든 고통과 내 아픔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공감하십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두 팔을 벌려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품 안에서 상처와 고통까지도 치유를 받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 살바드로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
십자가, 왕위 등극자리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어떤 곳입니까?
악에게 진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악을 이긴 위대한 승리입니다.
아무런 일을 이루지 못한 자리인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룬 자리입니다.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악을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으로 이기신 자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예수님이 사형수로 높이 매달린 자리인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한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쓰신 가시 관이야말로 왕이 쓴 진정한 왕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높이 매달린 모습을
악과 죄를 이기고 높이 들리신 왕위 등극의 자리라고 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알고 나아오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이렇게 십자가를 왕위 등극의 자리처럼 보게 해주는 십자가에 대한 그림이
십자가를 위에서 본 유명한 살바드로 달리의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란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란 왕좌에서 왕으로 계시면서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사랑으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계시록
십자가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바울 사도는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요,
약해 보이지만 사탄과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의 강함이요,
수치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어린 양이 악과 권세를 이긴 만왕의 왕이라고 합니다.
“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시록 5:12)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과정을
당시 로마 황제의 즉위식 장면에 빗대어 설명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정치범으로 치욕스럽게 죽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적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즉위식 행사였다고 소개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참이고 승리이고 구원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음성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음성은 그 통치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악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이루심으로 최후 승리를 가져오게 하셨고,
결정적 용서를 주심으로 최후 구원을 보장하게 하신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은 Strive unceasingly이라면
(계속해서 정진하라)
예수님의 마지막 말은 It is finished(다 이루었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악을 이기고 죄를 용서하시는 결정적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에 사탄을 이기고 죄를 용서하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것도 자신이 친히 가시 왕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승리와 용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악과 모순을 보면서 너무 힘들 때 좌절이 되고 실망이 될 때,
예수님은 악에게 결정적으로 이기셨음을, 그리고 지금도 악과 싸우시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좌절하고 실망하지 마시고 계속 선을 행하며 사십시오.
자신의 일로 힘들고 속상하고 어려워, 누가 내 이런 마음과 고통을 알까 싶을 때,
예수님은 내 고통을 이미 겪으셨고 아심을 잊지 마십시오.
두 팔을 펼쳐들고 우리를 안으시는 십자가 안에 안기십시오.
죄로 인해서 죄책의 짐에 무거우시다면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용서의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십자가만이 진정한 승리와 구원을 주시고 십자가 상의 왕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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