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시는 예수님
눅23:39~45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요한복음 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길이 끝나는 곳
삶은.... 길을 가는 것, 그런데 그 길이 늘 뚫려 있기만 하지 않고,
종종 막히고, 길을 잃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목적지에 늦기도 하고
한 길이 끝나면, 다시 길이 열리기도 하고 , 닫히기도 합니다.
길은, 끝남(ending)과 이어짐(anding)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길을 가다가 언젠가 삶의 모든 길이 다 끝나는 지점, 죽음의 벽 앞에 섭니다.
그렇게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삶의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또 다른 길로, 혹은 더 높은 차원의 길로 이어지는 것은 없을까요?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ending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의 유일한 진리일까요?
죽음이란 끝남의 ending을 넘어, 다른 삶으로 이어짐의 anding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지상의 삶은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ending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새로운 삶으로 이어주는 놀라운 이어짐 anding이었고,
그 이어짐을 가져오는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사, 살아 있을 동안 우리를 그 길로 걸어가게 해 주시고,
죽을 때 더 놀라운 삶으로 이어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길을 만드시고 길이 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이 되신 것일까요?
죽음으로 길을 만드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생명의 길을 만드셨고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였는데,
유대인들 편에서 예수님을 그들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불편하여
유대 대제사장들은 ’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빌라도 편에서는 ‘자칭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그의 재판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거부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걸렸고,
그 죄명이, 아람어, 세계 언어인 희랍어, 제국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신 예수님은 유대인들과만 관련이 된 존재로서 죽은 것입니까?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다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법률, 과학, 기술 등의 좋은 업적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세상에 크게 기여한 여러 민족들이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세상에 크게 기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입니다.
그들(유대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한복음 4:22).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은
유대인이 다른 민족보다 더 우월하고 탁월해서 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경험한 구원이, 곧 ,온 세상이 경험해야 하는 구원의 길이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역사가,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구약은
유대 백성들이 다른민족보다 더 선하고 탁월하다고 기록하지 않고,
더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죄성을 갖고 있다가 쫄딱 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어 그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구원 경험이 곧 모든 인간의 구원 경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수행이나 깨달음이나 선행을 통한 구원의 길을 말하는 종교도 있지만,
참 구원은 ,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거역하는 죄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어 구원이 임한다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그 길이 모든 인류가 경험해야 할 구원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유대인에게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왕 메시아가 나신다는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그 유대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동방의 박사가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온 세상을 위한 왕으로 여기고 멀리서 경배하러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사실 유대인만이 아닌 만민을 위한 왕으로 죽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쓰였다는 것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사실 인류의 왕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죽으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백성을 지키고 구원해야 할 왕이 그 사명에 실패했다거나,
왕의 죽음이 도리어 백성을 구원하는 결정적 승리가 되었다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전자로 여겼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왕으로서의 죽으심은 도리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승리였습니다.
유대인의 편에서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적인 로마와 싸우기는 커녕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왕으로서 로마만이 아닌 유대인 속에도 있는 인류 모두의 적인 악과 죄와 싸우셨습니다.
이 적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적으로, 세상의 방식으로도 역시 이길 수 없는 적입니다.
그런데 이 적을 십자가의 희생이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수님이 그 적에게 죽임을 당하심으로 도리어 그 적을 이기신 것입니다.
왕이 백성들의 대표자 자격을 죽임을 당하고 이기셨기에,
백성들은 그 왕 안에서 승리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왕의 죽음은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한 실패한 죽음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을 진짜 적에서 구출한 위대한 승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고,
그전에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여기서 ‘人子’는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하나님께 왕권을 받은 왕이란 말입니다.
왕인 ‘인자’가 자기 목숨을 많은 이들의 대속물로 준 것입니다.
( 대속이란 ,
자신의 죽음을 노예로 팔린 이들을 다시 값을 지불하여 사는 값으로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고통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하는 왕이면서 우리를 위한 종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사자와 같은 왕이,
죽임 당한 어린양이 되어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는 실로 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이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의 죽음이었고
그 고통이 너무나 커, 로마 시민은 어떤 중범죄인라도 십자가형은 처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못에 박힌 손과 발에 매달린 몸, 흐르는 피와 타는 목마름으로
숨을 쉬지 못해서 다리로 몸을 들어 올리는 일을 반복하다가 서서히 질식되어 감,
새와 동물들이 몸을 쪼거나 상해를 입힘,
십자가 상에서 벌거벗음으로 인한 받는 수치와 같은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육체적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상 예수님은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제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3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말은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영적 고통을 두고 외친 외마디 절규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육체적 고통이 아닌 영적 분리에 대해 절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란 영적 고통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그 무서움을 잘 모르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온몸으로 다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때가 안식일 바로 전날로,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시신을 매달아 두면 땅을 더럽힌다고 여겼기에 안식일 전에 시신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때는 최대 명절 유월절이 있는 가장 특별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 전에 시신을 내리려고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합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으면 죄수의 다리를 꺾어서,
더 이상 다리로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하게 함으로 곧 숨이 막혀 질식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기에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인이 창을 갈비뼈 속으로 힘껏 찌르자,
몸에서 엉긴 피와 체액이 분리되어 흘러나왔습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한 19:34).
죽음을 확인하고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장사를 하는데
유대 장례는 시신에 향료 처리를 해서 수의로 싸서 무덤에 두는 첫째 장례가 있고,
무덤에서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유골함에 넣어 둘째 장례가 있는데
예수님은 그 첫째 장례를 치르고 빈 무덤에 장사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이렇게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끝이 난 것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가 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더 놀라운 삶을 여는 새로운 시작이 일어났습니다.
‘끝남’(Ending)이 ‘이어짐’(anding)으로 바뀐 것입니다.
더 높은 삶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먼저 살아 있는 우리들의 삶을 더 높은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가지면서 자신의 죽음을 언급할 때,
이 말을 들었던 제자들이 심히 근심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 가시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한복음 14:4).
그러나 제자들이 그 길을 모른다고 답하고,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곧 그 거처로 가는 길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7)
예수님의 죽음이 끝이라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끝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들을 위해 준비하는 하나님의 거처로 가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서 우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의 ‘거처’는 원어로 ‘모네’인데 대저택에 딸린 작은 방들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가족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앞으로 생길 가족들을 대비해서
아버지의 집에 딸린 작은 방들을 마련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의 뜻하신 바는,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 될 것이며,
구원의 길이 모든 인간에게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만이 아닌 온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한 14:13)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하되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먼저 고속도로가 잘 만들어지면, 그 고속도로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산업과 경제를 일구어내듯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만들어 놓은 구원의 대로를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많은 이들을
하나님이 예비한 거처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들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2명 제자를 포함한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지만,
제자들은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거처에 거할 가족이 되게 함으로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또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란
더 높고 더 풍성한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한복음 14:14)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시행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이전까지 예루살렘 성전이 그 역할을 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의 심령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있는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 되고,
또 교회 공동체가, 기도란 영적 교제가 있는 새로운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가 생겼는데, 교회가 바로 그런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살아 있는 우리들이 먼저 ,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더 높은 삶을 살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살리는 더 풍성한 삶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삶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살아 있는 우리를 성전 됨의 더 높고 풍성한 삶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죽은 후에도 더 놀랍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또 한번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 양쪽에 반로마 정치범 사이에서 죽으셨는데,
이때 오른편 죄수가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
그러자 주님은 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죽음을 앞둔 그에게, 죽은 이후 오늘 바로 낙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산 자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고,
죽은 자들에게 낙원으로 가도록 합니다.
그러면 죽은 이후 가게 될 낙원은 어떤 곳입니까?
성경은 죽음 이후를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죽음 이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 그 이후의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첫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 자는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그 낙원은 안식의 상태입니다.
고된 일과를 끝낸 단 잠과 같은데, 하지만 무의식 상태의 잠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자신은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낙원은 의식을 가진 깊은 안식과 평안입니다. 이것이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첫째 부활’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 이후의 삶’이 최종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시록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죽음 이후의 삶’인 낙원에 들어간 자입니다.
뚜렷한 의식을 가진 채 하나님과의 영원한 안식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첫째 부활에 들어간 자는 복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게 하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로 죽음 이후 그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의 부활한 육체로 살아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최종적 구원입니다.
이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첫째 사망은 겪었지만 둘째 사망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첫째 사망을 통과하지만, 십자가의 길로 낙원에 들어간 자는 둘째 사망이 없고
예수님 재림 시 몸이 부활한 후에 받는 심판인 둘째 부활을 경험하게 되나,
그렇지 않으면 육체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란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죽음 이후의 삶’인 ‘낙원’과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시고,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끝남과 이어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를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란 더 높은 삶으로 이끄시고,
죽을 때 낙원과 천국이란 더 놀랍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길이 되십니다.
끝남의 엔딩을, 이어짐의 앤딩으로 바꾸십니다.
우리는 삶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을 걷는 우리 속에 죄성, 분노, 갈등, 욕심, 관계 깨어짐 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하면서 삶의 고통, 무의미, 무목적성을 생각합니다.
그런 길의 끝을 만납니다. 세상과 실시간 소통하고 정보를 주고받지만
너와의 관계는 깨어진 것 같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혀 있는 것 같은 길을 걷다가
영적 단절이란 길의 끝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의 부동의 1위이고,
2021년 한 해 하루 평균 36.1명이 죽었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라는 생각으로 생을 끝냈는데, 실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으로 살면서, 삶이 길의 끝에 있다는 느낌으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란 시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봄길>)
누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십니까?
누가 끝남(ending)을 이어짐(anding)으로 바꾸십니까?
우리에게 삶의 봄, 영혼의 봄으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까?
이것이 사는 것이 아닌데 싶은 그 길의 끝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또 하나님의 성전,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삶이란
더 높고 풍성한 삶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삶의 길이 답답할 때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있는 삶으로 이끄시는 분,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 앞에서 우리를 낙원으로 첫째 부활이란 더 놀라운 삶으로 이어주는 길이 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길입니다.
자신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걸어갈 참 길을 만드셨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생명의 길, 십자가를 통해 그다음이 열리는 은혜의 길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6월12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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