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6-23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라보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가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부활의 예수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걸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안식일이 다가오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빈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그렇게 유월절과 안식일이 조용히 지나갔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하며 예루살렘의 어떤 곳에서 모여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후 첫날 새벽이 밝아 오도록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의 무덤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무덤 속 예수님의 시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제자들은
하나씩 둘 씩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들 중 둘은 이미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 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24:21).라는 실망의 대화를 나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곳으로 두 명의 여제자들이 달려와서,
안식일이 끝나는 이른 새벽 무덤에 갔더니 무덤 입구의 돌이 굴려져 있고 시신이 없어졌다고,
필시 누가 시신을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정말 무덤이 비어 있었는데,
이상한 것은 시신은 사라지고 수의만 남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마포를 벗기고 시신만 가져갈 리 없고, 그랬다 해도 세마포를 잘 정돈해 놓고 가져간 것도 이상한데,
더욱 이상한 것은 머리를 쌌던 천이, 안의 공기가 빠진 형태로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의문만 갖고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친히 무덤의 돌 문을 스스로 열었다면...,
수의를 입고 온 몸이 상한 모습으로 그곳까지 걸어와 문을 노크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예수님은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고,
유령인가 했지만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었고, 같이 음식까지 먹었습니다
빛나는 옷에 광채가 나는 얼굴의 모습은,
일찍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수의를 두르고 나왔다가 다시 죽게 된 그런 모습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가사상태에서 깨어나신 것도 아니고 , 유령도 아니라면 ,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차츰 부활의 의미를 알아간 후,
이 사건이 없었다면 다 흩어졌을 제자들이 , 십자가의 예수님이 주님임을 증언했고 심지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말씀을 하심으로,
이런 부활의 모습과 말씀들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관점, 새로운 확신을 갖게 하여,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확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은
삶과 죽음에 관한 제자들의 생각과 관점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전에는 아무도 죽은 이후 다시 산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없었기에
부활 사건은...
누가 시신을 훔쳐갔거나, 제자들 모두가 헛것을 본 것이거나,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그런 상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관점에, (천동설 시대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죽음의 관점으로 삶을 보며 살았던 그들은, 부활의 관점으로 죽음까지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활은 ,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정치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신성모독자의 죽음, 자칭 유대인의 왕의 죽음으로 생각했다가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고
신성모 독자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고,
악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패배자가 아닌, 악을 이긴 승리자라고 하나님이 직접 인정한 것입니다.
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관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인자, 고난의 종을 보내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약속들이 있는데
부활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 그 약속의 성취임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전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된 참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점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신앙을 자신의 취향을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질병에 걸려 약을 먹을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 권위 있는 기관의 인증이듯이,
구원이 걸린 신앙 문제에는, 하나님의 인정하신 길이 무엇인가를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임을 인증하는 하늘 도장인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와 존재
부활은 죽음과 십자가와 예수님을 바로 보게 하는 관점을 주었는데.
관점의 변화만이 아닌 새로운 관계에 기초한 새 신분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성령을 주심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 성취에 우리가 주관적으로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수많은 비용을 들여 개발한 약일지라도 우리가 먹었을 때 비로소 그 약의 혜택을 보듯이,
우리를 대표하는 왕으로서, 백성인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를 지심으로 이루신 그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것 중,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입니다.
무덤에 달려간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한복음 20:17).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아빠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이미 이런 은혜를 언급하셨습니다.
탕자가 하나님을 떠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림으로,
아버지는 명예에 큰 타격을 입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 아들을 기다렸고
드디어 돌아오는 탕자를 향해 달려가 안고 아들로 맞이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란 영광을 상실한 탕자와 같은데,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가 탕자 된 우리에게 맨 발로 달려오신 사랑의 길이 된 것입니다.
이런 주어진 새로운 관계를 마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복음 28:19)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주어진 관계입니다.
성삼위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소중한 물건에 내 이름을 새기듯,
우리가 하나님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보물인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어떤 고아가 그 이름( 새 가문)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인데,
그 고아가 한 가문에 입양되면, 그 가문의 성을 사용하게 됨은 물론 ,
새 신분으로 ,그 가문의 아버지와 새 관계를 맺고 유업을 받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가족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다시 참된 인간으로 창조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한 20:22).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마치 창세기에 ,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을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되게 하시고 , 성령으로 거듭남을 주심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 성취의 공로의 근거로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권세와 위대한 사명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새 관계와 신분을 우리의 것으로 실제로 받게 되었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그 신분에 맞는 권세와 사명입니다.
대통령이란 새 신분에 권세와 사명이 따라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란 새 신분에 해당되는 권세와 사명이 주어집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세상의 권세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도리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일찍이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그 권세를 주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 권세는 마귀의 방식인 세상 권세, 자기 아닌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권세로
강력한 권세인 것 같지만 악과 죽음의 지배를 받는 죽음의 권세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수하인 노릇을 하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그런 악과 죽음을 패배시킴으로 생명의 권세를 얻습니다.
구약 다니엘서에 메시아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예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다니엘 7:13-14)
인자 같으신 분이 하나님에게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영원한 권세를 얻는다는 것인데
그 권세는 십자가란 가장 격렬한 영적 전투장에서 친히 피 흘리면서 악과 죄와 싸움으로 얻은 승리를
아버지에게 드림으로 얻게 된 권세입니다.
세상에게 생명을 주며 살리는 선한 권세,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선한 권세와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한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선한 권세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위임하십니다.
제자를 삼아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선한 권세와 능력과 함께
그 선한 능력으로 행할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했던, 곧 온 민족을 제자로 삼는 사명으로
그 일을 이어받아 행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선한 능력을 가지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베풀어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법과 하나님의 가족의 예법을 가르쳐서,
온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사명에 관해 부활의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한복음 20:23)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진다는 말은,
우리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이 일어나는 곳은 성전이고, 교회가 새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죄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서로 용서하는 죄사함이 일어나는 성전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죄 용서가 일어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죄를 두면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지를, 세상에 경고해야 하는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신분을 주시고
그에 합당한 새 능력과 새 사명을 주시며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 사이에 유사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명령을 주시기 전에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 자국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상처 자국은 악과 치른 전투의 표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으로 보냄을 받을 때, 악과 마주칠 것이며 고난을 받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비록 우리의 손과 옆구리에도 상처가 있을 수 있고,
사탄이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고난이 있지만, 사탄의 머리를 밟는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 16:15-18).
선한 능력으로 죄 사함의 복음 전파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때 사탄의 공격이 있지만,
그 뱀을 집어 올리며, 그 뱀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고,
사탄의 머리를 부순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뱀의 머리를 부수는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이 있지만,
많은 민족을 제자로, 하나님의 영적 가족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는
구원과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능력을 가지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새롭게 하신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새로운 영적 신분과 놀라운 선한 권세와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하나님의 대사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런 모습과 상당히 거리를 가진 존재로 사는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 억눌리고,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죄책감으로 쓰러지고, 여러 상황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그렇게 넘어지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염려하고 낙망하도록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실상은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고, 새 신분에 맞는 선한 권세와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선한 능력을 사용해서 사탄과 세상에 속한 것과 싸워야 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루셨던 승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이 찾아오는 마음에 기도와 감사의 선한 능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의 관계 속에 용서의 선한 능력으로,
세상의 악과 구조적인 악에 의해 상처받을 때도
진리의 말씀과 기도의 선한 능력으로 싸우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선한 능력으로 예수님이 하셨던 그 사명과 일을 이어가야 합니다.
본 회퍼 목사님이 독일 백성들이 나치즘에 정신적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주님의 선한 능력을 의지하고 히틀러와 싸웠습니다.
그분의 기도문을 기초로 만든 <선한 능력으로>란 찬양이 있습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절망 속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주 얼굴 구하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린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전의 괴로움 날 에워싸고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우리 영혼 끝내 승리의 날을 맞으리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 주만 의지하리 믿음으로 우리 고대하네 주 오실 그날 영광의 새날을 맞이하리”
이 가사처럼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선한 능력을 주십니다.
내면적 문제, 삶의 문제, 사회적 문제 속에서 살지만, 때로 고난도 있지만
그 선한 능력으로 우리는 싸울 수 있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그 위대한 사명을 우리도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22년 6월 19일 주일설교말씀
'그룹명 > 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 ..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 (2) | 2022.07.13 |
---|---|
"더 낮게, 더 낫게 " 다시 시작하게하시는 예수님 (4) | 2022.07.08 |
“끝남(Ending)과 이어짐(Anding)” (0) | 2022.06.22 |
높이 들리사, 십자가위에서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님 (0) | 2022.06.08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새 언약 백성을 세우시는 예수님 (1) | 2022.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