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새 언약 백성을 세우시는 예수님

왕언니 2022. 6. 2. 23:54

 마태복음 26:26-29,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3:1-5      유월전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유월절 식사를 원하심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둔 전날,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는데

(다빈치 그림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이 식사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이면서 특별히 유월절이란 명절에 가진 식사입니다.

이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갖기를 예수님은  간절히 고대하고 계셨습니다.

 

“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4-15)

 

그런데 이 유월절 식사는 제자들과 같이 갖기 원하셨을 뿐 아니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성도들도  장차 성만찬을 통해서 이 유월절 식사를 재현하기를 원하셨기에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들과도 유월절 식사를 갖기를 원하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월절 식사를 원하신 것이며,

또 왜 유월절 식사를 재현하는 성만찬을, 모일 때마다 가지라고 하신 것일까요?

 

유월절 식사는 주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바른 의미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터인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여 자기들 나름대로 그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거나,

아니면 당시 로마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로마에 저항하다가 죽은 죽음으로,

유대 지도자들이 퍼트린 주장처럼,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으로,

또는 다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대독립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죽음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틀로 생각할 때는  그 의미가 결코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유월절이란  맥락에서  보면 이해될 수 있는데, 그때야  비로소 ,

 

십자가의 죽음이  패배가 아닌 승리이며 , 실패가 아닌 구원인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맥락에서 본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유월절 명절이 기념하고 기대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애굽이란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과거 모세의 출애굽을 넘어서,

죄란, 애굽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건져낸 인류의 출애굽 구원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이 의미는 유월절을 배경으로 온전히 드러납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알아야 했고, 이후 모든 성도들도 이것을 계속 기억해야 했습니다.

기억하되 머리로만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감각을 통해서 깊이 체험하고 마음에 새겨야 했기에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가졌고,

이후 모든 성도들이 성만찬을 행하면서 온 몸으로 체득하며 기억하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출애굽을 기념함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

당시 대부분의 유대 가정들도 유월절 만찬을 가졌습니다.

당시 유월절 식사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 나타난 모습과 달리

긴 테이블 위에 음식을 놓고 의자에 앉아 먹는 모습이 아닌

디귿자 모양으로 놓여진 식탁에 비스듬하게 둘러 바닥에 앉아 먹었습니다.

 

예수님 좌편에, 대제사장을 만나고 돌아온 가룟 유다가,

우편에 가장 나이 어린 요한이, 좌우의 테이블에 5명씩 제자들이,

좌쪽 편 테이블 끝에 베드로가 앉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양고기를 먹으면서는...  출애굽 시 잡았던 양을,

빵을 먹으면서는.... 급히 애굽을 빠져나오면서 먹었던 발효되지 않은 빵인 무교병을,

포도주를 마시면서는....  당시 문설주에 발랐던 양의 피를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단순히 고기와 빵과 포도주만 먹고 마신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역사와 의미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애굽을 빠져나온 출애굽 사건뿐 아니라, 시내산에 도착해서 율법을 받고 언약식을 한 것도 기억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과,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합한 것이

출애굽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후 시내산에 도착한 그들은, 십계명 율법을 받고 그것을 기초로 언약식을 가졌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 서약을 통해서 두 사람이 언약적 관계가 되듯,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언약적 관계가 생겼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노예로 부리며 강압적으로 통치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묻는 언약식을 통해 자유를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애굽의 바로는 백성에 대한 왕의 책임은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백성과 같이 언약에 매여서 자신의 언약적 의무를 다하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언약식을 가질 때는 동물을 잡아 그 피를 절반 제단에 뿌리고

절반을 백성에게 뿌림으로(출애굽기 24:6-8),

언약을 어길 시의 무거운 책임을 상호 자각하면서 언약에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된, 하나님의 구원도 역시 기념하고 감사했습니다.

 

 

 

출애굽을 기대함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과거에 일어난 출애굽 사건을 기념만 하지 않고

그 출애굽 사건이 지금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래로 로마 치하에 있는 현재까지

그들은 사실상 애굽 아래 있는 것과 같아, 또 한번의 출애굽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제2의 출애굽과 그것을 인도할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고 지금은 로마에 의해 포로가 된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제국의 침략, 국제질서의 변동, 국력약화 등의 이유를 들 수도 있겠지만,

구약의 예언자들은 바벨론 포로 직전부터 그 이후까지  그들의 죄가 이유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죄는 한 마디로 ‘언약을 파기한 죄’입니다.

언약을 체결할 때 쌍방이 언약의 의무를 지켜야 했는데, 백성들 편에서 그 의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뿐만 아니라 그 죄에서 돌이킬 것을 예언자들이 무수히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지키지 못한 언약 파기의 죄는

첫째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둘째는 인애와 공평이란 하나님의 법을 지속적으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길을 떠나고, 인애와 공평을 버림으로

이웃 사랑의 길도 저버린 것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후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법인 인애와 공의가 다스리는 나라를 세워 열방의 빛이 되어야 했지만,

가나안 땅에서 또 다른 애굽을 만든 셈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이 떠났던 갈대아 지역으로 다시 바벨론 포로가 되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후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언약 파기의 죄로 다시 포로 상태가 되었다면, 제2의 출애굽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언약을 깨뜨린 죄에서 벗어나는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언약을 파기한 죄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죄와 헤세드와 쩨데크,

즉 인애와 공의를 버린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회복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키면 된다고, 하고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만 잘 드리면 된다고하고,

열심당원들은 로마와 싸워야 한다고 여기면서,

상황의 핵심과 본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세상의 문제를 푸는 다양한 방식을 논하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놓치곤 합니다.

힘과 돈과 성과 같은 우상숭배는 그대로 행하고,

인애와 공평이란 하나님의 법은 지키지 않으면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 출애굽을 가져옴

 

당시 유대인들이 제2의 출애굽과 그것을 가져올 모세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이런 모습은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로마만 물리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고 메시아가 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약파기의 죄라는 진짜 문제는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는 길은 죄를 회개하는 길이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여전히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또 한 번의 출애굽을 기대하면서도

그것을 가져오는 죄사함의 길은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그 죄 사함을 이루시는 길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가정에서 유월절 식사를 가질 때,

고기를 먹으면서는 과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빵을 먹으면서는 과거 급히 나올 때 먹었던 무교병을,

포도주를 마시면서는 과거 어린 양들의 피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지만,

예수님은 유월절 빵을 떼어 주시면서 “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태복음 26:26)고 하셨고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 26:27-28)

 

우리들은 오늘날 성만찬을 통해서 자주 이 구절을 들으니  별로 놀라지 않지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뉘앙스를 가진 이 말을 들었던, 당시의 제자들은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무교병과, 어린 양과, 어린양의 피가,

십자가에 찢겨질 자신의 몸, 흘린 자신의 피를 상징하며,

그 피가 참된 출애굽을 가져온다는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과거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애굽에서의 출애굽만 경험했다면,

어린양되신 예수님을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는, 참 출애굽을 보게 될 것임을 온 감각으로 깨닫게 해 주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의 맥락에서 보면

십자가의 죽음은 구원을 이루지 못한 실패가 아니라

참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피

 

십자가는 참된 출애굽인 구원을 이룹니다.

그런데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함으로 그 구원을 이루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피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죄사함을 가져오고 언약을 갱신함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언약 파기의 죄를 용서받고 다시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구원이란 말입니다.

 

앞서 출애굽한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동물의 피로 언약식을 행하고 언약의 백성이 되었는데,

그들은 언약관계 안에서 행해야 할 마땅한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공의를 버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언약파기의 대가인 언약적 저주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드러난 결과가 바벨론 포로요, 로마 치하에 있는 상태입니다.

 

백성들은 로마를 처리하면 된다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죄를 처리하십니까?

 

첫째 예수님은 언약을 깨뜨린 모든 죄인들의 대표자가 되셨기에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실 때 용서가 필요한 모든 죄인들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둘째 대표자 자격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대신하여’ 받습니다.

언약 파기의 죄의 대가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옮겨 달라는 그 진노의 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죄의 대가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마치 왕이 백성들을 대표자로서 대신하여 조약을 맺거나 대가를 치르면,

그 왕 안에서 모든 백성들이 함께 조약을 맺고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언약 파기의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언약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보통 believe란 단어는 바로 목적어를 쓰고 I believe you라고 사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I believe in Jesus Christ라고 표현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따르는 것인데,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 안으로 포함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갱신과 업그레이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깨어진 언약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는데,

언약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그 조건은 이전 상태 그대로가 아닙니다.

더 나은 조건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과거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는 모든 사람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전에는 동물의 피였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갱신 뒤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이렇게 새 언약을 맺으신 것은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흠이 없는 도덕적 상태가 아닌 언약적 의무를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가 서로 언약적 관계에 충실하여 관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롭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언약적 관계를 계속 파기했지만,

예수님은 언약 파기의 죄를 자신이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향한 언약적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언약적 의무를 다하실 때,

하나님 편에서 큰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독생자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희생은 물론이고, 하나님 편에서 받은 상처도 엄청납니다.

 

집을 나간 탕자로 인해 아버지가 받은 상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상처를 받고도 아버지의 의무를 다 하셨고

탕자는 아버지의 의로움 때문에 다시 아들이 됩니다.

집을 나간 고멜 때문에 호세아가 엄청난 상처를 받지만,

그럼에도 그 상처를 다 지면서 남편의 의무를 다했기에 다시 아내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배반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무를 다함으로 다시 언약적 관계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큰 상처가 받으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하필 유다란 이름을 가진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마지막 지파인 유다 지파, 유대인이라고 불린 그들이

메시아를 죽임으로 얼마나 하나님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에게 마지막까지 엄청난 상처를 주지만,

그런 멸시를 받으시면서도 언약을 깨뜨린 그들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 언약적 의무를 다하시고

반역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언약적 의무를 다하신 사랑,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깊은 상처를 받으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신,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 하심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언약 백성의 자격이 회복되었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언약적 의무가 있습니다.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 왕이신 하나님의 뜻인 (인애) 헤세드

(공의)인 쩨대크를 실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빵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곧 있게 될 십자가를 설명하실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  또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4-30)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언약백성의 모습이 아닌, 인애와 공평이 사라진 세상의 축소판이고,

그들이 벗어났던 애굽의 피라미드 구조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느냐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왕이 백성의 발을 씻겨줍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 모습은 제자들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 구조와 전혀 다른 새 구조요 새 질서입니다.

애굽을 나왔던 이들이 보여줘야 했던 애굽과 다른 하나님 나라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섬김이 인애와 공평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핵심 구성요소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이렇게 서로 발을 씻기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발을 씻기는 섬김이 복의 통로가 되는 아브라함 후손의 소명을 회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기고, 나아가 열방의 발을 씻김으로,

서로 받은 복으로 서로를 살리는 복의 통로가 될 때,

그들은 애굽과 다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언약의 백성이 되고,

언약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언약을 갱신할 것과

또 발씻음을 통해 새 언약의 백성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이어 말씀하십니다.

“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29)

 

유월절 식사는 네 번의 포도주를 마심으로 마무리하는데, 네 번째 잔을 마시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상징하는 그 영적 출애굽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아직 온전히 완성되지는 않았는데, 그것이 완성될 때 마지막 포도주 잔을 마시겠다고 합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마침내 완성될 그 마지막 메시아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온전한 회복이 온다는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 기대, 기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가지셨는지,

또 우리들도 유월절 식사의 재현인 성찬식을 갖게 하시는지 봤습니다.

유월절을 통해,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세 가지를 계속 보고 알기를 원하십니다.

 

 

첫째는 기억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영적 출애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통해 죄로부터 출애굽이 이루어짐으로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참된 출애굽은 마침내 완성되어 미래적 잔치가 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록입니다.

기억과 기대 사이에서 현재 새 언약 백성의 삶을 기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에도 남는 그 역사를 기록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이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미 이루신 구원을 믿고, 구원을 완성하실 때를 소망하며,

그 믿음과 소망 사이에서 섬김의 사랑을 통해서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유월절을 통해 드러난 십자가의 의미를 잘 깨닫고, 새 언약을 기억하고, 새 언약의 완성을 기대하면서,

오늘 여기서 새 언약 백성의 삶인 섬김과 사랑을 기록하면서 살아가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2년 5월29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