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11~23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짐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밖으로 나가더라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대에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어버이 주일입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누구보다 부모님들이 더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코로나의 어려움을 이기고 오월의 계절 속에서 더 건강하게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정의 달이고 어버이 주일인데,
가정 형태도 가족관계도 너무나 많이 바뀌어
지금의 부모님들이 생각했던 효도와 지금 신세대들이 생각하는 효도가 매우 달라서 이전의 효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라고 하면 부모와 자녀, 혹은 조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형태를 생각하지만,
이제는 한부모 가정, 다문화가정, 재혼가정들도 있고
또 가구의 형태도 많이 달라져 지금은 일인가구가 전체 가구의 32%를 넘습니다.
이렇게 가정의 형태가 달라지고 가족관계도 달라지면서 옛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가 세워집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가정은 늘 중심이 남자요 아버지였는데,
맞벌이 세대가 되면서 그 중심이 자녀들, 또는 엄마로 옮겨가고
또 이제는 요리하는 아빠, 살림하는 남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형태는 달라도 가족 간의 관계는 변함이 없는 원리에 기초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부부관계는 매우 남자 일방적이었는데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고,
부자 관계도 매우 아버지 일방적이었는데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쌍방적 관계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Family를 father and mother I love you라고 풀기도 하는데,
가족의 관계는 책임 헌신 존중이란 사랑의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가정과 관계를 하나님이 보신다면 흡족해하실지,
고치고 보완하라고 하실지, 근본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또 석가탄신일입니다. 절 경내에 그리고 주위 거리에 연등을 답니다.
탁한 연못에서 피우는 연꽃은,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의 지혜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 연등을 사서 소원 제목을 써서 매달고, 연등 공양을 합니다.
대웅전에 가까운 연등은 더 비싸게 받기도 하고 낸 돈만큼 염불의 시간이 다르기도 합니다.
또 대부분 대웅전보다 높은 위치에 산신각이 있고 칠성각과 용왕당도 있는 절도 있습니다.
절을 지을 때 산신각을 대웅전보다 먼저 짓기도 하는데
이를 불교의 무속과의 융합과 공존이라 봐야 할지, 불교의 변질이라고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절마다 세워진 부처님상이 있는데 만약 그 부처님이 살아서 오늘의 절을 보신다면
원하던 모습이라고 말하실까, 일부만 고치면 된다고 하실까,
아니면 부처님이 생각한 절과 다르기에 허물고 새로 해야 한다고 하실까요?
이런 점은 교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데 올인하듯 하고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과연 하나님은 그곳을 편히 거하는 곳이라고 하실까 불편한 곳이라고 하실까,
내가 거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예수님께서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아예 통째로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한다고 하셨고,
더 나아가 새 성전은 돌로 된 건물과 전혀 다른 형태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성막을 짓게 하셨는데, 성막은 이동용 거처였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허락하신 것으로
그 성전이 성전의 최종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설령 성전을 아무리 잘 지었다고 해도 손으로 지은 어떤 집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온전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만 그곳을 거하시는 곳으로 삼기로 작정하셨기에 성전이 된 것입니다.
돌로 된 성전은 하늘의 하나님이 땅의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려주는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실상이 오면 표지판은 물러나야 합니다.
마침내 돌로 된 성전이 가리키는 참 성전이 왔습니다.
그 성전은 돌로 된 것과 전혀 다른 성전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참 성전인데,
이제는 옛 성전을 놓아버리고 참 성전을 붙들어야 하는데.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돌로 된 옛 성전을 여전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실상이 왔는데도 표지판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성전은 어느 정도 성전 기능은 감당했지만 ,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유효기간이 상당히 지난 상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죄사함을 선언한 것은...
원래 죄사함은 성전의 고유 기능이었는데 성전이 그 기능을 상실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겉모습과 매일 드려지는 제사를 보고 있었기에
누구도 당시의 헤롯 성전을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다거나 이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말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전과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엄청난 중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며, 무너진다고 말씀하셨고,
말로만이 아닌 성전 안에 들어가 행동으로 공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이것이 죽임을 당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성전모독죄)
바로 그런 행동을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에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첫째 날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셨고,
둘째 날인 월요일 다시 성전으로 가시는길에, 한 그루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멀리서 보니 잎이 무성했지만 가까이 가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 나무를 향하여 앞으로 영영 열매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왜 애매한 무화과나무를 두고 그렇게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니 제물에 바칠 수많은 동물과
유대 화폐로 환전하는 환전상의 판들이 이방인의 뜰에 즐비한것을 보시고
동물들을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의 판을 뒤엎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마가복음 11:15-16)
성전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거룩한 성전의 활동을 방해한 것이요
매우 위험한 것임에도 이런 소요를 일으킨 후 성전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다음 날 길을 갈 때 보니 전날 말했던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것을 보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마가복음 11:20-21)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중심에 두고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인데,
이것은 성전이 잎새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수많은 동물을 매일 잡아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유대 화폐로 바꿔서 예물을 드리는
거창한 제의의 모습이 있었지만, 정작 영적 굶주림을 채우게 하는 열매는 없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에 보고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 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 있으면 산을 바다에 빠지게 하는 기적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은 성전이 세워진 산이고, 산이 바다에 빠진다는 것은 성전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무화과나무처럼 말라 버리고,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가?
그러면 당시 성전이 어떤 상황이기에 그런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마가복음 11장 17)
그 첫째 이유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이방인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성전은 지성소 성소 이스라엘의 뜰로 되어 있고, 그 밖이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은 이곳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런데 이곳이 제물로 바칠 동물들을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께 예배하러 멀리서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옵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기대하고 옵니다.
이방인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이방인들은 그 뜰에서 온갖 장사하는 일만 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갑니다.
성전은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도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려면
그들이 땅에서 울부짖는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당시 성전은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이익을 챙기는 장사하는 곳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기도의 소리를 듣는 곳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푸틴의 공격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정교회 건물은 매우 종교적 건물이고 예식도 특별한데,
그런 건물에서 예전을 통해 기도한다 해도, 전쟁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들리는 기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을 때 그 강도는 두 의미가 있습니다.
성전을 맡은 대제사장이 강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 그들은 제물로 드릴 동물 장사와 환전을 통해 장사했고,
당시 성전은 그곳 은행업의 중심이었으며 부채 장부들을 보관하던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대 성전이 파괴될 때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가 부채 장부들부터 불태울 정도였습니다.
또 강도는 열심당원들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기반으로 반로마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던 그들의 거점이 성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거점으로 그 운동을 일으키길 기대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경제적 수탈의 본산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과격한 혁명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성전의 원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실상인 성전이 왔기에 시대적 소명을 다했으므로 물러가야 되기도 하지만,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는 본연의 사명을 하지 못함으로 폐기될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돌 하나도 남김이 없이
이런 성전을 두고 성전이 무너질 것을, 무화과나무 사건을 보여주심으로 또 성전 안의 행동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그래도 성전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사실상 아직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여러 논쟁을 하시고 성전에서 나오는데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마가복음 13:1, 새번역)
당시 성전이 주는 위용을 본 그들은 여전히 성전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3:2)
비로소 충격을 받은 이들이 놀라서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묻습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가복음 13:3-4)
그러자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오르셔서 성전이 무너지게 될 징조와 그때의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그 상황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정도의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마가복음 13:25-27)
문자적으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환난 날의 상황을 묘사한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이 파괴될 때의 상황은 매우 참혹할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이렇게 성전이 파괴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돌로 된 성전과 다른 성전이 세워집니다. 바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그 예수님이,
참 성전을 세우는 다니엘서가 예언한 바로 그 인자인 메시아란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옛 성전이 허물어지고 새 성전이 세워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언제 어떤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은 성전이 허물어진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성전모독죄로 고발을 당하십니다.
금요일 이른 새벽 유대 산헤드린 재판과 로마 빌라도의 재판,
두 번의 재판을 통해 십자가형을 받고 드디어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을 짓는다고 말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고.
무너진다는 예루살렘 성전은 그대로 있고, 짓는다는 새 성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가복음 15:29-31)
성전을 헐고 사흘 안에 다시 짓는다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잖아! 그런 자가 어떻게 구원자냐?
이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
이렇게 조롱을 받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 15:38)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이고.
성전 휘장을 찢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때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AD 70년에 완전히 파멸됩니다.
또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 휘장이 갈라질 뿐 아니라
낮에 어둠이 임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누가복음 23:44-45)
옛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낮에 어둠이 임함으로 옛 성전은 파괴되고 옛 세상이 심판을 받는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새 성전을 세우심
자가 죽음의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옛 성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새 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의 성전과 다른 방식의 성전, 이전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만날 수 있는 성전,
옛 성전에서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가게 되는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휘장 너머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었지만,
이제 찢겨진 휘장 사이로 지성소 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새 성전은 휘장의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그 새 성전은 물이 포도주가 되어 최상급 포도주가 넘치는 결혼식장이요,
열매가 가득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시작된 새 성전은 마침내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성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청결 사건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다시 왕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는 새 성전은 더이상 예루살렘이란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곳에,
성전을 찾은 순례객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세워집니다.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도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작은 모임 속에도 세워지고
마침내 온 세상 속에 세워질 것입니다.
옛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를 통해서 실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참 성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먼저 우리 안에 세워지게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주님은 늘 우리 마음이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이 성전이 되는 것이 신앙에서 우선적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치워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치우고 허물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과도한 염려, 회개하지 않은 죄, 여전한 탐욕?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모이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모여서 다른 것보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 동행하신 주님을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가 성전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치워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 자랑하는 것, 세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어떤 우상들을 치워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이들이 왔을 때 이곳이 하나님이 거하는 집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 역시 성전이 되어야 하는데, 가정이 하나님이 편히 거하시는 집이 되려면
무엇을 치워야 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가정의 가족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될 때 가정은 성전이 되는데
부부관계, 부자 관계, 모녀 관계에서 그렇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그것을 치움으로
가정이 참 성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달이니 가정에 관한 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 복음이 조선에 들어올 때 조선에는 가문의 개념은 있었지만, 가정의 개념은 없어서
부모 위주의 '가문'의 개념은 있었지만, 부부 위주의 '가정'이란 개념이 약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가문이 중요한 때였습니다.
당연히 남성 중심, 아버지 중심, 조상 중심의 유교적 문화가 가정 문화입니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은
첫째 가정에 신앙의 기둥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혼인할 때 신앙이 있는 교인끼리 가능한 한 만나게 했습니다.
그래야 가정에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쪽이 믿지 않으면 그를 전도하게 했습니다.
둘째 사랑의 기둥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조선 시대 가정에도 사랑이 없지 않았지만 사랑이 혼인의 중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혼인은 부모에 의해, 가문 간에 이루어지다 보니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또 사랑이 가정의 우선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무관한 결혼, 가문에 의한 조혼, 그로 인한 여성의 고통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혼인 연령을 높여 가정을 이루도록 권면했습니다.
요즘은 연령을 낮추려고 해야 하지만…
1907년 대부흥 때에 남편들이 고백한 죄 목록 속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죄를 많이 고백했습니다.
사랑이 가정의 중요한 요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셋째 남녀간 평등의 기둥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남녀가 평등한 가정을 이루는 데 방해되는 요인 중 하나는 축첩이었습니다.
일부일처를 바른 관계라고 가르쳤고, 일부다처는 간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배움의 기회나 사회참여 기회를 박탈하는 분위기가
부부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재생산하는 폐단이라고 여기고 여성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여성 교육기관이 기독교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가정의 문화를 바뀌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의 가정이 좀 더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의 모습을 갖춰 갔습니다.
지금 현대의 기독교 가정은 성전을 세우는 쪽으로 가고 있는가,
그 반대로 가는지? 부부관계, 부자 관계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음과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풍성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지 못 하게 하는 것을 찾아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2년 5월8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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