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해 오신 예수님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48-51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한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코로나 상황이 많이 진정되면서
오랜만에 교육부서가 출석하는 다음세대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교회 학교가 열리지 않아서,어린 자녀를 둔 가정들은 교회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는데,
이제 함께 대면 예배에 나올 수 있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때 그냥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2년의 세월이 준 교훈을 가지고 모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경계를 침범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안 된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계를 침범하고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교훈,
이런 교만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다는 교훈,
이런 마음을 가지면, 또 다른 문제가 온다는 교훈을 새기고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 하루하루의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낭비하듯 사용했다면,
이제 일상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고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지고 다시 모인다면
예배도 모임도 더 밀도 있고 더 간절하게 되어, 그 동안의 시간을 보상하는 갑절의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2년과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교훈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코로나나 전쟁과 갈등의 원인이 많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가장 깊은 원인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하나님을 중심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내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는 것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을 다시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 우리가 간절하게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구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공생애 마지막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고
그곳에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그 고백이 맞다고 칭찬하십니다.
일주일 후에 변화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 즉 영적 출애굽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가 될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다음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셔서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에 머무신 후, 안식일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고
안식일 후 일요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이는 자신이 말을 탄 왕들과 다른 왕임을 보여주시는 행동이었습니다.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보이는 사람들을 적으로 삼고 죽이는 그런 왕과 달리,
모든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악과, 사탄이란 진짜 적과 싸우는 왕이 되어
구원을 가져오시는 왕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후 곧바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는데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이렇게 세 번 들어가셨는데
첫째 날은 성전을 들어가셨다가 나오셨고,
둘째 날에는 성전 안에서 제사에 바칠 제물을 매매하고 환전하는 판을 뒤엎으십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한복음 2:15)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한복음 2:16)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성전에서의 이런 행동과 말은 ,
마치,크렘린궁 앞에서 푸틴의 전쟁이 잘못이며, 푸틴은 망한다고 공개적으로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 이 행동과 말 때문에 예수님은 붙잡혀 죽게 되셨는데, 이렇게 될것을 아셨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돌로 된 성전과 다른 참 새 성전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양면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실 구원은 출애굽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예수란 이름부터도< 여호수아>, 모세의 출애굽을 완성하는 분입니다.
출애굽이 보여주는 구원은 양면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즉 바로가 왕으로 통치하는 애굽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 것으로
애굽을 나온 후에, 왕이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됩니다.
이것은 구원을 정치적 이미지로 설명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상을 섬기던 우상의 신전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옮긴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을 만듦으로
마치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자녀들의 가정의 이미지처럼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됩니다.
가나안 땅에 세우는 구원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구원이 이 두 면으로 설명됩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주인을 바꾸는 것으로, 단지 죄를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섬기는 왕으로 바꾸고 국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생기고
가정과 사회가 되므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3-14)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인 성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abernacled)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는 말은 성전을 세운다는 말로,예수님 자신이 세상 속에 세워진 성전입니다.
성전에 영광의 구름이 충만하듯 예수님이란 성전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셨기에 우리는 주인을 바꾸는 회개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 오셨기에
문을 두드리는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영접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는 마음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라면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함께 하시는 집으로,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부왕이 됩니다.
또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며 교제하고 예배하는 제사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왕의 뜻을 세상에 펼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고,
아버지와의 사귐 안에서 임재의 영역을 온 세상으로 넓혀갑니다.
소요리문답 1항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세상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없게 만드는 죄를 처리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가정,
자녀와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되게 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새 성전을 세우기 위한 사역
성전을 세우시는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린후, 성전에서 머무시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누가복음 2:49)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며,
자신은 아들로서 그 성전을 회복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초기 제자를 부르실 때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51)
나다나엘이 앞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 장면은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야곱은 여호와께서 이 광야에도 계심을 알고 놀라서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세기 28:17)
그리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합니다. (창세기 28:19)
벧엘이란 ‘벧’은 집, ‘엘’은 하나님,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예루살렘의 성전을 예견한 것으로
야곱이 하나님의 성전,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인자이신 자신이 곧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요
성전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나란 마을의 혼인 잔칫집에 가셔서,마침 포도주를 떨어진 것을 보시고
그곳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베푸셔서 결혼식장의 기쁨을 회복시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첫째 기적인데, 이 첫 기적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포도주가 떨어진 안타까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일까요?
요한복음은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바로 다음에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신 일을 기록하는데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이들의 판을 뒤집어엎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한복음 2:16).
나귀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다음 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이렇게 하신 것은 공생애 마지막 시기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가나에서의 첫 기적과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을 같이 기록하였는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식장과 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만남의 기쁨이 약화된 결혼식장처럼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라진 성전이 된 것을 암시합니다.
포도주를 만들어주심으로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남의 기쁨을 회복한 것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의 보혈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심으로, 참된 만남이 있는 성전을 만드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
그리고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여인과 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초막절에 성전에 가셨을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7~38)
영원히 솟는 샘물,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최초의 성전인 그 에덴 중앙에서 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렸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에스겔 선지자는
다시 세워질 마지막 때의 성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에스겔 47:1).
예수님은 참 성전을 세우시는 일을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드디어 십자가를 앞두고 유월절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후,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이 구절은 장례식 설교로 많이 사용되지만, 이 아버지의 집이 성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우실 하나님이 거하실 집인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십자가의 자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성전 되기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는 것에서 모든 것이 풀려갑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도록 창조되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오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은 매일 모든 상황 속에서 노크하십니다. 강제로 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영접하면 우리 마음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사귐,
교제, 임재가 있는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는 것에서 가정과 사회의 회복이 시작되는데, 이것이 답입니다.
십자가가 수직과 수평의 만남인 것처럼,
수평선인 우리의 삶이 수직선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든 곳 모든 상황 속에서 만나 모든 마음, 모든 곳, 모든 상황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과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할 일이 많아,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후순위로 미루지 않는 것, 주님과 매일 거하고 동행하는 것,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예배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래서 우리 마음과 가정을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중앙에서 흐르는 물이 사방 대지를 적시듯이,
수직과 만난 수평이 확장되듯이 하나님의 집이 내 마음에서 가정으로 세상으로 확장됩니다.
이런 조용한 확장은 코로나가 막을 수 없고 전쟁이 막을 수 없고 환경이 막지 못합니다.
오늘부터 교회의 많은 사역이 재개되는데,
이전보다 더 높은 차원과, 더 심도를 더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예배, 교육, 만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는 중심과 마음이 되어 ,잃어버렸던 2년을 갑절로 보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다시 붙드는 , 다시 하나님을 모신 마음이 되는 것,
다시 하나님을 모신 가정과 교회가 되는 것,
다시 수직을 제대로 붙든 수평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수평이 더 넓어지는 일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과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2년 5월1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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