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를 보이신 예수 ..새롭게 만나는 예수그리스도 (13)

왕언니 2022. 4. 22. 23:57

눅 24:13~49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 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및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대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지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눈 생선 한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에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개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유대 시간으로 금요일 제3시, 즉 오전 9시였습니다.

제6시 즉 정오, 태양이 가장 내리쪼일 때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그리고 제9시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유대는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데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니,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을 몇 시간 남겨두고 급하게 장사를 해서 돌무덤에 안장합니다.

 

토요일 안식일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식일이 끝난  주일 이른 새벽에

몇 여제자들의 돌무덤으로 달려갔는데

그들이 무덤으로 간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보려고 간 것이 아니라

안식일 전에 급하게 장례를 치뤘기에 시체에 제대로 바르지 못한 향품을 들고 간것입니다

 

그러나 동굴 무덤의 돌문이 굴려져 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실제 부활한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당황하고 있던 그들 앞에 갑자기 빛나는 모습의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놀란 여인들은 급히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서 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그 말이 너무 허황되이 들려서 믿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누가복음 24:11)

 

그러나 무덤 문의 돌이 굴러져 있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성질급한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갑니다.

먼저 도착한 베드로와, 뒤따라온 요한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봅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한복음 20:6-7)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만 공기가 빠진 것처럼 꺼져 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누가 시신을 가져갔다면 수의와 머릿수건을 벗기고 가져갈 리 만무하고

예수님이 깨어나셨다고 해도 머리를 싼 붕대 같은 수건이 헝클어져 있지 않고

공기가 빠진 공처럼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상하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모여 있었던 제자들이 여인들이 한 말과 베드로와 요한이 본 것을 들었지만

그러나 그중의 두 명의 제자가 그 무리에서 떠나 엠마오로 향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했다가 그 기대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부활이 있다면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엠마오로 떠난 두 제자처럼 남은 제자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되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소망은 서서히 꺼져 갔고

십자가는 하나의 비극적 사건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가 서서히 잊혀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위대한 스승이고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고상한 실패자로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 둘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갈릴리 어부로 돌아갔던 베드로도 다시 제자의 길을 걷게되었고,

제자들이 다 순교를 마다하지 않게 되었고,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복음의 사도가 됩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사실이냐 기적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붙들려 있는 경향이 있지만,

부활절에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갔고

베드로는 다시 용기를 얻고, 제자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일까?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봤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믿었던 구원과 새 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가 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과 새 창조가 어떤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와 예수

 

먼저 부활은 성경 새 창조 약속이 참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여러 교훈을 가르치는 스승이었고

사람들은 주님의 고상한 가르침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는데

걸림돌은 예수님이 자기를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영적 출애굽을 완성하실 자라고 한것이었습니다.

당시 최고 권위인 성전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성전을 책망할 권위가 있다고 하신,

그런 주장 때문에 참람죄, 성전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죽음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때는 어느 누구도 십자가 죽음이 구원의 길이란 말씀을 믿지 않았고.

유월절 식사때 자신의 죽음은 구원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만약 그 시신이 무덤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아들이며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고 믿게 되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유대 독립이라고 굳게 믿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은 실패한 메시아요,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와 좌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예수님을 로마에 맞선 한 유대 반역자의 죽음으로,

유대 지도층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이며,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 법정의 신성모독죄 선고, 로마의 반역죄 선고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게 되고

예수님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 가고, 두 제자가 엠마오로 떠나는 것처럼, 제자들은 각각 자기의 고향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고 재창조하신다는 큰 약속,

그 구원을 위해서 자기 아들, 곧 사탄의 머리를 부수는 여자의 후손,

복을 주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보내시고, 다니엘서가 말한 그 인자를 보내시고

이사야서가 말하는 그 고난의 종을 보내신다는 그 이야기가

결말이 없이 끝난 영화처럼,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아 중단된 연극처럼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성경의 이야기가 참이란 확신이 약화하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며 회의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기적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독립을 가져오는 자라고 생각했다가

그것을 이루지 못한 자라며 실망하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누가복음 24:21).

 

그런데 그들의 내려가는 길에 부활의 주님이 동행하셔서

성경의 모든 예언과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이루어진 것임을 풀어 주셨습니다.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누가복음 24:44)

 

그러자 그들이 실망해서 떠났던 그 십자가 사건이

도리어 성경의 구원 약속이 담긴 큰 이야기를 성취한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그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 사건임을 알게 되면서

성경의 퍼즐이 맞춰지면 멋진 그림을 드러내는 것처럼 성경이 보이게 되었고

그 감격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그들이 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게 부활의 핵심이 아니고, 기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이 창조 자체야말로 엄청난 기적입니다.

생명이 살아가는 게 평범해 보이는 일상은,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경탄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를 통해서 이런 기적을 이미 이루신 하나님께서

죽었던 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부활을 통해서 보여주시려고 한 것은, 그런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이나

십자가와 같은 고난을 겪으면 부활과 같은 영광이 있다는

일반적 교훈을 주시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부활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단순히 로마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로마와 유대, 그들과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는 적을 패배시킨 진정한 승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으며,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낸다는 성경의 약속과

새 창조를 가져온다는 성경의 약속이 담긴 이야기가 참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새 창조의 첫 열매인데

이 열매를 통해서 새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반지의 제왕>의 저자 톨킨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세상이 전쟁도 고통도 많다 보니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 속에는

소망과 약속을 담은 오래된 이야기들이 신화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다 이야기로만 존재할 뿐 실제 그 내용이 현실이 된 예가 없는데,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제 현실이 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가 회심하게 된 중요한 계기입니다.

 

실로 세상에는 큰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을 참으로 믿고 삽니다.

수천 수억의 신들이 있고 윤회한다는 큰 이야기를 따라서 살고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며 내세를 기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보이는 세상 너머 보이지 않는 영원의 세계로 가야 한다며 수행을 통해 해탈을 꿈꾸며 사는 이들도 있고,

세상은 물질이 전부요 우연을 따라 진행될 뿐이라는 이야기를 따라

이 세상을 전부로 죽음은 소멸이라고 여기며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새 창조를 이룬다는 성경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큰 이야기를 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참인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부활은 성경 이야기가 진실한 이야기임을 드러낸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모든 것이 끝이라는 세상 이야기 안에서

자기 이야기를 써가지 말고, 몸으로 사는 것이 앞으로 부활한 몸의 일부가 되며,

지금 여기서 내 이야기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의 한 페이지가 된다는 마음으로

지금 내 몸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한 몸

 

부활이 성경의 이야기가 참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면,

성경이 말씀하신 그 새 창조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부분적이지만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부활의 몸입니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거나 영혼이 되어 어떤 곳으로 간다고 하지만,

성경은 부활의 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뿐 아니라 몸까지 구원을 얻는 부활의 몸이 우리의 최종 모습이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 부활한 몸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몸은 우리가 만질 수 있었고 음식도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의 육체와 비슷하지만,

잠긴 문으로 들어오시기도 하는 우리의 몸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금 육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 변화되었고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런 몸을 현재 창조 세계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연 세계의 여러 생명현상을 통해서 부활의 몸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창조 세계에 생명의 여러 단계가 있고 그에 따른 생명현상이 있습니다.

씨앗과 나무, 달걀과 닭, 애벌레와 나비, 단세포와 고등생물과 같은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생명이 존재하고 그에 따른 생명현상이 존재합니다.

문명을 만들고 살아가는 인간 생명현상은 동물들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것이고

아마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생명의 단계와 현상도 역시 최종 생명 단계와 현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지금 인간은 놀라운 생명현상을 보이지만, 그 속에 질병이 있고 죄로 인해 망가진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오감 중에 음이나 맛이나 색을 감지하는 능력이 남보다 탁월해도

음악이나 미술이나 요리의 더 높은 세계를 경험합니다.

만약 몸의 모든 감각이 지금보다 월등해진다면,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을 직관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생명현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신소재, 신물질을 계발하면,

그 신소재로 만든 의복이나 기구는 새로운 기능을 가지고 이전 물질로 할 수 없는 것도 거뜬히 해내어,

매우 강하고 열에서도 견디고 우주여행도 하게 합니다.

이처럼 신소재와 신물질이 신기능을 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몸의 물질 일부가 달라져도 지금과 다른 생명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의 몸을 이루는 물질에 변화가 일어나므로

새로운 생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또 부활은 부활의 몸으로 살아갈 새 창조를 보게 해줍니다.

부활의 몸으로 살아갈 시공간은 지금의 몸으로 살아갈 시공간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 창조의 세상이 어떨지 모릅니다. 지금과 다른 세상이기도 할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세상일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삼차원에 갇힌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같은 세상도 차원에 따라 경험이 달라집니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삼차원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과

벌레들이 일차원, 이차원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전혀 다릅니다.

낮은 단계 생명에는 시간개념이 없고 과거 추억 미래 소망과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인터스텔라>란 영화에서 보듯이 만약 우리가 삼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에 들어가면

지금의 시공간 경험과 달라질 것입니다.

 

최근 가상세계에 대한 논의가 매우 뜨겁습니다.

앞으로는 메타버스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페이스북은 회사명을 아예 메타로 바꾸었습니다.

VR안경을 끼고 VR의 세계 virtual reality 란 가상현실,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현실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내가 아바타가 되어 그 세계를 경험하고 삽니다.

AR 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이라 있는 세계도 있고

XR 이란 extended reality도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리어어 원>이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슬럼가에 살면서 VR기기를 쓰고 가상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의 아바타로 가상의 세계에서 또 다른 현실을 살아갑니다.

현실과 더 현실적인 세상입니다. 하지만, 대사 중에도 나오지만,

그런 세상에서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먹는 것, 자는 것, 배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결국, 이 현실 세계 만이 참 현실이라고, 이 현실에서 사는 일상이 정말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일차원, 이차원, 삼차원으로 경험하느냐에 따라 같은 세상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현실과 다른 가상현실도 있습니다.

부활 이후의 세상은 잘 모르지만, 지금의 우리가 아는 삼차원의 시공간 이상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벽을 통과하여 들어오고 계시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 새 창조의 시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부활은 그것을 잠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새 관계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풍요하고 더 편리한 기술사회를 살 것입니다.

기술이 더 발달해서 가상현실의 세계가 더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이 온다고 해도, 사람이 서로 사는 관계가 지금과 다르지 않다면

지금과 다른 악과 고통이 생겨날 것입니다. 관계가 달라지지 않으면 진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모습 중에 감동적인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제자를 찾아가 만나시고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를 찾아가 책망하지 않고 . 나를 사랑하느냐를 묻고 남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은 새로운 관계가 펼쳐집니다.

부활 이후의 새 창조에서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변화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에서 있을 새로운 몸,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관계를 보게 해줍니다.

 

 

기억과 기대

 

우리는 일 년에 한번 부활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사실 매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났던 날로,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입니다.

주일은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고

이어지는 열매인 우리의 부활을 기대하는 날입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쓸 때는 세계대전으로 천 만명 정도가 죽었습니다.

4월의 땅에서

한편에서는  전쟁으로 엄청난 생명이 죽어가는데

자연은 온 대지에 생명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짓밟는 전쟁과, 생명을 살리는 자연의 봄이 함께 있는,

죽음과 생명이 뒤섞인 사월을 두고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역사와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함께 있는 잔인한 사월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겨울을 이기는 생명의 봄이 오듯이, 부활의 사월은 마침내 찬란한 사월을 가져올 것입니다.

 

매주 주일 부활을 기억하고 기대하면서

우리 모두 엠마오로 내려갔다가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두 제자처럼,

주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2년 4월17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