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8:4-10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 하시되 씨를 부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더러는 바위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자는 들을지어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천국복음을 가르치는 예수님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심
하나님은 애굽에서 불러낸 무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모세를 통해 애굽의 법과 다른 새 법, 애굽의 비전과 다른 새 비전을 주십니다.
하지만 애굽의 법과 나라의 비전이 생각과 몸의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기에
새 법과 비전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법과 비전은 그들이 가진 것에 더하는 것이 아닌,
이전 것을 깨뜨리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그들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우기 위함이었고,
이를 위해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바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 조상에게 물려받은 율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에 익숙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틀을 깨뜨려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바르게 깨닫는 것부터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바르게 알지 않고는 참 제자가 될 수 없기에 그들을 깨우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된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전의 지식에 지식을 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경험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와 공정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말한다고 하지만,
자기 식으로 생각하기에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오해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은
악한 로마를 심판하시고 선민을 강한 나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이방 제국의 지배 하에 있다 보니 이런 식의 생각이 대중화되고 굳어졌습니다.
그런 견해를 가진 그들은 대부분 이방인은 심판의 대상이요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라고 구분지어 생각했기에,
그들의 죄는 크게 보고, 하나님 백성의 소명을 망각한 자신들의 죄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프레임에 갇혀서 메시아마저 그들이 생각한 정치적 독립을 가져오는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정치 군사적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헬레니즘의 틀로 보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어서
헬라의 이원론처럼 보이는 현상 세계와, 보이지 않는 이데아 세계로 나누고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은 영혼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종교들도 이런 식으로 내세를 설명했고,
초대교회 이단 영지주의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요즘처럼 물질주의적 관점으로 보는 것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 이루어질 기술과 경제적 유토피아로 보기도 하고,
내면의 평정으로 보는 심리학적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 천국, 축복, 구원과 같은 신앙의 핵심 개념을
그릇된 관점을 따라 오해하게 되고,
그 결과 오래 믿고 성경을 많이 읽어도 신앙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천국을 비롯한 신앙의 핵심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려고 했던 이유이고,
우리들에게도 바르게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로 알아야 바른 목적지를 향한 신앙의 여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핵심은 이곳이냐 저곳이냐의 장소가 아닌 누가 다스리느냐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하나님 나라요, 사탄이 다스리면 사탄의 나라요,
인간이 다스리면 인간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도 부릅니다.
하늘을 하나님이란 단어를 대신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하늘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용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의미를 바로 알면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의어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은 땅과 분리된 어느 곳이 아닌, 땅과 신비하게 연결된 어떤 곳입니다.
머리가 몸의 모든 신경과 세포를 지휘하면서 신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하늘은 땅의 모든 곳과 연결되어 있는 지휘소와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여 하늘에 가신것은, 땅과 아득히 먼 어떤 곳으로 가신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곳과 연결된 하늘 지휘소로 가셔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육체로 계실 때는 땅에 계셨지만 유대 땅이란 시공간에 제한되셨지만
승천하신 이후는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오히려 모든 땅과 더 긴밀히 연결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늘에 가셨다는 것은
땅의 모든 곳과 연결된 하늘 즉 하나님의 통치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이 이런 의미라고 하면, 하늘나라는 땅과 분리된 어떤 곳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이란 하나님의 지휘소와 연결된 모든 땅과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 혹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늘과 연결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늘의 사람들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의 통치 아래 연결된 세상입니다.
성경적 의미로 말하자면 하늘나라는 영혼이 사는 저 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즉 부활의 몸으로 살아가는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영생
이런 하나님 나라를 영생이라고도 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란 뜻인데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의 차원을 벗어난 무시간적인 차원입니까?
사도 요한은 헬라철학에 익숙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영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러나 영원이란 단어는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을 말하려고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세계를 시간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의 두 공간으로 나누지 않고,
지나갈 시대와 다가올 시대의 두 시간으로 나눕니다.
현세와 내세도 일반적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이란 두 다른 공간으로 말하지만,
성경에서 현세는 심판을 받아 지나갈 세대요, 내세는 구원을 통해서 다시 올 시대입니다.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오는 것처럼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옵니다.
(아날로그가 나쁘고 디지털이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옛 시대가 사라지고 새 시대가 오는데, 그것이 일시에 일어나지 않고
상당기간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가 공존하듯 두 시대는 겹쳐 있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입니까?
지나갈 시대를 따라 살던 삶과 생명이 아닌, 다가올 새 시대를 따라 사는 삶과 생명입니다.
그 삶과 생명은 미래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누릴 것이지만
지금도 이미 왔고 또 오고 있는 새 시대에 참여하면, 그 삶과 생명을 여기서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영원히 존속되는 생명이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에서만 맛보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그래서 영생의 정확한 번역은 everlasting life가 아니라
Life of the age to come 혹은 New life입니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눅 18:18)
그는 죽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은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통해 다가오는 새 시대에 참여하고 살아갈 삶과 생명 얻는 방법을 물은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세리로 살던 삶이 아닌 제자의 삶을 경험했듯이,
죄책감과 비난 받는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람들과 회복된 관계를 만드는 새 삶을 경험했듯이,
예수님을 통해 오는 새 시대의 새 삶을 누리는 길을 물은 것입니다.
이런 영생은 앞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마침내 완성될 미래에 누리게 될 삶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삶은 지금 여기서도 맛볼 수 있는 현재적 삶과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생(새로운 삶)은 이미 여기서 경험할 수 있고 있고 앞으로 제대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한 5:24)라고 하시면서
영생을 현재형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대 독립의 의미 이상임을 알게 해주시고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사후의 천당 이상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하늘나라와 영생을 바르게 알아 잘못된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가는 헛된 노력이 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하늘과 접속된 모든 땅이요,
그 하나님 나라는
하늘과 연결된 새 삶으로 미래만이 아닌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영생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하시고
어떻게 그 나라로 들어가며 영생을 얻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먼저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까이에 왔고 또 오고 있고 올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십니다.
일찍이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났을 때
하나님은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고 찾으시며 가까이 오셨고,
온 인류가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들을 통해서 앞으로 택할 열방에게 가까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열방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그들이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까이 오십니다.
다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왕으로서 예수님을 통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했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너희 마음 속’(within you), 혹은 ‘너희들 가운데’(among you) 있다는 뜻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둘러싸고 논쟁하는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이나
그 집단 가운데 있지 않고
‘너희들이 손잡을 수 있는 곳’(within your grasp)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손잡을 수 있는 곳은,
바리새인과 논쟁하며 그들의 손에 닿을 곳에 서 계신 예수님이고,
손에 잡듯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예수님의, 고치고 가르치고 회심키시는 여러 사역들입니다.
구원하시는 왕으로서 하나님이 예수님과 사역을 통해서 손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사 마음 문을 두드리시지만
다양한 환경과 만남과 묵상 말씀 등으로 오시지만 잘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왕으로 오시는 모습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메시아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당시 유대 사람들은 적들을 다 물리치는 강력한 왕과 장수처럼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손대지 아니한 돌이 거대한 신상을 깨뜨린다는 내용처럼
거대한 신상이 상징하는 바벨론 헬라 로마와 같은 모든 제국들을 일시에 부수어 버리는
그런 장수로 온다고 여겼습니다.
세례 요한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했는데,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버리는 심판자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눅 8:5; 막4:3)
하나님은 악인들과 세상을 당장에 심판하시는 심판자나,
겨울의 땅을 순식간에 봄의 땅으로 바꾸어 버리는 마술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아직 얼어 있는 겨울의 땅에 봄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로 오십니다.
이렇게 오시기에 사람들은 그 왕의 오심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가 밭처럼 무관심하고, 어떤 사람은 돌밭처럼 미지근하고,
어떤 사람은 가시떨기 밭처럼 자기 관심에 붙잡혀 있지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옥토처럼 씨를 받아들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 속에 있는 겨울 얼음이 깨어지고 삶에 심겨진 씨앗이 자라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메시아는 조용히 봄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때 사탄은 가라지를 뿌리고 믿지 못하게 방해하여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음으로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모습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 같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 같은 두 모습이 공존합니다.
지나갈 시대와 다가올 시대가 함께 있기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 의해 거부당하신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지만
여전히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는 세상과 사람을 바로 심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리시면서 계속 겨울의 땅에 봄의 씨를 뿌리십니다.
알곡은 창고에, 가라지는 불에 던질 때,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가 오겠지만
회개할 시간을 주어 더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그 때를 연기하십니다.
만약 당장 심판한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으니,
그 하나님을 다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져오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지만,
지금의 고단한 현실에서도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이곳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라도
구주 예수를 모신 곳이 하늘나라임을 고백하는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매일 내 마음, 말, 삶을 다스리도록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나라를 미리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은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다시 왕으로 믿고 영접하면,
우리라는 밭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심겨집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록 그것이 육십배 백배의 결실이 아닐지라도, 그 결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확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혼자서도 금방 임하게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믿는 자를 통해서 믿게 하시고,
옥토가 된 이들의 결실을 통해 다른 결실이 생기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완성된 형태로 주실 수 있었지만,
아담에게 그 동산을 관리하게 하심으로
에덴이란 하나님 나라를 함께 공동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 권한을 위임하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면,
인간은 하나님의 종으로 있다가 사용한 이후 무용지물로 격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왕들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혼자 왕이시고, 우리는 다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왕들이 되는 나라입니다.
“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누가복음 22:29, 새번역)
“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계시록 5:9-10)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인 왕국을 다스릴 왕들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시고 들어가게 하신 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예수님이 혼자서 하시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 선을 행하는 일들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들에게 왕과 같은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소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해도,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그 작은 결실과 변화와 달라짐을,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재료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도,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것처럼 소자 한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
우리가 행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까지도 쓰셔서 하나님 통치가 세상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를 씨앗을 뿌리는 농부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은 결코 낭비되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간에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고, 겸손하게 순종하고, 내가 있는 곳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면,
그것들이 앞으로 세워질 궁극적 건물인 하나님 나라 중의 일부가 됩니다.
구체적인 것은 아직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님의 일을 꾸준히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같은 섬에 있지만 두 나라가 다르고
남한과 북한이 같은 한반도에 있지만 다릅니다.
땅의 질과 사람들의 자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다스리는 통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땅이 하늘의 빛과 비를 받아야 생명의 자리가 되듯이,
우리란 삶의 땅은 하늘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것의 종이 되지만,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왕권을 위임받은 왕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욕심과 죄악에 지배당하며 살아가기 쉬운 이 세상에서
매일 내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2년 4월 6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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