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23~4: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약한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자귀신 들린자 간질하는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5:1~5: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는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예수님
복의 전달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자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태 4:25).
그러나 그 무리들이 다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은 자기의 필요 때문에 왔다가 필요가 없으면 언제든 떠났습니다.
제자는 말씀을 배우고 계속 따르는 사람들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우리를 제자가 불러 택한다면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비싼 등록금을 내서라도 따를텐대
하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고 택하신다면 더 큰 은혜로 여기고 따라야 할 것이지만
예수님을 그저 따르는 무리가 되려고 하는 이는 많으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을, 무리가 아닌 제자로 부르시고 택하십니다.
제자로 부르실 때 우리를 향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것이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건지는 것으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그리고 그 후손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단지 그들을 구출할뿐임이 전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려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을 만민 가운데 먼저 선택한 이유도
만민 가운데 구출한 다음, 그들로 만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선발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백성들은 점점 그 이유를 잊어버리고 그릇된 선민사상을 가지게 되어
그 결과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할 그들이, 열방 속에서 또 하나의 어둠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빛
그러나 그들의 실패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 못하여
아브라함의 참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다시 세상의 빛으로 세우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태 5:14)
그들을 제자로 택한 이유는,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탈출선에 승선하는 티켓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출하는 하나님의 에벤져스 단원 자격증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서진 세상을 고치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복구 프로젝트 팀 일원이 되라고 부르셨기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使徒’, 즉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무리라고 불렀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누가복음 6:13)
우리들을 택하신 이유도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살아 있을 동안, 주어진 달란트, 시간,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 법, 새 비전
그런데 이런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애굽의 법과 다른 법을 배우게 하시고, 애굽의 비전과 다른 비전을 품고
애굽의 훈련과 다른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법은, 피라미드 모양의 사회를 만드는 애굽의 법과 다른, 원형 모양의 사회를 만드는 새 법이요,
그 비전은, 다수를 노예로 만드는 제국의 비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나라의 비전이요,
그 훈련은, 자기를 위한 저수지를 크게 만드는 애굽의 훈련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강을 만드는, 만나, 안식일, 희년의 훈련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애굽보다 강한 무기로 무장된 군대가 아니라,
애굽과 다른 법과 비전으로 무장된 거룩한 군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에게 로마와 다른 새 법을 주심으로 12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데
그 법을 주신 곳이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모세에게 처럼 율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태 5:1-2).
이렇게 예수님은 모세처럼 법을 주셨고, 또 당시 랍비들처럼 율법을 가르치셨지만 차원이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법을 받아 전달하는 전달자였지만, 예수님은 선포자이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학자들이 권위있는 학자의 말을 인용함으로 자기 글에 권위를 부여하듯이
모세의 말을 인용하는 인용자요 해석하는 해석자였지만,
예수님은 자신 외에 다른 권위가 필요 없으신 법 제정자이시요 선포자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마태 5:20, 22, 28, 32, 34, 39, 44)....
누구의 권위를 인용할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새 법을 주시며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내용들 중에 유명한 산상수훈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알지만, 그 의미를 바르게 아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법, 천국에서나 가능한 법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기 위해 주신 새 법이고
새 비전입니다.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과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지만,
법의 의미를 바르게 드러낸 옛 법을 다시 해석한 새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됨의 비전만이 아니라 율법의 의미도 곡해했기에
이것은 그들이 이방의 빛이 되지 못한 주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안식일 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법은 당시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법으로, 당시 쉼을 얻지 못했던 종들과 가축과 땅에게 쉼을 주기 위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인간으로 대우받게 하고, 모든 것이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법이 사회 전체에 적용된 것이 희년입니다.
그런 정신을 바로 알고 지켰다면 구약백성들은 당시 가장 행복지수가 높고
가장 건강한 사회로서 열방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안식일 법만이 아니라 십계명의 의미마저도 왜곡시키고 있었기에
오히려 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법의 뜻을 바르게 알려주십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마 5:21-22).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속으로 매우 미워하고, 적대적인 사람을 향해 ‘라가’(멍청한 놈)란 욕을 거침없이 했지만,
직접 살해하지 않았으니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가에 강도 만나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를 돕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도
직접 죽인 것이 아니므로 계명을 지킨 자라고 여깁니다.
이 법을 그런 정도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욕하는 것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고,
원수마저도 구원 받기를 기도함으로 그를 살리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이 계명의 참 뜻이라며
계명을 이렇게 지킬 때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백성이 된다고 하십니다.
간음에 대한 계명도 다시 가르치십니다.
당시 이 계명을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왜곡했는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투나 요리 솜씨를 핑계로 삼아
이혼증서를 작성하여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합니다. 이혼증서를 쓰고 이혼했으니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일인데, 이런 남자는 평소 아내를 어떻게 봤을까요? 한 인격으로 봤을까요, 자기를 위한 도구로 봤을까요?
이 남자는 평소 다른 여성을 어떻게 봤을까요? 마음에 음욕을 품고 보지 않았을까요?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대하면서 계명을 지켰다고 한다면 그가 어떻게 열방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눈 때문에 죄를 짓는다면 그 눈을 빼어 버리겠다는 마음을 갖고서 여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라고 합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마태 5:29).
계명을 이렇게 바르게 이해하고 행할 때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도 다시 해석합니다.
자기 말을 믿게 하려고 땅과 하늘을 걸고 때로 성전을 두고 맹세합니다.
참 진실을 숨기면서 맹세를 통해 말했으니 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맹세를 해야만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라고 하면 예인 줄 알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이방의 빛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오해한 계명들의 의미를 바르게 교정하십니다.
이어 복수에 대해 오해하는 계명도 고치십니다.
“눈으로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 21:24; 레 24:20)는 법입니다.
당한만큼 갚는 복수를 하는 것이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법의 의미에 무지한 처사였습니다.
그 법은 강자가 약자에게 자기가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는 그런 과잉복수를 금지하는 약자 보호법이었습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서로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법의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 한 예를 드십니다.
사람이 오른편 빰을 쳤을 때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율법을 따르면 당연히 상대의 오른편 빰을 쳐야 합니다.
하지만, 왼편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상대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손등으로 쳐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경멸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 이미 눈에는 눈으로 갚는 법을 어긴 것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모독하는 과잉복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왼편을 돌려대라고 합니다.
상대가 손 바닥으로 때리게 함으로 비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비폭력으로 폭력을 대응합니다. 흑인들의 빰을 손등으로 무수히 때렸던 백인들에 대해 왼편 빰을 돌려 댐으로
백인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 폭력을 이겨낸 마틴 루터 킹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계명의 참 의미를 알고 바로 행하면 그는 열방의 빛이 되고 세상을 바꾸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계명들의 의미를 바로 잡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의 의미도 바로 잡습니다.
형상으로 신상을 만들지 않지만, 맘몬을 겸하여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 곁에 황금신상을 세우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려줍니다.
또 금식이나 기도의 법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깨뜨리시고
그것의 참 뜻을 바르고 깨달음으로 새 이스라엘로서 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도 당시의 사람들처럼 성경의 말씀이나 계명을 오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유교적 틀에서 직분의 의미를 이해함으로 성경의 원뜻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성경의 뜻을 바로 알고 행했다면 교회는 얼마나 세상과 다른 곳이 되었을까요?
교회의 의미도 위로 받는 장소로 이해하면서,
믿는 사람들이 교회이며, 교회는 보냄을 받기 위해 훈련을 받는 곳이란 원 뜻을 충분히 알고 드러냈다면
세상의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예배를 영상으로 보는데,
이때에도 예배를 ‘보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예배를 드리며
삶을 예배로 만들 수 있다면,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팔복의 사람들
과거 출애굽한 백성들이 애굽의 법과 다른 새 법을 받고 그 법을 잘 지켰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위대한 전달자요,
하나님의 세상 구원의 프로젝트의 참여자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해 놓은 산상수훈의 의미를 바로 알고 지켰다면
초대교회가 보여준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법의 의미를 바로 알고 행하는 이들을 주님은 ‘복이 있는 자들’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복들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가 아니라
새 법과 새 비전으로 훈련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제자의 모습이 ,참으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볼수록 빛깔이 아름다운 보석처럼,
여러 각도에서 보면 볼수록 새 법과 새 비전을 담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덟 가지 각도에서 볼 때 나타나는 여덟가지 복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내 안에 하나님 다스림이 부족하고, 말씀과 성령이 부족하다며
겸손하게 그분의 은혜를 더 구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자기 안에,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때로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애통하는 사람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예하고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진 온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에 교회에 가정에 사회에 임하도록 늘 간구하고
갈구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남을 비난하고 욕하기 보다
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앞서는 긍휼이 여기는 사람,
마음의 성전에 하나님 한분 만을 주로 모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팔을 걷어 붙이는 화평케 하는 사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때로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아도 기꺼이 행동하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너무 나약해 보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너무 무력해 보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빼앗긴 영역을
다시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정복하는 보내는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요,
총칼과 탱크로 무장한 무장군인이 아니라, 새 율법으로 무장한 거룩한 군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런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려고 하십니다.
그들은 너무 똑똑하고 영민하고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모습의 사람들이 아닌,
자기를 향하여서는 겸손하고 타인에 대하여는 자비롭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순종하는
그런 거룩한 바보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
그 많은 돈을 탕진하듯 병원과 학교를 짓는데 사용해 버리는 바보,
오십 중반에 의학공부를 시작해 10년간 힘들게 딴 전문의 자격을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 사용해 버리는 바보,
항암투병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같은 환우들에게 복음을 전해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며 웃는 바보,
자기 자녀도 아닌 학생들을 맡아 그들을 품고 울고 기도하는 바보,
그런 바보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요,
여덟 가지 빛깔로 반짝이는 보석입니다.
우리는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제자입니까?
나는 여덟 가지 복의 모습 중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2022년 3월27일 주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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