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새롭게 만나는 예수그리스도7)

왕언니 2022. 3. 17. 11:33

마태복음 4:12-17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사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복음 4:14-21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기위해 그분의 일생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사명, 즉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아버지의 뜻을 행할 사명을 받고

이후 광야로 가셔서 사명을 이루실 방식에 관한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탄은

빵으로 배를 채워주는 포퓰리즘의 방식으로, 기적을 보여주는 종교의 방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군사의 방식으로 그 사명을 이루라고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길을 다 거부하십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죄와 악한 자를 이길 수 없으며 구원의 사명을 성취할 수 없음을 아시고

십자가를 통해 사명을 이루는 길을 걷기 시작하십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사역은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되는데, 이즈음 세례 요한이 잡힙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 나라 소명을 안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처럼 자신을 새롭게 하라는 회개의 외침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만하던 이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던 군인들과 세리들에게, 헤롯 왕에(게)까지 거침이 없었습니다.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았던 죄를 회개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하였고,

왕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심

 

요한이 잡히면서 물세례 운동은 서서히 중단되어 갔지만,

그때부터 예수님은 북쪽의 갈릴리 지역으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경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4:12~13)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회개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4-15)

 

회개와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세례 요한이 이미 외쳤던 내용이지만

예수님은  문제의 핵심은 로마란 외부요인이 아닌

하나님 백성의 소명과 모습을 잃어버린 내부 요인인 이스라엘의 죄에 있으며,

따라서 로마에 대한 저항보다, 회개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회개와 새롭게 됨의 뜻을 담는 좋은 그릇이 되었기에,

세례 요한이 잡히기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도 물세례를 베풀면서 요한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요한복음 3:22; 4:2) 

하지만 갈릴리로 올라가신 후부터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갈릴리 초기 사역입니다.

 

그 사역 중의 하나는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며 왕 노릇을 하고 있던 귀신들을 내어 쫓는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회복되었습니다.

그중 막달라 마리아, 군대 귀신이 들렸던 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역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했지만, 그 의미는 충분히 몰랐기에 주님은 그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느니라”(누가복음 11:20). 

귀신 축사사역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증거로 보여주시면서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소문이 금세 온 동네에 퍼져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들었기에 식사할 겨를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병 고침을 받은 이들에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막 7:36)

 

주님이, 바리새인들과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던 것은

사람들이 질병 치유만 보지 않고 그 치유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를 원하셨으며,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을 강조했지만,

그 율법 준수가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는데

예수님은 안식을 잃어버린 환자들에게 질병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이 실제 임한 것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인과 세리들과 같이 지내시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이심으로

자신들은 그들과 달리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로부터 극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마가복음 2:16)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기만 했을 뿐, 그들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그들을 새 사람으로 바꾸시어

세리장 삭개오도 창녀였던 이도 제자가 되어 인격적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도록

여러 비유들을 통해서 매우 쉽고 깊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셔서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질병을 치유하시고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가르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악한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4:23, 9:35)

 

 

 

요한의 질문

 

예수님의 사역은 ,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베풀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베풀면서 행했던 그 사역을 이어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준비했던 길로 오셨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예수님은 치유와 축사와 변화시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티저 영상이었다면 예수님은 본 영상이었습니다.

 

엘리야도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위대하지만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에 그쳤으나,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아를 직접 눈으로 봤고 물세례를 베풀고 그분의 길을 친히 준비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 중에서 탁월하고 최고의 선지자이지만,

그는 유대교의 관점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안에 있어서

<메시아는 죄에 대해 단호한 심판을 단번에 내리시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는 자신을 감옥에 가둔 악한 자 헤롯을 심판하지 않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잘 싸웠지만,  이세벨이란 악이 여전한 것을 보고 낙심했던 엘리야처럼)

그가 제자를 보내서 묻습니다. 

“예수께 여쭈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3).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4~5)

 

악인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들이 치유를 받고 길을 잃은 자들이 돌아오고 죄인들이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심판이 올 것을 경고하면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은 회복이 임한 것을 보여주면서, 신랑을 맞이한 잔칫집과 같은 삶을 살게 했습니다.

요한은 심판의 하나님을 주로 보여주었다면,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아주 멋진 최고의 전화기도, 전화 걸고 받는 것 외에는 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전화기는 디지털 시대의 아주 기초적인 휴대폰보다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구약 시대의 위대한 자이지만, 신약시대에는 작은 자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누가복음 7:28)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들이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고편들이었다면, 예수님은 그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실체였던 것입니다.

요한까지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알리는 선포자였다면,

예수님은 선포자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신 성취자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 훌륭한 스승으로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4-16) 

이사야 선지자는 큰 빛이 온다는 예언을 했다면, 예수님은 온 세상의 빛이 되심으로 그 예언의 성취가 된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

 

주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여러 사역을 행하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가셔서, 안식일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서를 펼쳐서 읽으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그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랍비가 성경 구절을 읽으면 그 구절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기도하며 끝나는데,

예수님은 성경 예언을 읽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누가복음 4:21) 

주의 은혜의 해가 온다는 예언이 있다고 하지 않고, 그 예언이 지금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뜻하는데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보낸 50년째 해는, 49년 동안 비뚤어진 모든 것을 바로잡는 해,

모든 생명이 다시 충만하게 사는 안식의 때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때 일어날 포로 된 자의 자유함, 눈먼 자의 보게 됨, 눌린 자의 해방에 관한 예언이

그 예언을 읽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가 온다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 리포터가 아니라,

은혜의 해를 만드는 뉴스 메이커이기에

예수님은 어떤 예언자들, 어떤 성인들, 어떤 인물들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우리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그분에 대해 놀라고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예수님 같으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경탄하게 되지만

성경 속의 예수님은 멋지고 놀라운 분으로 경탄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경이 예언한 그분이시기에

감탄의 대상을 넘어 믿고 예배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속의 예수님을 만날 때 그분을 믿을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자기가 생각한 메시아 상과 다르다고 해서 의문을 가질 수도 있고,

나사렛 고향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면서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약속 성취 자이신 예수님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C.S. 루이스는 회의론자였습니다.

 

그가 <반지의 제왕>을 쓴 친구 톨킨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민족들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들은 신화 형태를 갖는 것이 많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소망과 유토피아의 꿈들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단군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다. 어떤 것이 실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도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다.

그 역사 이야기 속에는 아름답게 만들어진 세상이 지금은 심히 망가졌지만, 그것을 회복하게 될 것이란 소망이 있다.

그 회복이 어떤 한 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그런데 만약 약속한 그분이 역사 속에 오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도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이야기로 그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 된 이야기다.

예수님은 이야기가 현실이 되게 만든 분이다.’

 

이런 대화 속에서 루이스는 예수님은 훌륭한 분, 위대한 분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입장은 셋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가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주장했다면 그를 거짓말쟁이로 대하거나,

둘째는 자신이 그런 존재인 줄 모르고 주장했다면 그를 미친 사람으로 대하거나,

셋째는, 만약 자신이 행하고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그를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거나, 

이 셋 중의 하나의 반응밖에 없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는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도 성경 속의 예수님은 바로 안다면,

그분은 감탄과 놀라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한 것처럼 구약 이야기를 성취하신 그리스도이시라면,

우리는 루이스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이 없습니다.

 

                                                                                                    2022년 3월 13일  주일 설교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