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8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사도행전 3:1~8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못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니
저는 이번 안식월 동안 말라위를 잘 다녀왔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말라위는 매우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대부분은 공립학교에 보냅니다.
그러나 이들 손에는 교과서가 없고 책상도 없을뿐더러
전기 보급률이 20%가 안되어 집에 가서 공부할 수 없습니다.
국민소득 500불인 이 나라 국민들은 대부분은 가난하고
그들 중에도 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직업이란 것도 산업도 자원도 별로 없고,
가난한 백성을 일으켜 세우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지도층도 별로 없어
이 나라 백성 대다수는 가난 때문에 사람답게 일어나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하루에 고작 3편 정도가 있는 말라위 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그 나라보다 6-70배 더 잘 사는 우리나라의 경제의 힘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 대로를 달리면서 깨끗한 거리, 즐비한 높고 좋은 건물들,
길 위의 좋은 차들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너무나 발전한 나라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사는데,
그렇다고 국민 모두 사람답게 일어나 걷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힘차게 걸어야 할 많은 청년들이
결혼도 출산도 꿈도 포기하고, 그런 저런 이유로
출산율은 작년 0.81명으로 세계 최저이고,
그 외의 문제들로
우리들은 그들과 달리 뛰고 있다고 하지만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이 땅에는 도심이 물에 잠기는 극심한 폭우가 있었는데,
반대로 유럽은 극심한 폭염과 가뭄을 겪고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은 그 문명이 기본적으로 탄소에 기초한 문명이다 보니
더 많은 소비를 통해 지탱되는 문명인데,
이 문명은 한편 경제의 탑을 높이 세우면서
동시에 그 탑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후위기입니다.
이런 문제로 선진국의 많은 사람들도 비틀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가난 때문에, 어떤 나라는 풍요로운 삶의 방식 때문에,
또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건강하고 활기차게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그 핵심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사람 자신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일어나 걸으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은 사람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 이유로 일어나 걷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걷지만 넘어지고 주저앉고 비틀거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약 30년 머무시는 동안 하신일은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심으로 ,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일어나 걷도록 하신 일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걷지 못하게 하는
인간 속의 죄의 문제들을 씻게 하시고,
또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악이란 장애물,
저 악한 자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김으로,
제대로 일어나 길을 걷게 하신 것,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일은 지상의 삶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그 일은 다른 형태로 계속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보혜사 성령님도, 사람을 사람으로 일어나 걷게 하십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 성령님을 통해 일어난 약 30년간의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이 계속 써가고 있습니다.
오순절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님은 오순절에 바람과 불의 혀처럼 임하셔서,
예수님의 하시던 사람을 살리는 그 일을 이어 행하십니다.
성령님은 오순절이란 절기에 임했습니다.
오순절의 오순은 ‘다섯의 오’와 ‘열의 순’이 합해진 50이란 말입니다.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란 말입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이 날을 ‘칠칠절’, 7일이 7번 지난날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헬 라말로 번역하면서 ‘오십 번째’란 의미의
‘펜 테코 스테’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즉 칠칠절은 유월절과 장막절 사이에 있는
3대 절기 중의 하나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칠칠절,
즉 오순절은 한 해의 첫 농사인 보리를 추수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초실절,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한 해의 둘째 농사, 즉 가을 다른 모든 열매를 추수하여
창고에 넣는 절기를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니 씨 뿌림에 해당되고,
칠칠절 오순절 초실절은 봄의 첫 열매를 추수한 때이고,
수장절 장막절은 가을의 모든 열매를 거두는 최종 추수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칠칠절 즉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임한 이들이 그곳에 모인 120명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사명을 다시 감당할 성령의 첫 열매들입니다.
이들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어나 걷게 된 것이고,
이들을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구원을 받아
창조된 사람의 모습으로 일어나 걷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두 번째 가을 추수인 영적인 수장절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유월절과 수장절 사이에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로 사람을 구원하신 초림과,
사람을 다 구원하실 재림 사이의 있는 시기라고 봐도 됩니다.
바람처럼
이렇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때
성령님은 하늘에서 부는 강한 바람으로 임하셨습니다..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사도행전 2:2)
성령이 강한 바람으로 임하셨다는 말을 원어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영, 바람, 호흡’은 다 같은 단어로 ‘프뉴마’라고 합니다.
성령은 holy spirit, ‘하기 오스 프뉴마’입니다.
성령이 강한 바람처럼 임했다는 것은
‘거룩한 프뉴마’가 ‘강한 프뉴마’로 임했다는 말입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의 한 장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빚어진 흙에 하나님이 프뉴마 즉 호흡을 불어넣자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일어나 걷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또 이 장면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적 환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대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민족의 이런 상황을 슬퍼하며 기도하던 중에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수북한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백성,
사람으로 걷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한 장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수북한 마른 뼈들 위로 강한 바람이 불자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고
그 뼈들에 살이 입혀져 그들이 일어나서 걸으면서 거대한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지금 오순절 바람처럼 임한 성령님은
바로 마른 뼈와 같이 이들을 다시 일어나 걷게 하는 일을 이루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아 있는 12지파의 이스라엘이,
120명 제자들을 통해서 다시 영적 제사장 소명을 감당하는 사람들로
다시 일어나 걷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바람 같은 성령은, 실패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주저앉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걷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불의 혀처럼
또 성령님은 불의 혀처럼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이 임하자,
120명 제자들은 그들의 혀로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방언은 기도할 때의 그런 방언과는 다릅니다.
오순절 명절, 흩어진 교포 유대인들이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 언어에 익숙한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듣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언어의 기적을 주시는데, 이 일은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과 연결됩니다.
당시 하나님을 거역한 그들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는 심판을 받았고 그래서 흩어집니다.
언어 간 민족간 소통이 단절되고 끝없는 갈등과 분쟁이 생겨났는데,
그 오랜 저주가 성령을 받은 이들을 통해 끊어집니다.
그리고 민족간 언어간 인종간 마음들이 연결되고 다시 함께 걷는 사회가 시작됩니다.
오순절 성령님이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임하셨는데,
그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을
사람들 속에 역사하심으로 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기록이 우리가 아는 사도행전인데, 엄밀히 말하면 성령 행전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순절 성령님이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임했는데,
이때 일어난 일은 사람 내면에 일어난 어떤 종교적 신비체험이 아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을 경험한 개인만이 아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임함으로 생겨난 일은 누구가 알 수 있는 공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비겁한 제자들이 담대해지고, 이기적인 이들이 이타적이 되고,
자기주장만 하던 이들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언어와 삶과 태도가 달라진 새 사람이 되어 거리를 걸어 다녔고,
그러한 이들을 통해 새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 베드로의 호흡에 실린 말씀은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말씀을 들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망각한 죄,
사람답게 걷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하루에 3천 명이나 되는 이들이 당시 예루살렘을 바꾸는 거룩한 영적 군대가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역사상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사람을 세우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루는 베드로가 유대교 관습을 따라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美門’이란 이름의 성전 문 곁에 한 사람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걷지 못한 채로 늘 그 자리에 있던 그에게 베드로가 이렇게 외칩니다.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사도행전 3:6)
그러자 그가 일어나 서고, 걷고 뛰게 되었는데. 일어나 서서 걷게 되자,
주로 땅만 보거나 사람 손에 든 몇 푼 만 보던 그가
저 멀리를 보고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늘 남의 손에 끌려 다니던 그가 자기가 남의 손을 잡고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신체적으로 일어나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한 이 기적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이 기적은 성령님이 단지 신체적 치유를 넘어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하심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을 손을 잡아 일으키셨듯이,
성령님은 그들 안에 들어가서 일어나 걷게 하고
그리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을 돕게 하시고, 함께 걷게 하십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알다시피 일어나 걷는 것은 인간의 외적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열 달쯤 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발로 일어서서 첫걸음을 떼려고 합니다.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져도 걷기의 모험을 포기하지 않고
최초의 보행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사람임을 증명해 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걷는 것이 곧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침팬지나 고릴라와 같은 동물들도 두 발로 걷지만 잠시일 뿐,
곧 네 발로 대부분 다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동물도, 중력과 맞서 사람처럼 등뼈를 똑바로 세우고
대지위에 곳곳이 서서 걷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모습인데,
이 외적 모습은 인간의 내적 본질을 알려주는 중요한 아이콘이 됩니다.
일어나 걷게 되면 인간은 눈을 들어 멀리 보고
또 높이 하늘을 올려다보게 됩니다.
일어나 걷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첫째 특징입니다.
또 일어나 걷게 되면 두 손이 자유로워 도구를 만들고
그 많은 도구들이 두 손의 연장이 됩니다.
그 두 손으로 서로 손을 잡고, 두 손의 연장인 다양한 도구 직업들이
함께 손을 잡으면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룹니다.
또 일어나 걷게 되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고 걷고,
그러다가 길이 생기고, 그 길을 함께 걸으면서 문화가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원석을 보석으로 가공하듯,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이처럼 일어나 걷는 인간의 외적 모습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사인입니다.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위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일어나 걷는 것이고,
이것이 일어나 걷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이 이런 모습으로 일어나 걷도록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점차 우리는 걸으면서 위를 잘 보지 않습니다.
하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점차 우리는 자유로운 두 손으로 서로 손을 잡지 않고 주먹을 쥐고 싸웁니다.
두 손의 연장인 도구를 만들되 무시무시한 전쟁도구들을 만듭니다.
점차 우리는 두 발로 하나님의 길을 걷지 않고 죄와 탐욕의 그릇된 길을 걷고,
그 길을 따른 타락한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죄가 구조화되고 극심해집니다.
그래서 분명히 신체적으로는 일어나 걷는데, 영적으로 앉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비틀거립니다. 관계적으로 계속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눈물 한 방울
사람이 사람으로 걸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즘은 더욱 실감 나는 말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시적 언어로 다 와닿게 말해줍니다.
그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2019년부터 22년까지 죽음과 독대하면서
죽음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관찰하고 문학가로서 글로 남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많은 글을 썼는데, 결국 전할 마지막 단어가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디지로그’란 말, ‘생명자본’이란 말도 있는데,
그가 썼던 모든 글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다시 써서 마지막 한 마디를 쓴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김지수 작가와 대담 속에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라네.”
“아….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이란 말씀이지요?"(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땀방울을 흘리면서 사회를 세웠고,
피를 흘리면서 민주화 혁명도 이루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합니다. 그의 글입니다.
“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피와 땀이 하나가 되어야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처럼 힘을 낼 수 있는데,
현실은 반대로 대립과 분열의 피눈물로 바뀌고 있다.”(이어령, <눈물 한 방울>)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이들은 지금도 수없이 많고,
또 피를 흘리면서 싸우는 이들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를 위해서 땀을 흘리고 자기와 관련된 것을 위해 피를 흘립니다.
아무리 땀과 피를 흘려도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없으면,
남을 생각하고 남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으면, 땀은 독점이 되고 피는 폭력이 됩니다.
그 땀은 그 피는 도리어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땀과 피만으로는 아직 사람이 아니고,
그것만으로는 이 세상이 따뜻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땀과 피는 흘리지만 눈물이 없어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없어서 비정한 전쟁터와 같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리던 코로나도, 닭이 걸리던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 나사로의 죽음과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보고 흘렸던 예수의 눈물,
안회의 죽음과 골짜기에 외롭게 피어 있는 난초 한 그루를 보고 탄식한 공자의 눈물,
길거리에 병들고 늙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며 흘린 석가모니의 눈물.
그 사랑과 참회의 눈물이 메마른 사막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이어령, <눈물 한 방울>)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눈물 한 방울”인데,
그 눈물은 먼저 참회의 눈물입니다.
참회의 눈물 한 방울,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면서 애통해서 우는 회개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또 기후위기를 만드는 문명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데
이곳에서 기후위기를 만드는 삶을 살아갔음에 대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그런 눈물을 가지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고서
어떻게 이 위기가 해결이 됩니까?
이런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없다면,
그 는 겉으로 교양 있어 보여도 마음으로 매우 교만하고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참회의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사랑의 눈물 한 방울’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흘리는 감상적 눈물 한 방울이 아닙니다.
남을 위한 작은 헌신이고 섬김입니다.
이 땅의 소자를 위해 물 한 그릇을 주고 지갑을 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엄청난 땀과 눈물을 흘리고 남다른 성과를 이룹니다,
그리고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도 없다면,
아니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어찌 그것이 성공입니까?
어찌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없다는 말은 위로 하늘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한 눈물 한 방울이 없다는 것은
옆으로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고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눈물 한 방울이 메말랐다는 말은 일어나 걷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시 일어나 걷게 하십니다.
다시 위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예배하도록, 다시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도록,
다시 아래로 내가 선 땅을 조금이라도 좋게 변화시며 살도록 합니다.
다시 우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맺히게 하십니다.
말라위
서두에서 말라위 이야기를 잠시 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으로 일어나 걷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덥고 습한 여름이지만 그곳은 겨울이고 건기입니다.
새벽은 기온이 10도 정도까지 내려가서 추워서 이불을 덥고 잡니다.
그런데 아침에 동네 아이들이 교회로 왔지만 의자에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냥 흙바닥에서 헝겊 같은 것을 덮고 잡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매일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게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 이웃도 있지만, 저 먼 나라의 그들을 향하여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밀알 복지재단 장애인시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그 땅에 이미 눈물을 뿌린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 교회를 다녔고 자라났던, 김경래 장로님의 아들 김용진 목사님이
말라위 교도소 죄수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고
또 손봉호 장로님이 은 코마란 지역에 장애인 시설을 세우셨고,
그곳을 지금 밀알재단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유근 장로님이 18년 전에 수도 리롱웨 외곽에
그 나라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큰 병원과 간호대학과 정보통신대학을 세웠습니다.
크고 작은 건물만 20여 개가 되는 큰 규모의 병원과 학교입니다.
(말라위 대양누가병원)
그 병원에 행정 고위직 은퇴 후, 늦은 나이에 시작한 10년간의 의학공부를 마치고
전문의가 되신 황하수 장로님이 염현숙 권사님과 함께 그곳에서 섬기고 계셨고
또 정원숙 전도사와 최원석 선교사는 말라위의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라들이 많은데 하필 아프리카의 말라위란 나라에
우리 교회에 속한 다섯 분이 눈물을 뿌렸고 또 뿌리고 있는데,
이것이 그냥 우연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땅에서 흘린 눈물방울들이 씨앗처럼 떨어져 이제 나무가 되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더 자라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눈물 방울이란 물을 줘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눈물방울들, 재정으로 후원하는 눈물 방울들,
은사를 따라 봉사하는 눈물방울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눈물 방울들이 떨어지면
그곳에 심긴 사역과 병원과 학교란 나무가 자라고 숲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를 일어나 걷게 하십니다.
나만 일어나 걷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함께 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 모두 이전보다 더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옆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령 교수의 말처럼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힌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코로나로 전쟁으로 기후위기로 우리도 각자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있지만,
나를 주저앉아만 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힘차게 걷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으로 인해
일어나 걷고 일어나 걷게 만드는 사람들과,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022년 8월 14일 설교 (정현구 목사)
'그룹명 > 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빨강,파랑, 성령님은 어떻게 삶을 아름답게 만드시는가 (4) | 2022.09.21 |
---|---|
마음이 찔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키는가? (4) | 2022.08.26 |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 ..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예수님 (2) | 2022.07.13 |
"더 낮게, 더 낫게 " 다시 시작하게하시는 예수님 (4) | 2022.07.08 |
선한 능력으로 위대한 사명을 .. (0) | 2022.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