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정현구목사님 목회칼럼

마음이 찔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키는가?

왕언니 2022. 8. 26. 20:46

사도행전 2:37~42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세 가지 빵

 

말라위에 있었을 때,

토요일 오전시간, 동네 가난한 아이들이 채플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은  지금 새벽 기온이 영상 10도 정도 되는 겨울인데,

간밤에 제대로 덮지도 못하고 잔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채플의 한쪽 구석 방에 모였습니다.

 

이들에게  황하수 염현숙 선교사님이 빵에 땅콩 잼을 발라서 먹이고

그리고 현지인을 통해 간단한 영어와 셈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보고 있는 저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해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먹는 빵이 맛있죠?

이 빵을 잘 먹어야 몸이 자라고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이 빵과 다른 종류의 빵이 있어요. 그것도 잘 먹어야 해요.

지식의 빵이죠. 지식의 빵을 많이 먹어야 정신이 자라니까

영어 산수 공부 열심히 하세요.

 

그런데 또 다른 종류의 빵이 있어요.

말씀의 빵이에요.

이 빵을 잘 먹어야 영혼이 자라고 좋은 사람이 되죠.

그러니 잘 하나님 믿으세요.”

 

 

그들이 빵 한 조각을 움켜쥐고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물질의 빵이 모자라 인간답게 일어나 걷지 못한다지만,

그들에 비하면, 물질의 빵, 지식의 빵이 차고 넘치는 우리는

무엇이 결핍되어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게 일어나 걷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결핍

 

구약시대에 아모스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는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넓은 영토를 회복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번영을 구가했던 풍족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아모스는 기갈의 때라고 말합니다.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마음의 찔림이 없고 변화도 없었던 때,

그때 그들은 사람으로 일어나 걷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의와 공의란 말씀의 빵을 먹어야 한다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5:24).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굶주리는 시험을 받으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

 

물질의 빵이 풍족하여, 그 빵이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빵이,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의 땅, 그리고 세상은

물질의 빵보다 말씀의 빵의 결핍이 본질적 문제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는 들음이 있다는 것인데,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마음의 찔림이나 성찰이 전혀 없이 산다면,

그저 육신의 빵만을 구하는 본능 충족을 따라서만 산다면

그 사람은 점차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일까요, 아니면 짐승의 형상일까요?

 

 

 

 

영적 청력의 회복

 

이어령 교수가 돌아가시면서 <먹다, 듣다, 걷다>란 책을 냈습니다.

 

교회답다는 것,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을 세 가지 동사인 먹다, 듣다, 걷다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그중에 ‘듣다’라는 것은 말씀의 빵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일어나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음이 필요하다는 것,즉 들음의 차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일어나 걷게 하시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서 가장 애쓰신 것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말씀을 듣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도 역시 이를 위해서 오셨는데, 성령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역시 불의 혀처럼 임해 영혼의 귀를 열어 말씀을 듣는 청력을 되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일어나 걷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듣게 하는 기적

 

그 일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수많은 지역에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그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로마 사람, 그레데 사람,

아라비아 사람들로서 유대교에 입문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예루살렘까지 온 것은 가족 친척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고

유대의 독립에 대한 신앙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된 나라,

지금도 또 다른 바벨론에 해당하는 로마에 의해 포로로 잡혀 있는 이 나라가 독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실 구원이며, 결국 유대 나라가 세워진 예루살렘과 시온산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고 온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세상에 베풀 큰 구원이라는 신념 때문에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순례를 온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그렇게 들었고, 매년 반복되는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는

그들이 들었던 믿음, 즉 구원은

온 세상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는 것이란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제자들조차 승천하여 그들을 떠나시는 예수님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온 세상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 위에 성령님이 임하고,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향한 구심적 운동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세계를 향한 원심적 운동이라고 패러다임을 교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과 조상을 통해 오랫동안 들었던 것 때문에,

예루살렘 순례를 통해 그것이 더 강화되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듣지 못함으로 아직 제자로서 걷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 위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120명 제자 위에 성령님이 불의 혀처럼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함께 말하는 소리가 그곳에 모인 여러 나라 사람들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비로소 모든 이들이 ,자기들 언어로 들어야 할 것을 명확히 듣는 일이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놀라워하는 이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이 현상의 의미를 풀어 설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유월절 이후,

약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은 자이며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당시 대제사장들의 선전한 내용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며,

눈앞에 펼쳐진 성령의 현상은 ,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일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저주하심으로 십자가란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고 들었던 그들의 귀를

성령님이 열어서, 그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택하신 것이고,

십자가는 저주의 사건이 아니라 구원의 사건이라고 설교합니다.

 

그 말씀이 비로소 들린 것입니다.

들리니 비로소 선민의 의미, 구원, 하나님의 섭리가 다 제대로 보이게 되었고,

비로소 그들이 유월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것이 잘못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찔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말씀이 귀로 들리자,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받고, 그들의 입에서 이런 애통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사도행전 2:37)

 

마치 깨끗한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보듯, 밝은 빛 앞에 서서 자기의 마음속을 보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는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지자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걷게 된 것처럼

 

주님 앞에서 쓰러지자 비로소 일어나 걷게 되고,

말씀을 듣고 자기 존재가 죄인임을 알고 자백하는 것,

내가 죄인이고, 내가 문제입니다, 이런 영적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런 순간이 그를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으로 일어나 걷게 만듭니다.

 

영혼을 진동시키는 천둥 같은 소리를 듣고, 마음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 서기 시작합니다.

 

들음을 통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 이런 들음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하고,

이런 말씀의 빵이 우리를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면, 최근에 그런 들음이 거의 없다면,

겉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적으로는 일어나 걷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내적으로 후퇴하고 있고,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 들음을 통해 마음의 찔림을 받았던 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후회가 아닌, 돌이킴이고 , 세례는 소속을 바꾸는 것입니다.

 

 

 

 

들어야 들리게 한다

 

말씀을 들었던 그들은 그 한 번의 들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그 기억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 듣습니다.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2)

 

“우리가 어찌할꼬”란 탄식을 자아냈던 그때의 들음은

패러다임과 방향 전환이었다면, 이후 그들의 계속된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 창문으로 계속 보고, 새 방향으로 줄곧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또 그들은 교제했습니다.

들었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을 나누는 교제였습니다.

 

떡을 떼었는데, 떡은 성만찬을 말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성만찬을 행하여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를 늘 기억했습니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모든 것을 가장 압축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귀로만 듣지 않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으면서

온 감각을 깨어 있는 귀로 만들어 말씀을 매번 깊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말씀을 한번 듣고 또 계속 들으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들린 말씀이 언어로, 태도로, 삶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 귀족사회가 보여준 좋은 옷, 화려한 연회,

그런 사회적 교양과는 성격이 다른, 너무 순수하고 향기 나는

다른 사람의 호감을 자아내는 것이어서, 강력한 자석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겼습니다.

 

“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2:47)

 

그러다 보니 말씀을 계속 들음은 먼저 그들 개인을 바꾸고

바뀐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새 공동체가 곧 세상에 말씀을 알려주는 확성기가 되어,

온 세상에 말씀이 들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적 빵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의 빵을 먹고살았더니,

위로 하늘을 보는 차원이 회복되었고, 그래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눈에 맺혔더니,

이렇게 참 살고 살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요즘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듣는 시대입니다. 그냥 듣지 않고 보면서 듣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든지 보고 듣고, 보고 듣기에, 강력하게 우리 안에 새겨집니다.

드라마, 역사, 음악, 여행, 연애, 요리, 정치에 관련된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듣는 데 사용하는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지식과 간접경험이 늘어나지만, 그래서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어찌할꼬란 하나님을 향한 회심으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수많은 봄과 들음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세상과 나를 보는

세속적 신념체계를 흡수하고 학습해가면서 세상 쪽으로의 회심이 일어납니다.

 

또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진 이들의 견해를 계속 듣다 보니

애코 쳄버 현상이 생겨, 자기 소리의 메아리를 계속 듣게 되면서,

자기 생각과 관점을 더 강화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더 들을수록 더 듣지 못하고, 더 소통할수록 더 단절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 결과 미국 안에 두 미국, 남한에는 두 남한이 존재합니다.

 

또한 오늘날 각자의 소견이 최종 권위가 되다 보니,

모두가 들어야 공통의 권위가 사라짐으로,

말들은 너무 많지만 한 말씀은 없는,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영적 사사시대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수없이 듣지만, 그 들음이 마음이 찌르고,

우리가 어찌할꼬를 말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생각과 관점에 더 굳어져 참된 들음이 더 힘들어집니다.

이렇게 듣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면 세상은 어렵게 됩니다.

 

 

 

 

성령은 듣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령님이 지금도 우리가 일어나 걷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역시 듣게 하시는 것, 귀를 여는 일입니다.

 

듣게 하기 위해서 들음을 방해하는 것을 깨뜨리는 망치로 오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 최고의 랍비였고 지성인이었습니다. 자기 논리와 확신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 확신으로 성도들을 핍박했고, 스데반을 종교재판에 회부했는데,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스데반의 얼굴의 담긴 광채를 보면서, 그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자신이 틀리고 그가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억누르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사도행전 26:14)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것은 말이 가시 채찍을 뒷발로 걷어찬다는 뜻입니다.

스데반 사건을 통해 들린 그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로소 들었고, 사도로서 많은 이들을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의 최고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딸, 이민아 목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회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의 말을 듣고 말하다가 딸의 삶을 통해서 비로소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립니다.

지성만으로는 안되고 영성이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누구보다 영양가 풍부한 식의 빵을 온 국민에게 나눠줬던 그가

말씀의 빵을 주님에게 구합니다.

그 말씀을 듣는 들음이 열리며 마음에 찔림을 얻고

어찌할꼬 하는 회심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말씀이 들리게 하려고,

들음을 방해하는 우리 속의 어둠을 빛으로 드러내기도 하십니다.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와 해리 잉엄은 인간의 속마음을 네 개의 창으로 나눕니다.

 

이것을 조하리의 창이라고 합니다.

각각은 공개된 자아, 눈먼 자아, 숨겨진 자아, 미지의 자아입니다.

 

네 개의 창 중

 

공개된 자아는 공개된 사실이기에 열린 창문과 같이 다 아는 나입니다.

 

눈먼 자아는 나는 모르지만, 남들이 아는 나입니다.

 

숨겨진 자아는 나는 알지만, 남들이 모르는 나입니다.

남모르는 은밀한 생각이나 욕망의 사적 영역입니다.

자동차의 사각지대처럼 내 삶의 사각지대입니다. 자기기만의 세계입니다.

 

미지의 자아는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입니다.

건물의 지하층처럼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무의식'으로 불리는 이 속에 늑대도 있고 탕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은 점점 더 밝은 빛이 되어

눈먼 나, 숨겨진 나, 미지의 나를 보게 하고,

마음에 찔림을 얻고 어찌할꼬의 탄식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창문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공개된 창문이 더 커집니다.

그럴수록 자신이 내적으로 더 자유롭고

다른 이에게는 더 밝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이처럼 들음이 우리를 사람으로 걷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들음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비틀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듣는 귀를 주소서.

 

여러분, 우리에게 들음이 필요합니다.

만약 말씀의 들음이 없으면 많이 듣지만, 마음이 오히려 공허합니다.

그런 들음이 없으면 비틀거리며 걷게 됩니다.

 

그런데 들으려고 한다면 듣고자 해야 합니다.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눈은 보려고 할 때 눈을 뜨면서 봅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물체가 앞에 있어도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 보지 않음이 내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귀는 다릅니다.

귀로 들리는 소리는 어떤 방향에서도 들립니다.

뒤에서도 들리고 옆에서도 앞에서도 들립니다. 언제 어디서 들릴지 모릅니다.

보는 것은 자기가 추구하는 세계라면

듣는 것은 사방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세계입니다.

 

말씀은 언제 어떤 계기로 우리에게 들릴지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매일 큐티를 하다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서, 언제 어느 방향에서 들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귀를 열어 두고 있는 것을 성경은 “깨어 있다’라고 합니다.

 

문제는 평소 내 귀에 세상의 소리, 내 감정의 소리를 듣는 이어폰을 늘 끼고 다니기에.

그런 이어폰을 빼지 않고 있기에 말씀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한 주를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시간, 내 귀에 그런 이어폰을 달고 다녔습니까?

 

이미 이 세상에는 수많은 소음과 잡음이 가득합니다.

광고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 때문에,

말씀을 들으려면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듣는 hearing이 아니라 들으려 하는 listening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주께서 내 두 귀를 열어주셨습니다”(시편 40:6)

 

귀를 ‘열어준다’라는 단어의 원어가 “카라”( כָּרָה )입니다.

“파다, 뚫다”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화강암과 같이 단단한 머리에 붙은 두 귀를 뚫어 구멍을 내시어

말씀이 들리게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의 귀를 열어주소서, 이런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말씀이 언제 어디서 들릴지 모릅니다.

찬양에서, 기도에서, 설교에서, 성도의 교제에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런 마음으로 ‘조용한 시간’ 큐티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십시오.

언제 어떤 말씀이 마음에 들릴지, 언제 그 말씀이 마음의 눈물샘을 터트릴지 모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십시오. 또 그런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일기를 써보십시오.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내 길을 걸으시기에,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하면서 일기를 써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평범한 일상도 특별한 의미로 열리기도 하고, 길가에 핀 풀꽃을 보다가,

어떤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요즘의 기후 상황의 뉴스를 접하면서도 말씀이 들릴 수 있습니다.

듣는 귀를 열어 놓으면 언제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들립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먹다, 듣다, 걷다,’는 세 동사로 정리했는데,

지금 어느 시대보다 수많은 들음이 있지만, 사실상 참 들음이 더 희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최근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그 많은 들음 속에 마음의 찔림을 느끼게 하시고,

어찌할꼬란 애통을 만드는 그런 들음이 있습니까?

말라위 어린이들은 물질의 빵이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물질의 빵, 지식의 빵은 넘치지만, 말씀의 빵은 더 결핍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제대로 들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최근 듣고 마음이 찔린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들림이 없는 시간이 길었다면 그때는 뭔가 공허하고 빈 것 같지 않으셨습니까?

들음이 넘치는 시대에 참 들음을 더 간절히 구합시다.

말씀의 빵을 더 사모합시다, 그러면 들립니다.

그 들음이 다시 회복시키고 일어나 걷게 하실 것입니다.

 

2022년 8월 21일 설교 (정현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