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19~2:7
빛을 밝히는 촛대.
요한계시록에는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본 네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가 금 촛대와 인자의 환상으로. 1장 12절입니다.
“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요한계시록 1:12)
그 금 촛대는 “ 일곱 교회”(요한계시록 1:20)입니다.
교회를 금 촛대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빛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만약 교회가 빛을 밝히면, 참된 평화의 빛을 밝히고, 참 사랑의 빛을 밝히면 어둠을 이깁니다.
그래서 교회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다 “이기는 자”라는 말로 끝납니다.
‘이기는 자’를
세상에서 보는 극한의 경쟁에서 이긴 자, 구원 경쟁에서 이긴 자,
세상 게임에서 살아남은 자, 이렇게 가르치는 신천지 이단이 있지만,
이기는 자는 그런 구원 경쟁에서 뽑힌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기본적으로 이 지상에서 어둠과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빛을 밝힘으로 어둠을 이기는 촛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빛을 밝히는 촛대며 이기는 자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빛을 품어야
촛대는 자기가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므로 빛을 밝히려면 자기 안에 빛을 품어야 합니다.
아무리 촛대가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심지어 다이아몬드를 붙였다고 해도
그 안에 불을 담지 않으면 어둠을 밝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촛대의 본질은 자기 안에 빛을 품음으로 자기 밖으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의 본질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이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계시록 1:6)
“나라로 삼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 통치, 인도하심이란 빛을 자기 안에 품었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뜻으로
즉 하나님의 통치와 말씀이란 빛을 자기 안에 담고 삶으로
산 위의 동네가 되어 그 빛이 밖으로 비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나라와 제사장”이란,
예배를 통해 안으로 빛을 품고, 선교를 통해 밖으로 빛을 증거하는 자들인데,
이것이 바로 촛대란 이미지 속에 담긴 교회와 성도인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촛대 이미지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안으로 하나님을 닮고 밖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순서는 먼저 내 안에 빛을 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촛대가 됩니다.
그러면 빛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들음
촛대가 안으로 빛을 품는다는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다는, 나의 하나님을 모신다는 의미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그분의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 빛 안으로 들어가듯,
매일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은혜가 내 안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빛을 안으로 품는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촛대 사이로 오시는 인자의 모습이 1장 13절부터 나오는데
옷과 발의 모습도 있지만, 핵심은 얼굴 모습입니다. 입에서 검이 나오는 빛나는 얼굴입니다.
“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1:16).
입에서 나오는 검은 말씀입니다. 빛나는 얼굴로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보고 또 그 표정으로 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와의 인격적 관계를 맺습니다.
이렇게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말씀을 듣는 것이 그 상대를 내 안에 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빛을 품는 것입니다.
편지로 읽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hear가 아닌 listen입니다.
귀 기울여 듣고 즉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은 서로의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일곱 교회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일곱 교회가 다 비슷한 지역에 있고 로마 치하란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일곱 교회에게 각각 다른 말씀을 전하십니다.
왜냐하면, 같은 지역에 있다고 해도 사실은 상황과 구성원과 형편이 다르고
문제도 다르고 해결 방법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지역,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도 사람의 형편은 다 다릅니다.
교회도 사람도 대체할 수 없는 꼭 같은 사람이 없는 유일한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유일한 존재인 교회와 개인에게 말하려면
말하는 방식, 접근하는 방식, 내용이 그에게 맞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립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내용이 다 다릅니다.
각각의 교회를 만나시는 모습도, 교회 별로 다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요한계시록 2:1) 로서 가시고,
서머나 교회에는 “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요한계시록 1:8 )로서 가시고,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요한계시록 1:12) 로서 가십니다.
이렇게 각각에게 편지를 보냈고 각각에게 다른 모습으로 찾아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남에게 하는 말씀을 듣지 말고 자기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하는 일반적인 말씀으로 읽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보낸 편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그 말씀을 읽는 개개인에게 주시려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만약 지식을 얻어보자, 이렇게 읽으면 교양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지 않으면 말씀하시는 분과의 관계 맺음과 만남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편지라는 생각으로 읽으면 만남이 있고 내 안에 들어오는 빛이 있습니다.
인격적 말씀
성경은 모두에게 쓴 말씀이면서 동시에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라도 그냥 안부 편지이거나, 또 그 개인을 잘 모르고 쓴 편지일 수 있지만
내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알고, 나의 깊은 곳까지 다 아는 분이 썼다면
그 편지는 특별한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이라는게 있습니다.
자기를 보는 네 가지 창에 관한 심리학 용어입니다.
첫째는 열린 창으로... 자신도 타인도 모두 알고 있는 나를 보는 창입니다.
둘째는 "숨겨진 창"인데, 자신은 알고 있지만, 타인은 모르는 나를 보는 창입니다.
셋째는 "보이지 않는 창"으로,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알고 있는 나를 보는 창이고,
넷째가 “미지의 창"인데,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나를 보는 창입니다.
우리는 타인도 알고 나도 아는 나,
타인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나를 보면서 나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나를 나는 모릅니다.
나도 타인도 모르는 그런 나는 더더욱 모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반의 반도 잘 모릅니다.
아마 평생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모른 채 끝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모른 채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곱 교회 각각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는데,
그 각각의 편지의 시작 부분에 늘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안다”는 단어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는 것입니다.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요한계시록 2:2)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2:13)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2: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요한계시록 3:1, 3:8, 3:15 )라고 하시면서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가 모르는 나도 아십니다.
내가 몰랐던 장점도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문제점도 아십니다.
우리가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그 말씀은 나를 깨우고 깨닫게 하는 내 안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격려, 책망, 약속
말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유일한 개인으로 아시면서,
또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으로 오셔서 말씀하실 때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다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칭찬입니다.
빛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냅니다.
꽃의 아름다운 빛과 모양을 드러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있는 좋고 선한 것을 알게 해주고 격려합니다.
10가지 없는 것 두세 개, 그러나 주어진 더 많은 모름, 이것을 보여주시고 감사를 찾아보게 함.
내가 몰랐던 장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가치를 알게 해주고, 격려하면
그 칭찬이 내 안의 빛이 됩니다. 오랫동안, 아니 평생 나를 이끄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칭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그 끈기와 경각심을 칭찬하고,
버가모 교회에 용기 있는 믿음을 격려하고,
두아디라 교회에는 성숙함을,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초지일관을 칭찬합니다.
둘째는 책망입니다.
빛은 나쁜 것도 드러내고 그것을 고치게 하고 치유시킵니다.
말씀은 내가 고쳐야 할 것을 알게 하시고, 또 내가 몰랐던 깊은 원인도 알게 해주십니다.
그 깊은 진짜 문제, 진짜 원인을 보게 했을 때, 비로소 치유를 받게 됩니다.
그런 사랑의 책망이 나를 바로 가게 만드는 내 안의 빛이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렸음을,
버가모 교회에는 이단의 가르침에 무관심했음을
두아디라 교회에는 부도덕에 관용했음을,
사데 교회는 영적 무감각을 방치했음을,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치스러운 부를 신앙으로 착각했음을 알려주십니다.
셋째는 약속입니다.
빛은 먼 곳까지 보게 해줍니다.
빛이 희미하면 가까운 곳만 보게 하지만 밝은 빛은 더 멀리 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 년 후, 십년 후만 보면 안되고 죽음 후까지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까운 미래에 주어질 약속도 알게 하지만,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약속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마침내 이르게 될 소망을 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일곱 교회에 다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들은 교회별로 다 다양합니다.
생명나무, 생명의 면류관, 흰 돌, 새벽 별, 흰 옷, 성전에 있는 기둥,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다스리는 것들인데,
이것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란 약속의 다양한 측면들로 다 장기적인 소망입니다.
이런 약속을 분명히 보게 되면
이것은 우리 안에서 북극성과 같이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빛이 됩니다.
우리는 칭찬과 책망과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빛을 담고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을 통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을 보고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향을 향해 걷게 하시지만
가까운 미래에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지금
여기서 계속 붙들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며 칭찬하시고,
돌이켜야 할 것을 고치게 하는 책망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한 걸음씩 하루 빛을 품고 약속을 향하여 걷는 것이 빛을 품고 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조용히 밖으로 빛을 발하는 촛대가 됩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은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현재 진행형으로 오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도 현재 진행형으로 오십니다.
내게 주시는 편지를 들고 내게 오시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일곱 교회처럼 그분이 오신다는 것을 잘 모르고
말씀하시는데 잘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말씀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잘 듣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각각의 편지를 다 이런 말로 마무리하십니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7; 2:11, 2:17, 2:29; 3:6, 3:13, 3:22).
왜 편지의 끝을 항상 이렇게 끝낼까요? 잘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잘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시 일곱 교회의 문제이고
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현재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열을 말하면 몇 가지만 제대로 듣고, 그 말하는 이의 마음, 행간의 의미를 잘 듣지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요즘은 상대와 이야기한다고 카페에 앉아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스마트 폰만 보는 모습을 종종 목격합니다.
상대에게 이야기하는데 듣는 사람이 스마트 폰이나 보고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섭섭할까요?
말할 때마다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계속 말하려고 할까요?
남이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화를 내면서,
정작 나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지 않고 있음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자기 안에 빛이 없이, 빛을 비추려고 하는 가련한 촛대가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여러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여러 비유 중에 가장 먼저 말씀하신 비유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이 비유가 모든 비유의 기초라고 말입니다.
“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마가복음 4:13)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아무리 씨를 뿌려도
씨를 받는 마음의 밭이 씨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길 가, 돌짝 밭, 가시떨기 밭에는 아무리 씨가 떨어져도 다 죽지만,
옥토 밭만이 30배, 60배,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결국 들음이 기초이고, 이것이 없으면 열매도 없고 만남도 없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내게 주시는 개인적 편지로 여기고 듣지 않으면
실제적 변화는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겉으로 빛을 발하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해도, 속에 빛이 없으면
자기도 힘들고 다른 사람도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들으려고 하면 들리고 한 말씀이라도 적용하면, 안의 빛이 됩니다.
예수님이 일곱교회에 오셨듯이 우리에게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 말씀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들을 귀를 가지고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지금도 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기를, 그 주님의 말씀을 잘 듣기를 원합니다.
한 말씀이라도 붙들어, 그 말씀이 내 안에 빛이 되기를
그 안의 빛이 밖으로 비취게 되는,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11월 14일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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