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생을 통해 나중에 완성되는 미래형 구원
“나는 구원 받을 수 있을까?”
구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의 최종 구원 완성 여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일상에서도 나름 열심히 경건과 선교의 삶을 사는 사람도
마지막날 자신이 구원을 이룰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불안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생명의 부활이냐,심판의 부활이냐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기준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자기가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생명의 부활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완성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마지막 구원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을 것이다”라는 미래형 구원은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며 ,
그 결과로 영생에 이르는 귀결에 대한 믿음입니다.
최종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며 ,그것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심판
세상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세상 종말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세상 마지막날에 무슨 일이 있을까요?심판이 있습니다.
“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시 98:9)
부활하신 예수님은 재림하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신경으로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심판의 대상은 모든 인간입니다.죽었다고 예외가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산자와 죽은 자 모두 그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어떤 심판인가요?
첫째 정의로운 심판입니다.
”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계19:2)
인간의 재판은 때때로 정의롭지 않습니다.
불의한 검사,타락한 판사, 무능력한 변호사를 만나면 옳지 않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의롭습니다.
둘째 상벌이 있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심판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벧후2:9~10)
심판의 결과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지옥이라 불리는 곳에 갈 자도 있습니다.
모든 인간 앞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최종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 영원한 구원 혹은 영원한 형벌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심판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
(2) 기준
모든 판결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 심판도 룰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재판관도 법률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형벌을 가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어떻게 내려질까요?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계20:12~14)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후 5:10)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이 말씀들이 보여주듯 행위의 선악이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선을 행했는가,아니면 그 뜻을 거슬러 악을 행했는가에 따라 심판 받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행위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가 믿은 것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는 “어떤 행위를 했느냐”로 확인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믿는 사람의 행위는 선 할것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행위는 악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사랑 없는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 유대교인들 중에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없이
오로지 율법의 규칙만을 준수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내용이 되어야 할 사랑이 배제된 채 형식만 남은 종교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엄수하고, 교회 봉사를 잘 해도 ,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약자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기준으로서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긍휼입니다. 긍휼은 약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공감하여 같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왜 약자를 사랑하고 도와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4~46)
예수님은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통 받는 자이고 ,고통받는 자가 예수님입니다.
못 먹는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병든자, 의를 행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긍휼한 마음을 품고 자기 소유를 나누는 이들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17)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입니다.
선행을 했는가,악행을 했는가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상벌을 내리십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가 무엇을 믿는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상을 받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은 긍휼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며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소유를 베푼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3) 긴장
어떻습니까? 당신은 영생을 얻을 자신이 있나요?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할 만큼 선행을 베풀며 살고 있다고 자신하나요?
아니면 스스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요?
최종 구원을 자신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의 엄격한 기준을 만족시킬만큼 선한 공로를 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이것 뿐입니다.
“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시 119:120)
우리가 심판을 두려워하는
첫째 이유는 범죄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감정은 이기심입니다.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하나님이 아닌자기 능력을 신뢰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합니다. 설사 자기의 연약함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것에 의지합니다.
그 결과는 명백합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2)
화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나요? 다른 사람을 욕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있나요?
예수님의 말씀은 언어 습관에만 국한 된 교훈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마음에 분노와 욕설을 품기만 해도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거룩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죄인이고 그의 행동은 범죄입니다.
둘째 이유는 ‘예정’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벗어나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이미 아십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20:15)
그러나 인간은 구원 받을 자의 목록에 자기 이름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구원받을 자를 아시지난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정론적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무책임하게 세상을 방치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생각하면 ,
그 작정에서 내가 벗어나 있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기 쉽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생각할 때 긴장되는
세 번째 이유는 ‘때’입니다.
최후 심판날은 언제 올까요? 인간은 그 날이 언제일까 항상 궁금해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그 날을 안다며 특정날짜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틀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3)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때를 알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늘 깨어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후심판은 기말고사가 아닙니다. 시험날짜를 안다면 학기 내내 놀다가 시험 직전에 벼락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요령에 따라 꽤 좋은 점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그런식으로 준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 날을 미리 안다면 그 때에 맞춰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심판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림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결코 알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이 그날일 줄로 알고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을 생각할 때 두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죄악투성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는 구원의 대상의 명단에 과연 내 이름이 있을지 걱정되고 ,
언제 그날이 올지 알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항상 두려워 떨며 긴장하며 사는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주의 심판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감정은 두려움이 전부일 수 없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감정은 기쁨이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최후 심판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맛보며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심판을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시 48:11)
시편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심판 앞에서 어떻게 안심할 수 있나요? 어떻게 평안한 마음이 가능한가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안심하고 평안을 누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심판앞에서 안심할 수 있는
첫 번째 요소는 믿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안심해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대속의 보혈이 우리 죄를 이미 씻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본 받아 사는 자,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늘 따르는 자는
나중 심판의 결과를 두려워하며 떨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회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분을 믿는다면 계속해서 죄를 추구할 필요가 없고 ,해서도 안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 받은자는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닙니다.인간 처벌하기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요3:16~17)
모든 사람들이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다리십니다.
자기 아들을 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판 앞에서 기뻐할 수 있기 위해 기억해야할
세 번째 주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안심해도 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7~18)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생각할 때 담대함을 가져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심판날에 혹시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공포에 떠는 모습은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긴장은 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 대한 기대 사이에 놓여있는 존재입니다.
둘 사이에 어떤 힘에 이끌리는가에 따라 현재 신앙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쪽은 외면하고 한쪽에만 이끌린다면 그 신앙은 온전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지 못합니다.
두려움에만 지배당한다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회개는 외면한 채
무작정 자신의 구원만 확신한다면 이것도 참으로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신앙을 이끄는 힘은 율법의 형벌입니까,사랑의 능력입니까?
지옥의 공포로 인해 교회에 옵니까,천국의 소망 때문에 교회에 옵니까?
머리에 뿔나고 꼬리가 달린 빨간 몸뚱이의 괴물이 삼지창을 들고 지키는
끓는 가마솥에 빠지는게 두려워 기독교인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새로운 에덴동산이 그리워 신앙인이 되었습니까?
지옥 마케팅으로 교인을 단속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는 자기 말 안들으면 지옥 간다고 교인들을 협박합니다. 교인들은 그말을 믿고 늘 두려워합니다.
얼굴 표정은 항상 경직되고 ,경멸하는 눈으로 불신자를 바라봅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 실제로 이런 모습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지옥이 이끄는 신앙을 가진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이끄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용서받아 하나님나라 백성된 감사로 살아갑니다.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예배하며 찬양합니다.
예수를 닮아 서로 사랑하고 죄인을 가엽게 여기고, 원수를 용서하며 삽니다.
하늘나라를 사는 모습으로 땅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불신자들은 그들의 낯선 삶의 방식을 보고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지만
나중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부러워하고 결국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천국이 이끄는 신앙을 가진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종종 선한 불신자나 타종교인도 최후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제 대답은 “하나님이 아십니다“입니다. 어느인간도 최후심판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구원여부도 확증하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영역을 감히 넘보는 사람은 교만한 자입니다.
다만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임을 믿고 따르며,
다른 사람들도 그 길을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자신의 최후 구원에 대해 궁금하다면 질문을 바꿔봅시다.
”나는 미래에 천국을 갈 수 있을까“에서 ”나는 현재에 천국에 살고 있는가“로 ,
”하나님이 나를 천국에 보내실까?“에서 ”내가 과연 천국을 선택할까?” 로 질문을 바꿔봅시다.
현세의 삶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마귀의 악한 타락이 혼재한 곳입니다.
현재 인간의 모습은 선한 하나님의 형상과 악한 죄인의 모습이 뒤섞인 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때로는 선하게 때로는 악하게 사는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할 날이 옵니다.
현재 지옥을 즐기는 자는 미래에 지옥을 선택할 것이고 ,
현재 천국을 즐기는 자는 미래에 천국을 선택할 것입니다.
현재 천국을 사는 자는 미래에 지옥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천국사람이 보기에 지옥의 삶은 역겹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지옥을 사는 자는 미래에 천국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지옥사람이 보기에 천국의 삶은 역겹기 때문입니다.
천국백성은 지옥같은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 지옥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지옥 백성은 천국같은 세상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아 천국 같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나는 천국에 가까운 사람인가요,지옥에 가까운 사람인가요?
누군가와 다퉜다고 가정해봅시다.
지옥의 사람은 미워합니다.증오합니다. 복수를 꾀합니다. 보복하고 즐거워합니다. 폭력을 만듭니다.
천국의 사람은 용서합니다. 화해를 시도합니다. 내키지 않아도 먼저 사과합니다.
더 잘해줍니다.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평화를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람안에는 두 모습이 다 있습니다.
내 안의 지옥의 모습을 죽이고 천국의 모습을 살리려고 노력하며 산다면 천국의 사람입니다.
내 안에 천국의 모습을 죽이고 지옥의 모습을 살리려고 노력하며 산다면 지옥의 사람입니다.
구원 “받을 것이다 ”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미래형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이 요약에 “아멘” 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자라고 조심스럽게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큐티집 5,6월호 11~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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