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를 통해 지금 진행 중인 현재형 구원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디모데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바울은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시리니 “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표현은 건져내시고 구원하시는 과정을 전제합니다.
세례 받고 이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성도들은 앞으로 계속 구원의 과정을 밟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형 구원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도와 말씀과 교제와 선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인간의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요소들과 상응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호흡과 양식과 가족과 직업입니다.
이 네 가지를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장과 연결시켜보면,
호흡은 기도, 양식은 말씀, 가족은 교제, 직업은 선교입니다.
이제 이 네가지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1) 기도 : 호흡
기도란 무엇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청구서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인가요?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는 자신을 더 이기적으로 만드는 기도 아닐까요?
소원을 비는 기도가 기도의 모든 것인가요? 성경은 기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나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바울 사도는 ”아뢰라 그리하면... 지키시리라 “고 말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욕망 성취가 아닌 마음 지킴입니다. 흔히들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결핍에 대한 불만 때문에 기도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목적은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기도로 소통하면 불안과 불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자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 기도시간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인 기도는 쉼이 없어야 합니다.(살전 5:17)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호흡입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은 시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들숨과 날숨은 무의식적으로 이뤄집니다.
이처럼 기도를 정해진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서 하되, 항상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른다면 그는 건강한 기도자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입니다. 왜냐면 기도에는 네 가지 신앙고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셋째 , 기도행위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리라 기대할 만큼 하나님과 기도자와의 각별한 관계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마 6:33)
기도자의 필요는 말 안 해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채워주십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의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단 3:18)
나의 소망을 아뢰되 하나님의 계획에 몸을 내맡겨야 합니다.
마치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막 14:36)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할까요? 기도에 담길 내용은 무엇인가요?
건강 회복, 문제 해결, 소원성취가 전부 인 가요?
아닙니다. 기도자가 간절히 기도할 바는 감사와 회개와 소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각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와 이웃과 관련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기도입니다.
감사는 과거와 관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구하는 것이 이뤄질 것을 믿고 미리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불 감사’는 은근한 위협 같아 보입니다.
감사까지 미리 드렸으니 꼭 응답하셔야 한다는 압박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본디 감사는 지난 일에 대한 것입니다.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 아른거려 감격하여 드리는 기도가 감사기도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총에 감사합니다.
사실 평범한 일상이 은혜입니다. 별 탈 없는 나날이야말로 엄청난 감사의 주제입니다.
병을 치료해주시는 은혜보다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신 은혜가 더 큰 감사의 소재입니다.
감사는 기도중 제일 먼저 드릴 기도입니다. 어제 일을 감사해야 오늘과 내일도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 기도입니다.
회개는 현재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에 행한 죄를 회개한다면
마치 어제만 죄인이고 오늘은 아닌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지난 과오를 회개해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잘못을 범합니다.
인간에게 죄는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매 순간 죄인입니다.
회개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난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 “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자만입니다.
”회개할 것 없다 “는 생각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 행동으로 지은 죄와 생각으로 지은 죄가 회개 거리입니다.
셋째는 소원 기도입니다.
소원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일들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인간이 얻을 수 없습니다.
소원 기도는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시옵소서 “는 부끄러운 기도가 아닙니다.”주시옵소서 “만 가득 찬 기도가 부끄러운 기도입니다.
소원의 대상은 이웃입니다. 물론 자기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문제에만 몰입하여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명이 각자 자기 문제만 놓고 기도한다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본인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열명이 모두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 , 각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본인을 제외한 아홉 명입니다.
물론 기도를 양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구원의 여정에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숨을 멈추면 죽듯이 기도를 멈추면 위험합니다.
어제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오늘 부끄러운 스스로의 모습을 회개하고 ,
내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통받는 이웃에게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말씀 : 양식
인간은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식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몸이 되고 , 나쁜 음식을 먹으면 병든 몸이 됩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많은 에너지는 음식을 통해 공급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요? 아닙니다.
일찍이 예수는 음식 외에도 사람에게 필요한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 4:4)
이 말씀은 신명기의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3)
신명기 본문에 만나가 등장합니다. 만나는 출애굽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먹거리입니다. 만나는 단순한 떡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는 방법도 “ 말씀”하셨습니다.
한 오멜씩만 거두라고 , 내일을 위해 저장하지 말라고 , 안식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는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 , 이기심과 불안감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담긴 음식이었습니다.
만나의 의미를 기억한 예수는 말씀을 잊고 떡에만 관심을 갖도록 유혹하는 사탄을 광야에서 물리쳤습니다.
말씀이란 무엇인가요? 말씀은 성경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엇이며 어떤 목적을 갖고 기록되었나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
바울 사도는 성경의 세 가지 목적을 말합니다.
독자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기를 ,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기를 기대하며 성경은 기록되었습니다.
이점에서 음식과 비슷합니다.
건전한 식생활은 사람의 육체를 지혜롭게 온전하게 능력 있게 만들어 줍니다.
성경말씀은 육체와 영혼을 지혜롭게 온전하게 능력있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은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통해 영적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첫째 일단 읽어야 합니다.
성경 읽는 요령을 배우기 앞서 중요한 것은 ”읽는 것 그 자체“입니다.
상당수 기독교인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동화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전부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풍월이 성경 지식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깊이가 얕습니다.
신앙의 근육이 약해서 쉽게 다치고 병듭니다. 사람이 자라면 자란 만큼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정독과 통독입니다.
정독은 짧은 본문을 깊게 읽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오합니다.
매일 몇 단락 이내의 본문을 곱씹어 가며 그 의미를 헤아려 묵상하며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기억나는 문장을 암송하는 것도 추천합니다. 큐티 잡지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통독은 긴 본문을 넓게 읽기입니다. 성경은 하나의 메시지가 면면이 흐르는 한 권의 책입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성경 66권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그중 구원이 가장 분량을 많이 차지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디모데후서 본문에서 성경의 목적을 말할 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이런 메시지를 읽어내려면 세세한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에 유념하며 많은 분량을 빨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정독과 통독을 통해 말씀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공동체를 향해 성경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관찰, 해석, 적용하여 전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설교자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본문을 면밀히 읽고 ,
그 의미를 잘 정리하여, 삶 속에서 실천할 방도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설교자의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는 이를 감안하고 들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설교는 듣는 이의 의지와 취향이 아닌 성경본문에 기초하여 선포됩니다.
성경 읽기는 읽는 자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크지만 성실하게 준비된 설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 “ 하는 수용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은 뒤의 나눔이 중요합니다.. 설교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향해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듣고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는 공동체적 설교 듣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 독서를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성경 한 권의 책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그 한 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 권의 책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처음 읽으면 다들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이
낯선 언어로 기록되고 번역되어 전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문화와 문학적 배경 지식 없이 성경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두 종류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첫째는 신앙서적입니다.
기독교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성경과 신앙에 관련된 책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려 읽어야 합니다. 사이비 이단 책을 읽으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번영신학과 왜곡된 은사주의에 치우친 책도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는 교양서적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등에 관한 책을 통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성경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말씀 없이 구원의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밥 먹어야 살 수 있듯이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습관을 갖고 매주 설교를 듣고 꾸준한 독서 생활을 통해 말씀의 양식을 잘 섭취할 수 있습니다.
(3) 교제: 가족
호흡과 음식 외에 인간이 생존하고 성장하고 성숙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막 태어난 아기에게 숨 쉬고 먹는 것 외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 일가요? 가족입니다.
가족은 공동체입니다. 아기에게는 낳아주고 보살펴주고 사랑으로 길러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평생의 동지인 형제의 우애가 필요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관심과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공동체에 준하는 교회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신앙공동체에서 이뤄지는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필수적입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몬 1:6)
라는 빌레몬서 말씀처럼 믿음의 교제가 구원의 길잡이가 됩니다. 교제는 그리스도인의 가족 됨입니다.
교회를 통해 주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전달자가 필요합니다.
물론 사람을 매개하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은총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종교행위를 통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자기 만족감을 하나님의 은혜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공유되고 전파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며 전달자로 선택하셨듯이 교회 공동체는 성도의 친밀한 교제가 흘러넘쳐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매개가 됩니다.
교우들 사이의 관심, 공감, 대화 기도를 통해 주님의 사람이 임합니다.
최근 코이노니아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교리적으로 폐쇄적이고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패거리 문화를 교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 공동체를 더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형교회 뒷자리에서 나 홀로 신앙생활하는 사례가 흔합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부끄러운 부패와 비리로 인해 교회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없는 가정이 없듯이 문제 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 다툼이 있다고 해서
가족은 필요 없다 나 혼자 살겠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실망했다고 해서 교회는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신앙입니다. 공동체의 교제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미리 체험합니다.
모델하우스나 시식코너와 비슷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전지훈련 장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인 정의와 평화 용서와 화해를 연습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둘째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기 것을 나무지 않는 사람은 천국 시민이 아닙니다. 자기의 관심과 시간, 재물과 노동을 타인을 위해 베풀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소유의 기쁨만 알고 나눔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봉사를 경험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를 돕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섬김이 천국의 라이프 스타일입니다. 높아지는 군림의 기쁨만 알고 낮아지는 섬김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4) 선교: 직업
호흡, 양식, 가족에 이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일가요? 직업입니다.
사람은 언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나요? 관심과 재능을 살려 일할 때 그것으로 이웃과 세상에 유익을 끼칠 때입니다.
직업은 단순한 밥벌이 이상입니다. 호구지책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인생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노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인정을 받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직업의 중요한 의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교라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사명입니다.
구원받고 구원을 이뤄가는 사람은 선행과 전도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합니다.
선교는 단지 포교가 아닙니다. 종교 전달 그 이상입니다. 복음은 사랑이며 선교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선교는 예수를 본받는 삶입니다.
예수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희생했듯이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선교의 과정과 방법을 크게 세 단계로 살펴봅시다.
첫째는 전도입니다.
흔히들 전도하면 노방 전도자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에 탄복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메시지만 강조될 뿐 그 메시지와 관련된 전도자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자비와 긍휼,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예수 닮은 삶이 바로 전도입니다.
둘째는 구별됨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는 세상에서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구별되는 삶이 예수의 삶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 모습은 세상에 낯선 현상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다른 삶, 다른 생활방식, 다른 취향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에서 부러움으로 변화됩니다.
셋째는 증언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면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 묻게 됩니다.
그때 하는 대답이 바로 증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복음의 증언입니다.
증언하기 위해 성경과 교리를 암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체험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간증을 하면 됩니다. 삶에서 우러나는 신앙고백이 증언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 만의 방식으로 자기 신앙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 나라, 일상에서 묻어나는 예수의 향기가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파됩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이뤄진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은 교회를 통해 진행됩니다.
기도라는 호흡, 말씀이라는 양식, 교회라는 가족, 선교라는 직업을 통해 구원은 현재 진행형이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어 기도를 생활화하고
성경을 가까이하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며
전도와 봉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나는 구원받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구원의 여정이지만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 길을 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 큐티 2021년 3.4월호 12p~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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