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당황의 이유는 정체성과 현실의 괴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죄가 많습니다.
일상에서 죄짓고 주일날 회개하기를 반복하며 삽니다.
신앙과 생활의 분열이 스스로 자신 있게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장담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구원을 확답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질문 자체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은 과거형입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구원이 완료되었고 현재 구원의 상태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과거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과연 구원이 지난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되는 것인가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구원은 자신있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레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번 통과하고 마는 ‘ 문 ’이 아니라 평생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생 여정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구원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백성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인 정의, 평화 생명을 내면에 이루고 ,
그에 따라 하나님 다스림을 실천하며 살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합니다.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개념입니다. 구원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며 미래입니다.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고 나중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았다” “받고 있다” “받을 것이다”라는 세 시제 동사로 표현 가능합니다.
이제 구원의 세 시제를 살펴봅시다.
1. 예수를 통해 이미 시작된 과거형 구원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형으로 표현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과거는 인간의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과거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동이기 앞서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받았다”는 “주었다”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구원을 인간이 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받는 것이지만 ,
받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을 주셨나요?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주셨습니다.
예수를 통해 영생, 즉 구원이 가능합니다. 기독교 구원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
그러므로 “구원주셨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예수를 믿고 그가 뚫은 구원의 길에 발을 내딛으며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
죄의 대가인 죽음의 형벌을 예수가 대속하였음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1). 죄악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불신자는 이 말을 싫어합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반문합니다.
지금껏 다른 사람 해코지한 적 없이 나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왔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고 따집니다.
벌금을 내거나 교도소에 갈 만큼 큰 죄를 지은 적 없는데 왜 죄인이냐며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죄인인가 아닌가 판단하려면 기준이 필요합니다.
불신자가 말하는 죄의 기준은 법입니다. 법은 잠정적입니다.
국가가 정한 법은 때때로 바뀝니다. 법은 상대적입니다.
국가마다 달라서 어느 나라에서 죄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죄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 죄인 것이 다른 시대에는 죄가 아닙니다. 법은 허술합니다.
같은 행위도 어떤 변호사, 검사, 판사를 만나는가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죄의 기준입니다.
죄를 판단하는 근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이웃 향한 사랑의 존재 여부가 죄의 기준입니다.
사랑은 인간 내면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행위 이전에 의도와 원인과 관계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죄의 기준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범죄 행위 이전에 죄인의 경향성이 존재합니다. 죄인의 속성이 범죄의 원인이 됩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은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그 속성은 이기심이며 그 결과는 크게 세 가지의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기 우상 숭배입니다. 죄의 속성은 자기중심적 경향성입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 고통에는 민감하지만 타인의 아픔에는 둔감하거나 무감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기독교에서 원죄라고 부르는 최초 인간의 범죄를 보면 근원적인 자기 중심성이 나타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먹은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들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유도 선악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 3:22~23)
가치판단의 기준을 객관적인 외부가 아닌 주관적인 내부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이라 하시는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이라 하시는 것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느낌을 기준으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 인간은 결국 어떤 행동을 하나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이 그 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 4:4~8)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한 결과는 약자 살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대대로라면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기준대로라면 자신의 제사는 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기준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감정은 분노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결과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시기와 질투, 약자를 향한 폭력과 살인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가족권력관계에서 자기보다 약자인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둘째는 탐욕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결국은 공허와 불안입니다.
하나님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세운 자는 하나님의 빈자리를 느끼며 공허감에 몸부림칩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가장 크게 느낄 때는 미래를 알지 못하는 불안이 엄습할 때입니다.
인간은 한 치 앞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할 미래를 인간 스스로는 통제할 수 없으니 불안합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미래는 죽음과 그 이후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공허와 불안을 피조물로 채웁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탐욕입니다.
피조물로는 창조주의 부재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영원하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공식을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피조물로 채우려고 하니
아무리 채워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더 많이‘ ’더 많이‘를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옥수수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잘 자라서 한 그루의 옥수수 포기를 이루었다면
거기에는 수백 개의 알갱이가 달린 여러 개의 옥수수가 열립니다. 한 개의 알갱이가 수천 개의 알갱이를 낳게 됩니다.
자연 상태 그대로 큰 수확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연의 산물은 공정하게 분배된다면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없는 불안으로 인한 탐욕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개의 빵으로 배부를 수 있고 각자가 한 개의 빵만을 먹는다면
모든 이가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회를 가정해봅시다.
내일은 또 내일을 위한 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빵 주는 자를 신뢰하지 못하여
“내일은 빵이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두 개의 빵을 가졌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빵을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빵을 갖지 못한 사람은 두 개 가져간 사람보다 약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하나님 없이 탐욕을 숭배하는 세상에서는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셋째는 교만 우상 숭배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자의 후손은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가인은 성을 쌓았고, 야발은 목축을 시작했으며,
유발은 악기를 연주했고 , 두발 가인은 대장장이가 되었습니다. (창 4:17~22)
기술의 발전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도전으로 나타납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3~4)
문명의 발달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에 대한 모방입니다.
인간이 구운 벽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상태의 돌을 대신하고
인간이 퍼 올린 역청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상태의 진흙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 벽돌과 역청으로 인간의 탑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까지 닿게 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흉내 내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셨을 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인간은 법으로 죄성을 억제하려 합니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세상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사회 규범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성을 억제하고 싶지 않습니다. 탐욕을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권력이 없는 자는 법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탐욕을 억제합니다.
하지만 권력이 있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재판하는 권력 있는 자는 법을 통제하여 교묘하게 자기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강자는 법을 움직여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이런 현상은 국가 간에도 나타납니다. 힘 있는 국가는 힘없는 국가를 제압합니다.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 노략합니다.
약한 국가는 식민지가 되고 그 백성들은 노예가 됩니다.
법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죄성은 결국 제국을 탄생시킵니다.
성경에는 많은 제국이 등장합니다.
히브리 노예를 억압했던 이집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유다를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 예수와 초대교회시대의 로마가 바로 그 제국들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러한 제국들을 죄악의 권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타인 아래에서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위에서 군림하기를 원합니다.
남들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노력합니다.
을이 아닌 갑이 되려고 명문고, 명문대, 대기업을 지향합니다.
내 위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을 내쫓았고,
그 자리를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 자기가 타인의 윗자리를 차지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 우상숭배입니다.
(2) 죽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본래 이기적인 인간은 하나님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기의 탐욕과 교만을 올려놓고 우상 숭배합니다. 그 결과 세상은 망가지고 약자는 통곡하고 ,
결국 자신도 파멸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죄성을 방치하면 결국 어떻게 되나요?
첫째는 피해입니다.
죄악은 결국 피해자를 낳습니다. 마음속의 죄는 생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교만과 탐욕은 언젠가는 반드시 언어나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 희생자는 약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힘이 큰 자의 범죄일수록 피해도 큽니다. 기업이 범죄 하면 수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
국가가 범죄 하면 역사에 고통의 기록을 남깁니다. 강자의 범죄일수록 교묘합니다.
법을 조작하여 죄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도록 범죄 합니다.
그 결과 법에 호소할 수 없는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합니다.
교회가 범죄 하면 사태는 더 심각합니다.
신학과 성경을 아는 목회자는 자기의 범죄를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합리화시킵니다.
교만과 탐욕에 찌든 교회 지도자의 악한 결정은
순진한 교인을 피해자로 심지어 공범자로 만듭니다.
둘째는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자는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죄의 대가를 물게 하십니다. 죄악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고한 피가 흐르지 않도록 각성하게 하십니다.
기독교의 용서는 정의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죄악의 대가를 포함합니다.
하나님도 범죄 한, 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셨고 포로로 만드셨습니다.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죄악을 징계하고 죄인은 처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죄인이 깨닫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사사기를 보면 외적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셨습니다.
회개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회초리는 사랑의 매입니다.
셋째는 처벌입니다.
죄인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들끼리 정한 법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다양한 처벌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크나 작으나 죄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 나타나는 피해는 막대합니다.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하는 명대사가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모래알이든 바윗돌이든 물에 가라앉는 건 똑같아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징계는 사형입니다. 죄악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나님을 죽인 인간은 결국 이웃의 영과 육과 혼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처벌 또한 죽음입니다. 그가 자초한 죽음입니다.
(3) 대속
모든 인간이 죄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이 가능한가요?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 1:4~5)
예수의 대속으로 구원이 가능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그 보혈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하였기에 가능합니다.
예수가 죄를 대신 지고 속죄하기 위해 죽은 것이 왜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대속이 되나요?
대속의 단계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제물입니다.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약 제사법을 통해
죄인이 제물을 죽여 자기의 죽음 형벌을 대신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죄인 대신 죽을 제물이 있으면 대속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한 죄악으로 인한 수치를 가려주려고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유월절 어린양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죽지 않고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흠 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 죄를 회개하게 했습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흠 없는 동물이 나를 대신하여 처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시는 죄짓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얼마 못 갑니다.
곧 다시 죄짓고 다른 동물로 제물로 바치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단번에 끝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었습니다.
왜 하필이며 로마시대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예수는 죽어야 했을까요?
로마는 인류 역사의 가장 대표적인 제국입니다.
로마시대 이후의 제국들은 로마를 흉내 냅니다. 제국은 죄악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의 극치를 상징하는 로마시대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죄인 바라바 대신 죽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자들과 못 박은 자들의 용서를 간구했고 (눅23:34)
죄인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눅 23:43).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용서와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셋째는 보혈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류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는 유월절 어린양이며 죄인을 용서하는 영원한 제물입니다.
원래는 죄인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대신 죽었습니다.
원래는 죄인이 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대신 피 흘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찬을 통해 예수의 보혈을 경험합니다.
성찬의 떡을 먹을 때마다 죄인 대신 찢긴 몸을 기억하고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죄인 대신 흘린 피를 기념합니다.
예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의 몸이 됩니다. 구원받고 구원하는 교회가 됩니다.
(4) 믿음
예수는 이천 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속의 죽음이 어떻게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예수의 보혈이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피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믿음은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로 다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임을 믿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구약 제사에 비추어 보면 유사한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는 전가입니다.
성경을 보면 제사장의 안수를 통해 죄인의 죄가 동물에게 전가됩니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 1:4) 안수를 통해 죄를 전가받은 제물이
죄인 대신 죽음으로써 죄인의 죄가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제사에서는 제물 안수와 죄의 전가 후에 제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제사에서는 예수가 먼저 죽고, 그 후에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써 전가가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전가되어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제사가 됩니다.
둘째는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자는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도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행 26:20)
예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 제사였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는 죄악 세상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실천합니다.
셋째는 중생입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은 자는 거듭남으로써 구원받습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3~5)
거듭남 즉 중생은 세례와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애굽의 노예가 홍해를 건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났듯이
인간은 회개와 세례와 성령강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됩니다.
세례와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받았다’라는 과거형 구원은
예수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 그 길에 발을 내디뎠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죄인 임을 알고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사였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 하나님나라QT 2021년 1,2월호 12P~2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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