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조금씩 다가가기

환난과 피난처

왕언니 2020. 8. 28. 21:26

 

환난(患難)과 피난처(避難處) 

-시편 46편 1~11절, 로마서 5:3~4절-

 

2020. 8. 23(주일 1,2,3부예배 이남혁 목사 설교)                                                                      

 

 

본문(시편 46편 1~11절, 로마서 5장 3~4절)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2020년. 현재
팬데믹이라 불리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의 상황은 한 마디로 ‘환란(患亂)’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 한 번도 이 ‘환란’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고
‘환난(患難)’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환난’이 때로는 징벌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고,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핍박과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환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튼튼한 피난처로 들어가면 안전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It doesn’t say here that God will help you if you get into a strong refuge.)
하나님이 친히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It says he is that refuge.)

 

따라서 ‘환난’ 중에 만날 ‘피난처’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환난’이 주는 최종 목적은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한 삶, 건강과, 안전과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로마서 5장 3절과 4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환난 중에 주님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편안(便安)’이 아니라 ‘평안(平安)’입니다.

편안한 삶은 조금만 그 상황이 흔들려도 모래성 무너지듯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안한 삶’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요새와도 같습니다.
그 ‘평안’을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어야만
우리의 내면세계와 영적인 질서가 바르게 정돈되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환난’이 주는 과정 속에 ‘인내’가 있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즉 ‘환난’이 주는 최종 목적지는 바로 ‘소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 ‘사랑’ 가운데서 빚어지는 열매이며, 그 ‘사랑’이 가능케 하는 모든 삶에서의 태도입니다. 

 

물론 ‘연단’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단’ 끝에는 놀라운 결과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약의 ‘욥’, 요셉, 모세, 다윗과
신약에서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특히 사도 바울)에게도 이러한 인내와 연단의 과정이 있었고,
그 모든 과정들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이 열매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경 속 이야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고, 또 증거되었습니다.
(찬송가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를 통해 만들어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 575장)’,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환난’ 가운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해 우리 인간의 시선과 방향성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 받기를 원하시고,
이 땅에만, 우리 주변의 상황에만 머물러 있는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살아계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그리고 천국 소망 가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마치 여호와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며 조롱하고 핍박하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잃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거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암울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침묵하셨던 시대,
그 어떤 선지자도 보내주지 않으셨던,
그래서 역사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춥고, 종교가 가장 부패하고,
타락하고, 거짓과 불의가 가득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히 3:1).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환난 속에서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작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소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출애굽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대가 죽이려고 쫒아오고 있는데,
바로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 앞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출 14:13~14)

 

우리가 가만히 있어야 하는 이유는
환난을 이겨내는 것이 내 힘으로, 내 능력과 지식과 내가 가진 권력이나 리더십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신뢰하며,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높이며 도움을 구하는 예배자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